빛의 작가와 어둠의 작가였다. 19세기 모스크바는 톨스토이로 빛났고, 뻬쩨르부르그는 도스토예프스키로 어두워갔다. 그는 이상을 얘기했고 그는 현실을 얘기했다. 그 앞에는 모든 것이 있었고 그 앞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둘은 서로를 찬미하고 서로의 작품에서 깊은 영감을 얻었으나 실제로 만난 적도, 서신을 교환한 적도 없었다. 이제 난 두 작가의 고리가 된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거지에게 한평 이불을 제공해준 정든 숙소여, 안녕. 카야 스코델라리오 닮은 주인 누나도 안녕.
지하철역 나서기 전 아쉬워서 한컷.
비행기 시간에 간신히 맞췄다. 종종 여행자들이 비행기를 놓쳤다는 소릴 들을 때마다 '저건 뭐 병신도 아니고 어떻게 비행기 시간을 늦을 수가 있지?' 욕했으나 그 병신이 내가 될 뻔 했다. 숙소에서 너무 여유를 부린 탓이다. 공항 가는 고속열차로 환승하는 기차역에서 한참 헤맸다. 한번 와봤던 곳이니 금방 찾을 줄 알았다. 난 한번 간 길은 절대 안 잊는다. 심지어 만취해서 지난 길이라도 지도 한장 주면 바로 찾는다. 그런데 여긴 러시아다. 우리나라는 대개 타는 곳과 내리는 곳이 같지만 여긴 아니다. 맙소사. 내 친구 무함마드 씨와 지났던 곳은 승차장이 아니라 하차장이란다. 역 직원과 주변 사람들에게 물었지만 번역기의 부정확탓인지 질문 이해를 못했는지 서로 다른 길을 일러준다. 결국 10명에게 물어 통계를 냈다. 가장 많은 사람(6명)이 답하는 곳으로 가자. 천만다행으로 옳게 왔다. 비행기 출발 30분 전에 간신히 공항에 몸을 댔다. 진짜 큰일 날뻔했어. 가는 날까지 곱게 보내주진 않는 모스크바다. 내가 안 갔으면 좋겠니?
바깥 풍경을 만끽하고 싶어 창가좌석을 정했다. 덕분에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상공을 담았다. 다만 귀가 너무 아프다. 아무래도 좌석 위치에 따라 통증의 정도가 다른 듯하다. 통로측에 앉았을 땐 못 느꼈던 고도 상승, 하강으로 인한 먹먹함이 매우 심하다. 시간이 갈수록 더 아파져서 고막이 터져나갈 것만 같다. '윽윽!' 거리면서 귓구멍이 버텨주길 바랄 뿐.
비행 시간은 한 시간 반정도다. 빨간 핑이 상트페테르부르크, 반대점이 모스크바다. 광활한 러시아 영토에 비하면 두 도시는 가까워 보였다. '끽해야 서울 부산정도겠네?' 예상했으나...
이렇게 지도를 뒤로 땡기면, 염병 대한민국이 두 개는 들어갈 거리다. 넓디 넓은 러시아 땅덩어리가 일으킨 착시였다. 전체가 말도 안되게 크다보니 한 귀퉁이가 상대적으로 작아보인 것이다.
그만큼 가는 데 드는 시간으로 거리를 측정하는 요즘 사람들이 자주 범하는 오류이기도 하다. 한 시간 반이라는 비행시간은 650km를 330km로 오인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아아.. 거리를 시간으로 바꾸어버린 자의 착란이여.
중얼거리면서 이문열 아저씨 흉내를 내다보면
확실히 모스크바 도모데도보 공항보다는 규모가 작다. 개인적으로는 요기가 아늑하고 조용하니 더 마음에 든다.
공항을 나서면 의문의 승합차가 여러대 서있다. 공항이 있는 외곽에서 시내 지하철역까지 데려다주는 택시다. 물론 나 혼자 타진 않는다. 대여섯명의 승객이 차면 출발하는 식이다. 비용은 캐리어 포함 인당 4루블(우리 돈 800원) 가량으로 매우 저렴하다. 나같은 여행객이나 벌이가 적은 러시아인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교통수단이다. 물론 대충 보이는 승합차 아무거나 타면 안된다. 목적지가 전부 달라서 엉뚱한 곳으로 가는 수가 있다. 차량 문에 인쇄된 러시아어를 유심히 살피고 운전수한테 물어보길.
여긴 잿빛 모스크바에서는 보지 못했던 푸릇파릇 초록빛이 한가득이다. 날씨는 또 왜 이렇게 기가 막힌지. 조금만 걸어도 더울 지경이다.
조금이라도 빨리 상트페테르부르크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대충 지하철역 보이고 공원 있는 곳 아무데서나 내렸다. 죽인다 정말. 이 장소에서 가족 카톡방에 '여기다! 여기! 모스크바보다 여기야!' 호들갑을 떨었다. 100% 진심이었다. 모스크바가 공산국가의 심장, 회색 사회주의를 연상시켰다면 여긴 여느 평화로운 관광 휴양지였다. 두 도시 각각 나름의 매력을 지녔지만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꽃, 나무의 녹음의 청신함이 더 큰 매혹이었다. 역시 인간은 자연을 마주하며 살아야 하나?
공원 근처 모스코브스카야 역이다. 처음엔 대체 지하철을 어디서 타는지 어리둥절했다. 승강장이 없어.
얼마 안 있으니 사람들이 저 까만 문앞에 서기 시작한다. '아! 엘리베이터 타고 한층 내려가야 있구나!' 깨달았다. 하지만 미친 저게 지하철 문이다. 우리나라 지하철의 스크린도어를 저런 식으로 설치해둔 거였다. 열차가 도착해서 출입문을 열면 저 엘리베이터 문처럼 생긴 까만 문도 같이 열린다ㅋㅋㅋㅋㅋ 싱기방기하다.
아무리 봐도 나는 이 나라랑 너무 잘 맞는다. 러시아 특징 또 하나. 모스크바나 여기나, 사람들이 책을 엄청 읽는다. 지하철에 스마트폰 보는 사람보다 책 읽는 사람이 훨씬 많다. 식당에서, 카페에서, 지하철에서, 택시에서 항상 무언가를 손에 들고 읽는다. 푸쉬킨, 체호프,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의 후예답다. 만약 우리나라 역사에도 저런 대문호들이 있었다면 한국인도 책을 좋아했을까. 글쎄다. 세계에서 책을 가장 안 읽는 나라 국민들이 노벨상 시즌만 되면 노벨문학상을 고대하는 게 현실인걸. 러시아 지하철은 인터넷이 안되니까 책을 본다는 얘기도 있다. 근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지하철에서 인터넷 안된다고 책을 볼까? 이것 역시 글쎄.. 난 왜 광화문에 모여서 지하철 와이파이 설치하라고 시위하는 장면부터 그려지지.
지하철역과 숙소를 잇는 거리다. 작품이다. 아름답다 아름다워. 그냥 길바닥이 저런 수준이란 말이다. 탁 막힌 빌딩 숲이 아니다. 고층 건물 따윈 없다. 아무리 높아봤자 10층을 안 넘는다. 제일 높은 건물이 성당이니 말 다했다.
하늘도 청량하기 그지없다. 미세먼지 따위 있을리가. 러시아에 미세먼지가 불어왔다면 중국이든 러시아든 둘 중 하나는 지도상에서 없어졌겠지. 숙소 가는 길의 맑은 하늘을 보면서 문득 러시안이 부러워졌다. 우리나라 개인의 3분의 1 밖에 안되는 소득으로 사는 사람의 얼굴에서 약소국의 설움따위는 안 읽힌다. 오히려 '시바 우리는 보드카와 불곰국의 로스케다! 누구든 한번 덤벼봐라!' 패기가 흐른다. 그런 애들이 책도 많이 읽어서 교양머리도 있다. 게다가 예쁘고 잘생겼다. 이거 사기 아니냐?
2018년 기준, 세계에서 핵무기를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으며 세계 군사력 순위 2위,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지닌 국가의 위엄이다. 이게 난 너무 부러웠다. 소득 높으면 뭐하냐 어디 가서 입도 뻥긋 못하고 당하기만 하는걸. 플라톤 말마따나 국가의 힘은 강인한 수호계급에서 나온다. 대통령부터가 상남자의 표본이다. 혹자는 푸틴을 부패한 독재자라 폄하하지만 마키아밸리스트인 내 눈엔 이상적인 통치자 그 자체다. 집권 이후 99%의 스킨헤드를 깜빵에 쳐넣고 범죄자들을 싸그리 소탕한 그다. 푸틴이 없었으면 나의 여행도 이만큼 평안하진 못했을 거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숙소 안내서. 2박 3일에 1,348루블(23000원)이다. 주인도 친절하고 시설도 나쁘지 않았다.
어우야 근데 통치자고 지랄이고 일단 밥부터 먹어야겠다. 숙소에 캐리어를 내던지다시피 팽개치고 거리로 나선다. 쉴 틈 따윈 없다. 오늘, 지금 당장 도스토예프스키를 만나자!
도선생 생가 가는 길에 보이는 식당 아무데나 들어가기로 했다. 길거리에서 여인이 기다란 봉 위에서 천사 흉내를 내고 있다. 시계추처럼 앞뒤양옆으로 출렁거린다. 무섭지도 않은지 무슨 식당만 열심히 홍보하고 있다. 본업에 충실한 근로자다. 건물 외벽 조각상과의 대비가 인상적이라 찍어봄.
식당은 한적하다. 직원은 엠마왓슨을 닮았다.
빨리 먹고 가야해서 대충 아무거나 시켰다. 빠네 파스타인가? 별 특별한 건 없었다. 아, 나무 접시 위의 빨간 콩(?) 향이 굉장이 독특하다. 대체 저게 뭐냐. 생전 처음 맡아보는 향, 처음 먹어보는 맛이다. 얼핏 꽃, 과일향이 날 것 같지만 아니다. 향수 혹은 섬유유연제를 고체화 해서 씹는 맛이다. 그래, 더럽게 별로란 얘기다. 배고파서 면과 빵만 욱여넣었다.
가는 길에 만난 네바강 지류. 캬.... 정말 도시 곳곳에 강이 흐른다. 네바강이라는 거대한 본류가 도시를 양분하고 그 구석구석을 저런 지류들이 또 세분하는 모양새다. 곳곳에 선착장이 떠있어서 언제 어디서든 보트를 타고 도시를 유람할 수 있다. 강변을 걷고 있노라면 축축한 물내음이 날아오고 시원한 물가루도 간간이 뿌려진다.
경계심 반 호기심 반으로 날 힐끔거리던 아이는 뭐가 그리 급한지 초록불이 되자마자 쏜살 같이 뛰어나간다. 수백년 세월을 견디면서 그만큼의 이야기를 담게 된 건물들을 정돈된 듯 안 된 듯한 투박한 거리가 감싼다. 정교회당도 가까이 자리를 잡고 섰다. 결국 솟은 것들은 죄다 내가 읽은 소설 속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겠구나. 달라진 건 그곳의 사람과 달리는 것들 뿐.
-똑똑똑
도스토예프스키씨, 당신도 이걸 봤던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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