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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by TheStrok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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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나는 간다. 모스크바의 심장 붉은광장으로! 지하철 탈까 하다가 다른 교통수단도 이용해보고 싶어 버스를 택했다. 어려울 거 하나 없다. 구글신께서 그대를 광장으로 인도하실지어다. 그분께서는 버스노선도 일러주신다.

 이렇게 말이다. 이건 올 때 캡쳐한 경로다. 문제는 이 어린양의 버스비다. 얼만지 모른다. 걍 대충 달라는대로 줄까도 생각했지만 여긴 러시아다. 달라는 게 얼만지 알아들을 방법이 없어요! 고민고민하고 있었는데 뒤에서 누군가 'where are you from?'이라고 한다. 와우. 듣던 중 반가운 영어다. 나참 일생에 영어가 반가운 순간이 다 있네 하며 돌아보니 영락 없는 집시다. 담배 하나만 달란다. 그래 나도 담배나 하나 펴야겠다-동양인과 집시가 맞담배를 태운다. 그러는 동안 '어디 가냐' '버스 탈 거냐' 등을 묻고 '붉은광장 간다' '근데 몇 번 버스 타야하는지 모르겠다. 버스비도 모른다' 답한다. 노숙자 아재가 친절하게 다 알려줬다ㅋㅋㅋㅋ 그때 옆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아줌마가 노숙자를 흘겨보면서 나를 향해 이리 오라고 손짓한다. 나에게 시비라도 거는 줄 아셨나보다. 그렇게 걱정 안해줘도 되는데.. 참 고마웠다.

마침 내가 타야 할 버스가 도착했고 우연히도 그 아주머니와 같은 버스를 탔다. 붉은광장 가는 동안 또 손짓발짓 섞어가며 대화를 나눴다. 내가 내려야 할 정류장도 듣고 무슨 비스킷도 하나 얻어먹었다. 이 나라 사람들은 왜 이렇게 친절할까. 지금까지 내가 인터넷에서 본 '불곰국 또라이.gif'들은 대체 뭐지.

버스비는 1000원 정도다. 버스기사에게 현금을 주면 우리나라 티머니 같은 플라스틱 카드를 받는다. 그걸 입구 옆 기기에 태그하면 조그마한 개찰구가 열린다. 다른 건 모르겠고 버스 내부가 굉장히 깨끗했다. 바깥 구경하면서 한 20분 달렸나.

낮에 봤던 볼쇼이극장 앞에서 내려서

차도를 건너고 뒤를 돌아보니

빨갱이들의 대부가 있었다. 맙소사. 동상 얼굴 보고 깜짝 놀라서 설마설마 했는데 정말 '그새끼'였다. 당신만 없었어도 세상은 좀 더 평화로웠을 겁니다. 만국의 노동자가 단결하다못해 온 세상을 뒤집으려 하거든요. 에그머니나 도망가자! 10분 가량 줄행랑을 놓으면

기다리고 기다리던 붉은광장 입구가 나온다. 두근두근. 저기 저 문을 통과하면 드디어...!



요건 동영상부터 보자

짜자잔.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언젠가 정규재 아저씨가 대한민국에 한국인이 숭고함을 느낄만한 공간이 있는지 물었다. 나 역시 우리나라 각지를 돌면서도 아름다움은 느꼈으나 숭고함은 글쎄올시다. 근데 여긴 숭고함 그 자체다. 러시아 소설만 좋아했지 러시아 정치, 역사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던지라 붉은광장이 뭐하는 곳인지도 제대로 몰랐다. 오기 전에 잠깐 책 몇권 훑어본 게 전부다. 그런 곳에서 경이에 가까운 감정을 느끼다니. 살면서 이런 광경과 기분은 처음이다. 한없이 넓고 웅장하다. 동시에 고요하다. 모비딕을 목도하면 이런 기분일까. 이제야 러시아구나. 그곳에 도착했구나. 다른 세계다 여기는. 당연한 애기지만 눈에 맺히는 모든 상이 새롭다. 접하는 사람도 처음, 들리는 소리도, 말도 모두 처음 투성이다. 해외여행의 묘미는 바로 이거다. 일생을 살아가면서, 혹은 살아지면서 스칠 수 없는 누군가, 무언가를 접하는 것.

 피곤한 육신을 이끌고 꾸역꾸역 오길 정말 잘했다. 담배 피길 잘했다. 숙소 놓치길 잘했다. 이 야경을 보길 잘했다. 평생 후회할 짓 하나 안 했다.

뒤를 돌면 이런 광경이다. 사진상 왼쪽은 크렘린 궁(러시아 대통령이 있는 곳이자 제국시절 왕궁), 오른쪽은 굼 백화점, 저 멀리 가운데 빨간 성은 러시아 국립역사박물관이다.

성 바실리 성당. '테트리스 성당'으로 유명하다던데 난 왜 본 기억이 없지.

굼 백화점 내부로 들어가봤다. 또다른 별천지다. 다만 내가 살만한 상품은 없었다. 상품 가격대가 장난 아니다.

 가만 생각해보니까 우리나라에도 이런 거리형 쇼핑몰이 꽤 있다. 왕십리 엔터식스나 동탄 센터포인트몰 등. 심지어 일본 갔을 때도 많이 봤다. 이 굼 백화점이 바로 그들의 원조격인가? 1890년에 세워졌다고 하니까. 한산하니 쇼핑하기 딱 좋은 분위기다.

하지만 내가 산 건 아이스크림 하나 뿐이다 ㅋ 그것도 바닐라 맛과 초코맛 중 어떤 걸 먹을지 심각한 내적 갈등에 휩싸였다. 안쓰러워보였는지 직원이 한 숟갈씩 떠서 맛을 보여준다. 바닐라가 더 부드럽군. 계산을 하고 발길을 돌리려는데 직원이 아주 작은 콘에 초코맛 아이스크림을 얹어서 건네준다. 감동이다. 스파시바!

한 상점의 직원이 카운터에 머리를 묻고 한숨을 푹푹 쉰다. 빨리 퇴근하고 싶은가보다. 나한텐 감탄의 대상인 이곳도 누군가에겐 밥벌이를 위한 일터일 뿐이구나. 힘내세요. 해 뜰날 있겠죠. 나중에 한국 놀러오면 당신과 똑같은 나를 마주할 수 있을거예요.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뭐라도 사들고 가야지!' 호기를 부렸지만 이내 '이야 도저히 이건 아니다.'

사람 구경만 열심히 한다. 그것도 나름 재밌다. 그들의 솟은 콧대와 새파란 눈, 눈 같이 새하얀 피부, 강인한 턱, 내 허리춤까지 오는 다리와 머리 하나는 더 들어갈 법한 키를 보고 있으면 기분이 업된다. 역시 예쁘고 잘생긴 게 제일 재밌어. 그때 문득 쇼윈도를 보니 웬 쪼그만 원숭이가 입에 아이스크림 묻히고 실실 쪼개고 있었다. 기분 다운됐다. 아

'인생은 무엇인가' 한탄하며 밖으로 나왔더니 와우 저 앞에 뭐가 반짝거리네?



오호오... 멋지다. 요런 장식이 200미터정도 쭉 이어져있다. 개인적으로 요 반짝이는 거리가 참 맘에 든다. 5월의 크리스마스 같잖아. 지나가는 사람도 제일 많았고 벤치에 앉아 구경도 할 수 있고 무엇보다 담배를 펴도 된다. 참 여긴 신기하다. 담배를 펴도 될 것 같은 데선 피면 안되고 담배를 피면 안될 것 같은 데선 펴도 된다. 임산부가 유모차 끌면서 길빵하는 장면도 봤다. 띠용~

정신없이 광장 성당 백화점 거리를 헤집고 다니다보니 시간은 벌써 23시가 넘었다. 어이구 너무 늦었다 돌아갸야지.

버스정류장에서 찍은 모스크바 시내.

불야성은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착각하지 말자. 우리만 열심히 사는 거 아니다. 우리만큼, 아니 우리보다 열심히 사는 나라와 국민은 어디에든 있다. 늦도록 북적이는 거리와 자정 가까이 영업하는 상점과 그때까지 야근하는 청춘과 그때 넘어서 까지 다니는 대중교통이 있다. 하얀 밤은 러시아가 만들었다.

행복하다. 나오길 정말 잘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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