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이 왜케 흔들렸지?
아침 일찍 일어나 숙소 근처 슈퍼마켓에 들렀다. 러시아에는 이런 대형마트가 별로 없다. 요기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간 마트다. 편의점도 흔치 않다. 아니 흔한데 내가 못찾는 것일수도. 그래서 물, 음료 등을 미리미리 사서 숙소에 쟁여놓아야 한다. 이날 아침엔 캔커피가 무지 땡겼다. 난 캔커피를 좋아한다. 한국에 있을 때도 하루 두 캔씩은 꼭 먹는다. 시원하고 달달한 그 맛이 너무 좋다. 그중에서도 레쓰비는 이름부터 맛까지 거의 완벽에 가깝다. Let's Be 이거 이름 지은 사람 상 줘야해 진짜.
근데 빌어먹을.. 러시아에는 캔커피가 없다. 진짜다. 마트 구석구석 다 뒤져봤지만 없다. 아... 아쉬운대로 크림이나 우유 들어간 달달하고 시원한 커피를 찾을래도 그것도 없다. 아, 스타벅스 꺼 하나 있긴 했는데 양도 적은 주제에 5000원이 넘어서 패스. 그렇다고 탄산음료는 목 따가워서 못 먹는다. 게토레이, 포카리 같은 이온음료로 대체하려 했으나 이마저 안 보인다. 후.. 물이나 마시자.
이 날은 크렘린 궁을 둘러보고 이즈마일로보 시장에서 기념품을 사기로 했다. 가는 길에 붉은광장이 있어서 또 한번 가보기로 했다. 밝은 날의 붉은광장은 어떤지 궁금했고 무엇보다 레닌 묘에 한번 들어가보고 싶었거든.
근데 가는 길에 웬 애들이 모여있나? 뭐하냐 너네
애들한테 물어보니 저기가 모스크바의 한가운데라고 한다. 그래? 그럼 안 밟아볼 수 없지.
후훗, 낮에 보는 붉은광장은 또 다른 느낌이다. 근데 밤의 그것만큼 경이롭진 않았다. 유명 관광지 느낌.
붉은광장 한켠에 레닌 묘가 눈에 띈다. 어젠 밤이라 출입이 금지됐지만 지금은 들어갈 수 있다.
요기 나무 뒤 검고 붉은 대리석 내부에 레닌 시신이 박제되어 있다고 한다. 왠지 으스스했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안 보고 갈 수는 없잖아? 들어가보자! 입장료는 없다. 다만 대기인원이 많아서 한 30분 기다려야 한다.
내부는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어 못 찍었다. 넓이 약 30평, 높이 10미터 되는 정사각형의 어두컴컴한 큐브 생각하면 된다. 각 모서리에서 러시아 군이 감시하고 있으며 관광객들은 절대 정숙해야 한다. 관광객 다니는 통로에서 약 2미터 떨어진 섬에 레닌 미이라가 있다. 물론 유리로 막혀있고 주변은 꽃으로 장식되어 있다. 그래도 얼굴 보는 덴 문제 없다. 딱히 별 감흥은 없었음. 걍 새하얀 마네킹 비슷했다.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 인물이라. 볼셰비키 혁명의 아버지라고들하지만 내가 보기엔 그냥 아집으로 가득한 이상주의자다.
관람을 마치고 뒤쪽으로 나오면 역대 러시아, 소련의 국부 주석 혁명가들 흉상이 늘어서있다. 다들 비슷하게 생겨서 누가 누군지는 모르겠다.
이게 스탈린인가?
낮에 보니 동양인 관광객들이 꽤 많다. 사실 레닌 묘 내부에서 중국인 단체 관광객들이 존나 떠들어서 러시아 군이 살짝 빡칠 뻔했다. 계속 '쉿!' '쉿!' 하는데도 개무시하고 지들끼리 깔깔대더라. 아.. 같은 일행으로 착각할까봐 얼른 나왔다. 질색이다 정말.
그래도 풍경은 좋다. 날씨도 환상이고.
붉은광장을 빠져나와 밥을 먹으러 간다. 러시아 월드컵이 얼마 안 남아서인지 도시 곳곳에 월드컵을 기념하는 조형물이 설치되어있다.
맛있는 고기. 네이버 검색해서 맛집을 찾아냈다. 역시 한국사람들은 안 가본 곳이 없단말이지. 검색하면 여러 블로거들이 여행정보를 적어놨다. 덕분에 큰 도움을 많이 받았다. 나 역시 그들에게 보답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적고 있는지도.
원래는 제이미 올리버 식당을 가보려고 했다. 가끔 유튜브로 그가 요리하는 영상을 볼 때마다 되게 건강한 음식처럼 보였거든.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에는 아직 그의 레스토랑이 없다. 하지만 러시아, 그것도 붉은광장 근처에는 있다! 가보고 싶었는데... 결국 안 갔다. 여기가 러시아 전통 음식을 파는 곳이라서다. 뭐 제이미 올리버도 좋지만 러시아 왔으면 러시아 전통을 체험해야지.
식당은 먹고 싶은 음식을 담아서 한꺼번에 계산하는 식이다. 고기 버섯 감자 수프 음료 케밥 심지어 물까지 전부 가격표가 따로 붙어있다. 어제부터 뽈뽈거리고 돌아다니느라 배가 많이 고팠다. 일단 끌리는 건 죄다 집어 담았더니 양이 너무 많다. 결국 왼쪽 위 케밥은 반도 못 먹고 남겼다. 흑흑. 총합 3만원 정도 나왔다. 그래도 맛있었으니 됐지 뭐.
식당 내부는 이런 식이다. 다른 곳도 찍고 싶었으나 괜히 눈치가 보여서 최대한 사람 없는 쪽을 찍었다. 아, 여기서 처음으로 한국말을 들었다! 내 맞은편 테이블에 한국 가족이 한 팀 있었거든. 엄청 반가웠다. 혼자 여행을 다니다보면 외로울 때가 많다. 감정을 공유할 상대가 없고 난관도 혼자 헤쳐나가야 한다. 이 좋은 걸 혼자만 보나 하는 미안함도 있다. 하지만 그 한국인 가족은 그렇지 않을 거라 생각하니 내심 부러웠다. 그래도 나름 혼자 여행의 재미는 또 다르니까. 제약 안 받고 하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 맘대로 다닐 수 있잖아?
밥 먹고 나와서 다리 난간 기대 경치를 구경한다. 평화롭구만.
물 흐르는 곳 오른쪽, 그러니까 사람 몇 앉아있는 곳 앞이 내가 밥 먹은 식당이다. 위층에는 맥도날드도 있다. 역시 천조국은 세계 어디에서나 보인다.
자, 배도 채웠으니 이제 크렘린 궁으로 가보자.
러시아 월드컵 기념 조형물. 너무 더워서 저기 구석에 숨어 웃옷을 벗고 반팔만 남겼다.
덥다. 너무 덥다. 러시아 날씨가 예상과는 너무 다르다. 난 365일 얼음 꽝꽝 눈발 날리는 동넨 줄 알았는데 여름엔 우리랑 비슷하다. 사람들 다 반팔입고 돌아댕김.
평화롭고 여유롭다. 벤치에 앉아서 책 읽는 사람도 많고 담배 피는 사람도 많다(응?)
정체 모를 장군과 신부. 영화에 나오는 검술과 마법을 쓸 것만 같다.
러시아는 세계 최대의 영토를 가진 나라답게 뭐든 큼직큼직하다. 사람도 크고 건물도 크고 광장도 크고 성도 크다. 저 동상들도 실제로 보면 엄청 거대하다.
어떤 꼬맹이가 날 빤히 쳐다보다가 다가와서는 같이 사진 찍어달란다. 띠용? 뭐 어려운 일이겠냐. 같이 한컷 찍어줬는데 갑자기 저 멀리서 얘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온다. 어렸을 때 생각이 났다. 나도 서양인 보면 신기해서 말 걸고 싶고 다가가고 싶었다. 내가 그렇게 보였나. 여긴 동양인이 엄청 드물다. 더구나 젊은 사람이라니. 이날까지 모스크바에서 내 또래의 동양사람을 한 명도 못 봤다. 내가 신기하게 생겼냐 이것들아. 내 눈에 니들이 그렇단다.
저기 가운데 왼쪽 건물이 크렘린 궁 입장권을 파는 곳이다. 그것도 모르고 한참 뺑글뺑글 돌았다.
입장권은 별로 안 비싸다(500루블, 10000원). 다만 티켓자판기는 한국어 지원이 안된다. 이럴 땐 영어가 모국어가 되어 날 돕는다. 시키는대로 잘만 따라하면 입장권을 뱉어낸다. 옆에서 어떤 서양인 아줌마가 내가 하는 걸 구경하더니 자기 좀 도와달라고 한다. 오잉ㅋ 영어권 사람인데 내가 도와줄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뭘 눌러야 하는지 잘 모르시는 듯했다. 역시 나이 들면 기계가 불편한 건 만국공통인가보다.
왔던 길을 돌아가면
여기가 크렘린 궁 입구다. 생각보다 작지만 여기 말고도 입구가 수십개는 될테니까. 이 전에 커다란 검표소도 있지만 사진 안 찍었다. 검표원이 웃으면서 '어디서 왔니?' 물어봤다. 당당하게 '사우스 코리아!' 했더니 '오스트리아?'라고 되묻는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사우스코리아->ㅅ우스코리아->우스코리아->오스트리아. 흠 잘못 들으면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내 영어 발음이 그렇게 그지 같나.
입구 양 옆에는 근위병이 서있다. 군인도 보이네. 러시아 여기저기서 군인을 볼 수 있다. 지하철에, 거리에, 유적지에, 관광지에 널려있다. 제복도 다 다른 걸 보면 전부 다른 병과인 듯하다. 군사강국답다. 소련 시절의 영향이 남아서 그런가.
드디어 입성. 저 멀리 흰 건물이 대통령 집무실이다. 앞에서 군인이 지키고 있어서 아무나 못 들어간다. 동영상 말미에 종소리가 들린다.
여기서 처음으로 동양 사람들을 많이 봤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소리가 들린다 싶어 다가보니 한국말이다! 한국 가이드가 한국 관광객을 인솔해서 이것저것 설명하는 중이었다! 와 겁나 반갑네. 괜히 말 걸어보고 싶고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 관심 없는척 몰래 따라갔다. 덕분에 가이드 설명도 듣고 한국 아줌마 아저씨들 대화 내용도 엿들었다. 여기까지 와서 설명은 안 듣고 자기들 직장 얘기만 하시더라 ㅋㅋ 장소가 장소인지라 관광객들이 많았다.
수학여행 온 꼬꼬마들도 많이 만나고. 어이고 좋단다ㅋㅋ
저 구멍에 소리를 질러댄다. 귀여운 놈들.
펑
경내가 엄청 넓어서 이런 건물들이 띄엄띄엄 자리잡고 있다. 대개 성직자들의 거처나 예배장소로 쓰인다. 내부도 들어가봤으나 딱히 특별한 건 없었다. 그냥 오래된 교회, 성당이다.
또다른 건물의 한글 안내 팜플릿이다. '성모수태고지사원'이라는 번역투에 한번, 우측 하단의 '조선어'에 또한번 웃었다.
동양 유물도 전시 중이다. 중국이나 몽골쪽으로 추정.
한켠의 정원. 러시아 커플이 싸우고 있었다. 왜 여기까지 와서 싸우니.
헬기장이다. 아마 푸틴 형님이 여기로 왔다갔다 하시겠지.
약 한 시간 반 가량 구경을 마치고 나왔다. 갈 길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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