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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by TheStrok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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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소까지 가는 길은 좋았다. 잘 찾아갔다. 근데 건물 가드가 내부진입을 못하게 한다. 첨엔 말이 안 통해서 착각하는 줄 알았다.
'나 여기 호스텔 예약해서 들어갈 권리가 있어요' 말해도 안된단다. 이게 뭔 개소리야. 호스텔 주인에게 직접 전화해서 가드를 바꿔줬다. 지들끼리 뭐라 떠들더니 가드가 내게 '건물 수리 중이라 진입불가야' 한다. 오잉. 여기서부터 멘탈이 좀 흔들렸다. 자초지종을 듣고보니 해당 건물 전체가 당일에 소방안전관련 재점검 때문에 모든 인원들이 건물내에 머무르면 안된다고 한다. 이게 무슨 지랄 x빠는 소리야. 호스텔 주인은 돈 전부 환불해줄테니 다른 숙소 잡으란다. 현 투숙객도 오후 내로 방 빼기로 했단다. 아니 돈은 둘째치고 이게 그런 문제가 아니냐고 따졌다. '나 돈 많다. 환불은 염병 그딴 소리하면 안되지 않냐' 하니 돌아오는 소리는 '아임 베리 쏘리 리얼리 쏘리, 위 얼쏘 디든 익스펙티드 써치어 시츄에이션' 에라이. 나 여기서 못 자면 진짜 캐리어 끌어안고 길바닥에 나앉아야할 상황이야. 그래도 어쩔 수 없댄다. 진짜 너무 황당해서, 그와중에 배터리도 없어서 새 숙소 예약할 수도 없었다. 너무 열이 받았다.
 생판 외지에 나가서 순식간에 몸 뉘일 곳을 잃은 자, 다른 곳을 예약하기도 어려운 자, 그것도 비는 추적추적 내리는 날씨에 밥도 안 먹은 자. 그게 바로 나다! 걍 거지새끼지. 망할.
 그래도 건물 앞에서 담배 세 대 연짱으로 피면서 스스로를 타일렀다. '여기서 마냥 절망하지 말자. 힘들 때 웃자 그게 일류다. 열심히 대가리를 굴려보자. 뭔가 답이 분명 있을 것이다. 계속, 엄청 생각하면 해결될 거야'라고 나 자신한테 침착하게 지속적으로 되뇌었다. 일단 호스텔 주인에게 따졌다. '니들 잘못이니까 이 근처 다른 숙소 비슷한 가격짜리 니가 예약해줘라'. 그제서야 호스텔 주인도 좀 상황파악이 되는지 오키 너 잠깐 기다려라 내가 내려갈게' 한다. 그로부터 3분 뒤, 미쳤냐고. 왐마 시발 왜 이렇게 예뻐. 무슨 저 멀리서 여신이 강림하는 줄 알았다. 화가 눈 녹듯 사라질 정도다. 저 여신이 진정 나와 통화하고 내가 화를 냈던 그 사람인가. 순간 솟구쳤던 분노는 어느새 은하계 저편으로 날아갔다. 그녀가 '쏘리, 쏘리' 하자 나는 그저 '아임 파인' 할 뿐.
 일단 올라가서 차 한잔하면서 얘기했다. 자기가 근처 숙소 예약했고 거기까지 가는 택시비도 지불하겠다고 한다. 와. 적어도 얘들은 자기 잘못이 뭔지 알고 인정할 줄 안다(내 생각 전환이 빛보다 빠를 줄이야). 아마 우리 같았으면 규정상 그건 불가능하댔을거다. 그렇게 잠깐 그 호스텔 머물면서 휴대폰도 충전하고 물도 마셨다. 이윽고 택시가 도착하자 주인이 비용을 지불하고 드디어 새 숙소로 떠난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었으니. 기대하시라.

 택시기사가 매우 살벌하게 생겼다. 운전 중 휴대폰 사용은 패시브 스킬이다. 노래 크게 들으면서 춤도 춘다. 떡대도 겁나 좋다. 가긴 또 왜이리 오래 가. 호스텔 주인이 분명 10분이면 충분하댔는데 한 30분 탔다. 어디 모르는 곳에 팔려가는 건 아닌가 개쫄았다. 주변 풍경따위 눈에 안 들어온다. 그래도 다행히 목적지에 정확히 떨궈준다. 근데 어디로 들어가야돼?

 러시아 특징 두번째. 건물에 간판이 없다. 있어도 알아보지도 못할 정도로 조그맣다. 내가 당황해서 막 헤매자 택시기사는 숙소에 대신 전화를 해준다. 내가 러시아말을 못 알아들어서 대충 그들의 대화 내용을 예상만 해보겠다.

 '야 니네 위치 어디야. 내 승객 그 앞에 와있는데 입구를 못 찾잖아. 내려와'
 'ㅇㅋ'

 약 15분 동안 택시기사와 숙소 주인이 (싸움 같은) 대화를 하면서 건물 주변을 뱅글뱅글 돈다. 좀 있으니 주인이 내려와서 날 인계해갔다. 택시기사한테 정말 고마웠다. 지 일도 아닌데 발벗고 나서서 날 도와줬으니까. 이 사람 없었으면 나 길바닥에서 잤겠구나. 너무 고마워서 팁으로 100루블(우리나라 돈으로 얼추 2천원. 러시아에서 이정도면 꽤나 크다)을 건넸다. 근데 기사는 그딴 거 필요 없다며 개쿨하게 지 갈길 간다. 돈 주는 내 손이 민망할 정도로 거부하고 그냥 갔다.... 마! 필요 없다고!

그렇게 드디어 모스코 숙소 입성! 간신히 한 시름 놓나 했으나... 독자 여러분 세상일 쉽지 않대. 그렇게 힘들게 도착한 숙소가 알고 보니까 모스크바 레지스트레이션(일종의 거주지등록증)이 필요한 곳이었다. 처음엔 '대체 뭔 소린가'. 영어 한마디도 못하고 러시아말로 계속 떠드니- 아 적다보니 또 빡치네. 아무튼 분위기를 보니 내가 여기 머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속터진다. 진짜 이때 눈물날뻔했다. 다리에 힘이 다 풀렸다. 그들도 내 표정을 보고는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 됐나보다. 짠했는지 '너 괴롭히지 않을테니까 여기서 좀 추스리고 있어' 하며 시원한 물과 먹을거리를 내어줬다. 정말 사람들은 좋다. 이제와 생각해봐도 진짜 친절하고 정이 넘친다. 제도와 규율이 따라주지 않아서 문제지.

 난 딱 30분만 휴대폰 충전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물론이지. 너 편할대로 있어.' 충전기 꼽아놓고 새로운 숙소를 또 구했다. 정말 이 호스텔의 누나와 아줌마는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다시 오면 꼭 은혜를 갚아야지. 그놈의 규정만 아니었으면 걍 날 여기서 쉬게 해주고 싶었다는 느낌이 강했다. 새로운 숙소를 찾은 후 다시 터덜터덜 길바닥으로 나섰다. 이때가 대략 18시. 그나마 해가 늦게 지는 나라라 천만다행이다. 바깥이 환했으니 망정이지 캄캄했으면 어우 생각하기도 싫다.

 러시아의 구글맵 '얀덱스'를 검색해보니 숙소까지의 거리는 가깝다. 택시를 잡았다. 이쯤되니 택시비 걱정은 꺼지고, 지붕과 이불이 최우선이었다. 기사 양반이 출발 전에 미리 요금을 알려줬다. '몇 키로미터 갈 때마다 얼마인데 너 정말 갈래?' 몇 번을 확인한다. 심지어 '지금 길막히는 시간이라 걸어가는 게 훨씬 빠를걸?'이라며 가는 길을 알려준다. 이런 대화를 하는 동안 차가 100미터는 족히 갔다. 거기서 내려달라고 부탁했다. '요금도 안 내고 태워줘서 고맙고 미안하다' 하자 기사양반은 '아니다. 끝까지 못 도와줘서 내가 미안하지...' 한다. 이 한 마디에 다시 힘을 내어걸었다. 감사합니다 아재요. (아, 참고로 이 러시아 여행 게시글들에 나온 대화는 전부 손짓발짓, 구글번역기를 통했다.) 택시 바가지 요금, 스킨헤드, 인종차별은 무슨.. 이렇게들 정직하고 친절한데. 역시 일어나지도 않을 일 미리 걱정한 셈이다.

 다시 묻고 찾고 걸어 드디어 숙소 근처에 도착했다. 와- 근데 또 구글맵의 부정확탓에 주변에서 30분을 뱅글뱅글 돌았다... 고난과 역경의 서사시다 진짜. 참다참다 길가는 또래 여자한테 주소를 보여주고 위치를 물어보니 걔는 다시 주변 상인한테 물어봐가며 열심히 도와준다.

엘프: 야 일로와봐
원숭이: 응
엘프: 아저씨 얘 여기 찾는데 어딘지 알아요?
(크로캅 닮은) 아재: 여기? 어. 알지. 저기네

하고 손가락으로 짚어준다. 바로 코앞이다. '스파시바 스파시바(감사합니다)' 떠들어봤자 역시나 여신은 핵쿨하게 지 갈 길 가고 알려준 아저씨는 내가 일본인인줄 알았는지 '스미마셍'이러고 있다. 환장할 나라다 여긴.

위는 도착해서 짐 풀고 씻은 후 찍은 사진, 아래는 떠날 때 찍은 사진.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숙소. 와 여기가 바로 7성급 호텔보다 위대한 내 모스크바 숙소다! 관광하기도 전에 진이 다 빠지네. 입구에서 '여기가 호스텔 러스입니까' 묻자 '예스~웰컴!' 하면서 저쪽에서 카야 스코델라리오 닮은 여주인이 마중나온다. 미쳤냐 진짜. 헐리웃 배우들이 왜그리 열심히 연기하는줄 이제 알겠다. 서양에는 지들 말고도 예쁘고 잘생긴 사람 널렸거든.

 어느덧 뉘엿뉘엿 해는 지고, 시계는 여덟시를 가리킨다. 짐 풀고 30분 멍하니 누워있자니 그간 잊혔던 허기가 밀려온다. 아니 그전에 좀 씻자. 냄새나겠다야. 샤워를 약 한 시간 한듯하다. 씻고 나오니 캄캄하다. 배고파 뒤지겠네. 다행히 숙소 바로 옆(걸어서 10초)에 식당이 있다. 아래 사진 멀리 보이는 하얀 문이 숙소 입구고 그 오른쪽 천막 옆이 식당이다.

허기가 져서 일단 메뉴판에 맛있어뵈는 음식은 다 시켰다. 영어 메뉴판이 없어서 오직 사진에만 의존함. 급하게 먹다가 체하면 안되니까 수프 비슷하게 생긴 거 하나 먼저 주문하고

하지만 술은 급하게 먹어야 제맛! 보드카국에 왔으니 보드카부터 한잔. 크아아앙.

다음에 시킨 정체 모를 스테이크. 저건 대체 어느 부위일까나.. 솔직히 맛은 별로였지만 배고파서 먹었다. 근데 워낙 위가 작은지라 반도 못 먹음. 다 합쳐서 한 2~3만원 나왔나. 종업원들이 지나다니다가 날 보고 활짝 웃는다. 신기하냐 임마. 나도 너네가 신기하다.

 밥 먹고 나와서 담배를 하나 물었다. 이 담배라는 게 백해무익은 아니다. 생각을 정리하게 해주고 문득문득 새로운 다짐을 새겨주고 용기를 북돋는 역할을 한다. 이때도 그랬다. 밥도 먹었고 피곤하고 밤은 늦었고 딱 잠만 자면 되는데... 담배피는 4분 동안 니코틴이 각성을 부여했는지 '이대로 잘 수는 없다!' 퍼뜩 떠오른다. '야 이대로 자기엔 너무 억울하잖아'라는 담배의 목소리가 들렸다(하다하다 이젠 환청까지). 그래, 너무 피곤해도 난 여기 놀러왔다. 여기 보러 왔고 돈 쓰러 왔고 내 세상과 다른 세상을 즐기러 왔다. '피곤하다고, 힘들다고 쉴 거면 한국에서 쉬지 왜 여기까지와서 쉬려고 하냐. 정 죽겠으면 레드불 쳐먹어라!' 미친놈처럼 외치고 가방 챙겨 버스정류장으로 내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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