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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by TheStrok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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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이르쿠츠크
비행기 예매, 수하물, 여행, 걱정, 질문 등등 모든 면에서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소중한 두 친구가 인천까지 배웅해줬다.

 전 글에도 썼다시피 공항가는 열차 안에서 이 풍경을 다시 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혹시 비행기 연착되면 어쩌지, 수하물 못 실으면 어쩌지, 예매 잘못했으면 어쩌지, 숙소 못 찾으면 어쩌지. 아 써놓고 보니까 개병신이 따로 없다. 정말 쫄보 중 상 쫄보다. 아니나 다를까 출발 전부터 문제가 터졌다. 인천공항에서 항공사 체크인을 하던 중이었다. 항공사 직원이 '비행기표 예매 이름이랑 여권 이름을 다르게 기입하셨네요?'라고 한다. 다시보니 여권에는 Jun, 비행기표엔 Joon이라고 적혀있다. 여권 갱신하면서 알파벳 바꿨던 걸 까먹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고야. 토익 점수 아무 짝에 쓸모 없다. 이걸 이런 데서 느낄 줄이야. 항공사 직원은 러시아에선 크게 상관 안 하니 입국심사 무사히 통과할 거라고 한다. 근데 그건 한국인 생각이고 러시아에서는 다를 수 있잖아. 이것 때문에 비행기 타서까지 조마조마했지만 그래도 일단 떴다!

읽지도 못하는 러시아 신문을 기념삼아 받아뒀다ㅋ 처음 얻은 러시아제 물건이다.

승객 몇 백 명 중 한국인은 많아야 나 포함 세네명 뿐이다. 다들 떡대 좋고 키 큰 '불곰국' 성님들이다. 와 살벌하게들 생겼네 진짜. 좌석 양 옆 역시 그 성님들이시다. 허리춤에서 당장 권총 나와도 이상할 게 하나 없는 외양이다. 대체 어떻게 된 게 이 나라는 죄다 효도르야. 효도르 1, 효도르 2, 효도르 3.... 표정도 겁나 심각하다. 웃질 않는다!!! 그래서 나도 괜히 안 쫀 척 하려고 눈에 힘 빡, 거만한 자세로 앉았다. 돌이켜보면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다... 왜냐. 너무 친절했으니까. 반전이다. 승무원이 죄다 러시아 사람이라 음료랑 기내식 주문하는 데 애를 먹고 있었다. 손짓 발짓으로 주문했지만  승무원은 못 알아듣는 눈치다. 그걸 왼쪽 성님이 가만 보더니 직접 음료통을 하나씩 들어서 보여줬다. 통에 그림 그려져있으니까 그거 보고 시키라고. 덕분에 사과쥬스와 물을 원 없이 먹었고 스바씨바를 연발했다.

알고보니 그 형은 한국에서 잠깐 일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한국말도 아아주 조금 할 줄 알고 영어도 진짜 조금 했다. 그렇게 네 시간의 비행동안 서로 한국어 영어 구글 번역기 손짓발짓 섞어가며 대화를 했다. 오른쪽 성님은 그게 재밌어보였는지 같이 또 떠들었다. 창밖을 보고 싶어하는 날 위해 슬쩍 뒤로 물러나주기도 하고 내 쓰레기도 자기가 정리해서 승무원에게 건네주더라. 간단한 러시아어 회화도 가르쳐줬다.

안녕하세요, 도와주세요, 감사합니다, 물

대충 기억나는 건 이게 다다. 내가 어설프게 따라하는 걸 들었는지 앞자리 아줌마가 슬쩍 뒤돌아보며 미소짓는다.
아 러시아 사람 특징 하나 더 발견했다. 엄청 여유롭다. 승무원이 음료 나눠주느라 통로를 꽉 막고 있을 때 일이다. 우리나라 승객 같았으면 빈틈 사이로 지나가거나 잠깐 비켜달라고 하겠지만 러시아 승객은 안 그런다. 승무원이 다른 승객 하나하나한테 음료를 따라주면서 끝에 다다를 때까지 가만히 서서 기다린다. 승무원이 백도어로 사라지고 사람 다닐 공간이 확보되고 나서야 비로소 다시 통로가 된다. 30~40분 걸리는 시간을 그저 가만히 서서 기다린다. 와. 빨리빨리 문화에 익숙했던 난 그 여유와 매너에 정말 충격받았다.
 그렇게 옆자리 형들과 웃고 떠들고 충격 받다보니 어느새 비행기는 이르쿠츠크에 도착했다. 영화나 소설 속에서만 보던 그 자작나무 숲, 바이칼 호, 아기자기한 집과 독특한 외형의 건물들이 눈 앞에 펼쳐졌다. 순간 너무 황홀해서 눈물이 찔끔 날 뻔했다. 여기에 감동을 배가 시킨 왼쪽 성님의 한마디
 '웰컴 투 로씨야'
와... 이 말이 왜 그리 감명깊었는지 모르겠다. 저 말을 뱉으며 한 손으로 악수를 청한다. 캬. 비행기가 착륙하자 승객들이 일제히 박수를 치면서 환호한다. 뭐야 웬 박수래 뜬금 없었지만 나도 같이 짝짝짝. 이게 바로 유쾌한 불곰국인가보다. 멋지다.

입국심사
식겁했다 정말. 세 명 중 한명꼴로 빠꾸를 먹는다. 분명 러시아 말을 하는 사람들인데 왜 통과가 안되지?(나중에 알고보니 중앙아시아 사람이었다. 그들도 러시아와 같은 키릴어를 쓴다고 한다) 그걸 보고 있자니 혹시 나도 통과 안되면 어쩌나 매우 걱정됐다. 일본 입국심사는 이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러시아 개빡센가보다. 심사대 앞에 서니 무서운 인상의 아저씨가 엄격한 표정으로 쏘아본다. 잔뜩 쫄았다. 가뜩이나 여권 항공권 이름 다르게 써서 불안한 판에 저 상황이 눈 앞에 펼쳐지니까 심장이 쿵쾅대지 않을리 가 있나. 뭐 그리 확인할 게 많은지 한 5분 동안 여권을 뒤적거리다가 땅땅 도장을 찍어주셨다. 휴.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쉬며 스빠시바 내뱉었다.

공항 내 러시아 통신사 대리점(MTC)에서 심카드를 구매했다. 사실 대리점이라기보다는 아주 작은 매점이다. 음료 과자 담배 등을 판매하는 진짜 매점. 겉보기엔 과연 여기서 유심을 팔까 의문일 정도다. 그래도 용기내어 다가가면 러시아에 얼마나 머무는지, 데이터는 얼마나 사용할지 등을 물어보면서 거기 맞는 심카드를 준다. 국내 통신사 해외 로밍이나 에그, 도시락은 너무 비싸서 이 방법을 택했다. 한국 유심을 빼고 러시아 유심을 끼우면 한국 폰이 아닌 러시아 폰으로 바뀐다. 인류문명과 다시 연결되는 순간이다. 

잠시 기다리면 위 사진과 같은 문자 메시지가 날아든다. 물론 뭔소린지 모른다. 난 러시아 친구가 있는 친구에게 캡쳐해 보내서 무슨 소린지 알아봐달라고 했다. 내 러시아 전화번호 외에는 그닥 쓸 데 없는 형식적인 내용이다.

숙소 찾기
어우야 춥다. 여긴 아직 겨울 기운이 남아있다. 바람막이 가져오길 천만다행이다. 공항을 나서자 이미 어둠이 짙다. 참고로 지금 여긴 백야 때문에 밤 열시나 돼야 해가 진다. 내가 얼마나 늦게 도착했는지 가늠해보길. 밤거리를 캐리어 끌고 혼자 돌아다니니 절로 쫄려서 사방을 경계했다. 다행인 건 숙소가 엄청 가까웠다는 것. 걸어서 5분 거리다. 처음엔 구글 맵만 보고 따라가다가 안드로메다로 갈 뻔 했다. 아무리 돌아도 못 찾겠어서 두리번 거리는데 차에서 어떤 여자가 알아듣지도 못하는 러시아어로 뭐라뭐라 막 떠든다.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키는 것 같았다. 맙소사. 내가 숙소 찾는 걸 알고 위치를 가르쳐주는 거였다! 스빠시바!!! 그 방향으로 가니 딱 숙소가 나온다. 여러분, 러시아 사람들 엄청 친절합니다. 살벌한 외양만 보고 오해하지 마요. 표정이 무표정일 뿐 누구보다 이방인을 돕고 싶어해요.

숙소
다행히 호스텔 주인은 영어를 할 줄 안다. 근데 완벽한 영어가 아니라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내가 몇 호인지 못 알아듣자 직접 데려다줬다.

긴장이 좀 풀려서인지 목이 말라왔다. 음료가 60루블이길래 천루블짜리를 건넸지만 '네 돈 액수가 너무 커서 안된다'는 말이 돌아왔다. 러시아는 거스름돈을 잘 거슬러주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는 500원짜리 물건 사고 5만원권을 내도 49500원을 거슬러주지만 러시아는 거스름돈 없으면 얄짤 없이 안 판다. 내가 '나 천루블짜리 밖에 없는데?'하면 주인은 '난 거스름돈 없는데?'라는 식이다. 당시 난 1000루블 짜리 한 장, 50루블 짜리 한 장을 갖고 있어서 매우 난감했다. 당황한 걸 알았는지 주인이 걍 50루블만 달랜다. '온리 포 유'라면서ㅋㅋ 땡큐. 스바시바! '유아 베리 핸섬!' 날리니 '유투!'가 돌아온다.
 

그와중에 주방에서 한국어 발견 ㅋㅋ '손을 씻고 요리하라는 얘긴가?' 싶었는데 영어를 보니 사용 후 설거지 하라는 뜻이었다. 허허.

계단 안내 표지에도 이런 번역투의 한국어가 몇 있었다. 그 중 영 말이 안되는 표기는 누군가가 찍 긋고 다시 적어뒀다. 한국사람들이 많이 머무나보다. 그들의 친절에 감사를.

숙소가 생각보다 좋다. 어차피 낼 아침 바로 모스크바로 떠야해서 크게 중요하진 않지만. 방엔 이미 러시아인 아버지 아들이 한 팀 있었다. 한 열댓살 먹은 앤데 왐마 무슨 인형이 움직이냐. 파란 눈동자에 왕방울만한 눈을 가졌다. 가만 보고 있으면 빨려들어갈 것 같다. 근데 걔도 내가 신기했나보다. 날 빤히 쳐다보길래 웃으면서 말 거니까 부끄러워하면서 뭐라뭐라 떠든다. 좀 친해져서 구글번역기로 이런 저런 얘길 주고 받았다.

'너 언제 잘거니?'
'몰라'
'그럼 나 좀 씻고 30분 뒤에 불 꺼도 돼?'
'끄덕끄덕'

별 중요한 건 아니지만 일단 생각나는 일은 다 적어두느라ㅋ 씻고 담배 좀 피고 부모님, 친구와 통화를 하니 금새 잠이 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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