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느 시대든 그 시대의 중심이 되는 개념 혹은 관념이 존재한다. 원시시대엔 자연이, 중세엔 종교가 세상의 중심이었고 현대는 과학이 이 시대의 중심이다. 그리고 각 시대 사람들은 그 중심사상을 창조했거나 사상의 핵심이 되는 인물에게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예수가 탄생할 때는 하늘에 동방의 별이 나타났고 부처가 탄생할 때는 하늘에서 오색구름과 무지개가 피어나며 용이 그의 몸을 닦아주었다는 둥). 그렇지 않고 그들 또한 그저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다고 하면 그 사상에 대한 믿음에는 쉽게 금이 가고 그 사상은 오랜 시간 지속되지 못한다. 예를 들어 종교가 세상의 중심이었던 중세의 대중들은 그 창시자인 예수를 매우 특별한 사람으로 여겨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비범한 능력을 지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관념은 후대에 이어져 수백 년이 흐른 현재까지도 기독교가 위세를 떨치며 존립하는 기반이 되고 있다. 마찬가지로 탄생 시 오색의 구름이 밤실 땅을 뒤덮고 그의 탄생지인 사라수에서는 유달리 큰 밤톨이 열렸다고 하는 원효 또한 이 주제의 연장선상에 있다. 원효는 당시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불교 문명권 안에 있으면서 불교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통해 새로운 사회를 열어나가고자 했던 당대인들의 염원이 담긴 ‘시대적 아이콘’에 불과하다. 뉴턴의 만유 인력의 법칙은 ‘모든 물체는 서로 당기는 힘이 있다’는 어찌보면 굉장히 단순한 이론일 뿐이다. 하지만 이는 ‘천상과 지상 할 것 없이 만유인력의 법칙은 적용된다’는 논리로 발전하면서 당시 영국의 신분제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겼다. 그리고 뉴턴은 순식간에 그 시대의 아이콘으로 등극한다. 마찬가지로 춘의(春意)가 동하여 길거리에서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주겠는가? 내가 하늘 떠받칠 기둥을 깎아볼까’라고 외치며 낡은 시대사상을 뒤집겠다는 뜻을 담은 원효의 외침또한 당시 신분제 사회에 커다란 충격파였을 것이다. 이에 원효는 ‘시대적 아이콘’에 더할 나위 없이 적합했던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여러 이야기가 첨삭되며 현대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왜? 원효란 승려를 추켜세우기 위해.
2. 원효의 삶
원효는 비구 수행자임에도 불구하고 술집을 들락거리며 가무와 잡담으로 서민들 사이에 끼어들어 불법을 설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를 보고 원효가 대중과 불교의 교화를 도모하려 했으며 민중들과는 동떨어진 채 귀족, 왕실만의 종교로 여겨지고 있었던 불교를 속세로 끌어왔다고들 한다. 그리고 민중들 또한 구제해야 할 중생들이라고 여겨 그들 속으로 뛰어들었고 이에 스스로에게 ‘소성거사(小性居士)’란 허울 ‘좋은’ 타이틀을 씌워준다. 그러면서 부처는 중생들이 있기에 존재하는 것이고 여기에 오히려 진실한 인간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는 것이라는 그럴듯한 수식을 한다. 하지만 좀 더 솔직해져보자. 정말 저게 맞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이들의 논리대로라면 지난 8월 불교계를 넘어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조계종 승려 도박사건’의 당사자들 역시 세속 물질의 흐름을 이해하고 대중들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세속으로 뛰어든 것뿐이다. 물질의 흐름을 알고 대중문화를 이해해야만 중생들과 좀 더 가까워질 수 있고 그래야 그들의 깨달음에 한 발짝 더 다가갈 수 있는 것 아닌가. 결국 원효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논리대로라면 도박 사건의 당사자들 역시 원효와 같은 대중친화적인 승려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그리고 출가자라면 멀리해야 할 색욕(色慾) 또한 원효는 가볍게 여겼다. 요석공주와의 ‘스캔들’을 통해 보자면 길바닥에서 도끼자루 어쩌고 지껄이는 것은 말이 좋아 일화지 요즘 같았으면 모독죄에 따른 구속감이다. 요석궁에서의 며칠을 두고 원효가 파계했다고 할 수 있느냐고? 그가 애욕만으로 요석을 만났다면 그 즉시 그는 요석궁에 들어앉아 살았어야 할 것 아니겠느냐고? 대답은 간단하다. 아무도 기생집에 들어앉아 살지 않는다.
3. 원효의 사상
①불교에서의 행복과 윤회사상
학생 A는 50대의 직장인에게 살면서 가장 후회되는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직장인은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일이 아닌 세상에 맞춰서 택한 이 직장에 들어온 것을 가장 후회한다고 대답했다. A는 다시 묻는다. ‘지금이라도 하면 되지 않나요?’ 직장인이 대답한다. ‘에이 지금은 너무 늦었죠.’
A: 그러면 몇 살쯤으로 돌아간다면 그 일을 시작하시겠어요?
직: 한 서른 살 정도만 돼도 충분하죠.
A는 30대 초반의 회사원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진다.
‘삶에서 가장 후회되는 게 뭔가요?’
‘제가 하고 싶었던걸 안한 거요’
‘지금이라도 하면 되잖아요?’
‘에이 너무 늦었죠’
‘그럼 몇 살 때로 돌아가면 될 거 같아요?’
‘20대 초반으로만 보내주면 뭐든 할 겁니다’
대학 새내기에게 찾아가 같은 질문을 던진 A는 역시 같은 대답을 듣는다. 그렇게 계속해서 같은 질문을 반복한 A는 결국 중학생에게까지 이른다. 하지만 결국 중학생도 같은 소리를 늘어놓는다.
인간은 과거에 집착한다. 그러면서 불투명하고 막막한 미래가 다가오는 걸 억지로 밀어내고 회피하며 살아간다. 결국 남은 건 현재 뿐인데 이런 과거와 미래 사이의 현재는 행복할리 없다. 누군가가 그토록 바라던 ‘그때’는 바로 내가 살고 있는 지금이다. 흔히들 직장인은 대학시절을 회상하며 ‘그때가 좋았지’라고 하며 대학생은 중고등학교의 학창시절을 회상하며 ‘그때가 좋았지’라고들 한다. 영원한 것은 없다는 불교의 오랜 진리의 핵심은 바로 끊임없이 솟구치는 내 안의 번뇌를 끊고 집착을 버리는 것이다. 지금 바로 이곳 이 시간에서 행복을 찾는 것이 불교가 추구하는 가치라고 법정스님께서 말씀하셨다. 하지만 이 생에서 덕을 쌓아 다음 생에는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길 바라는 윤회사상은 위의 내용과 모순되는것으로 보여진다. 이번 생에서 덕을 쌓아 다음 생에 극락으로 간다면 과연 이번 생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 있을까? 극락에서의 삶을 가정해보자. 더 이상 고통도 없고 오직 행복만이 가득한 그 세상은 과연 삶의 의미가 있을까? 분명 ‘아 전생에 좀 더 이러이러한 일을 많이 했으면 이 극락에 좀 더 빨리 도착했을 텐데…….’하는 후회가 들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반대로 ‘그래봤자 어차피 난 지금 극락에 와있는데 과거가 무슨 필요가 있어’라는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전자보다는 후자가 우리 안에 내재해있는 윤리적 관념에 부합하지만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결국 극락에 가도 만족 못할게 분명하는 것이 내 생각이다. 하다못해 부처 또한 중생들을 구제하겠다는 집착을 평생 지니고 살았다. 현재에 가장 만족해야한다고 하는 불교가 현재가 아닌 내세를 위한 덕을 쌓으라고 강조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윤회 좋지. 인간의 가장 근본적 두려움인 죽음을 그렇게라도 회피하는 게 마음 편할 거다. 하지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순 없다. 윤회는 없다. 전생도, 내생도 없다. 오로지 현생만이 인간의 처음이자 마지막 생이다.
②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
발심수행장은 원효가 출가 수행자를 위하여 지은 발심에 관한 글이다. 수행인이 부처 될 마음으로 거룩한 행을 닦는데 필수적인 방법을 담고 있는데 그 주된 내용은 애욕을 끊고 고행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출가 수행자가 무조건적인 금욕을 지켜야할 것인가? 더군다나 위에서 서술했듯 원효 자신부터 금욕을 지키지 않았는데 말이다. 불교가 아닌 다른 종교에서 그 예시를 찾아보자.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칼뱅주의를 통해 자본주의와 종교간의 연결고리를 찾았다. 칼뱅의 예정설에 따르면 인간 각자의 운명은 신에 의해 이미 정해져 있어서 인간의 노력으로 바꿀 수 없다. 칼뱅주의자들은 이에 대한 탈출구를 현실에서 찾고자 했다. 즉 내가 신에게 선택받았다는 사실을 현세적 성공을 통해 증명해보이는 것이었다. ‘힘써 일하고 벌어들인 돈을 낭비하지 않고 금욕적이고 청빈한 생활에 힘쓸것’이라는 기독교의 윤리는 ‘축적된 자본의 투자를 통한 자본의 재축적에 힘쓸것’이라는 자본주의 정신과 서로 맞물리게 된다. 비슷하게 불교에서도 정말 자신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면 현생에서의 성공적인 삶을 통해 많은 중생들에게 인정을 받고 나아가서는 벌어들인 부를 가난한 이를 위해 재분배한다면 그보다 더 큰 복을 짓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것이 바로 그들이 그토록 갈망하는 해탈의 경지에 훨씬 빠르고 바르게 다가갈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또 원효는 이 발심수행장에서 인간이 고통스러운 이유는 욕망 때문이니 이를 치열한 수행을 통해 이겨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이겨내야할 대상인 ‘욕망’이 바로 세상을 여기까지 이끌어 온 원동력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에게는 매 순간순간이 욕망이다. 서있는 사람은 앉고 싶고 앉아있는 사람은 눕고싶은 것이 인간이다.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세가지도 바로 수면, 배설, 음식에 관한 욕구이다. 인생 자체가 욕망인 것이다. 이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 되면 인간은 더 큰 욕구를 원한다. 하물며 최초의 인류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조차 좀 더 편한 삶을 추구하여 도구를 만들었다. 하늘을 날고 싶다는 욕구는 비행기를 만들었고 이것이 현재에 이르러서는 우주에 다다랐다. 만약 이 시대에 원효가 살아있었다면 하늘을 날고 우주를 탐사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냐는 질문을 던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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