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라미까
아라미까란 승단에서 잡역부로 절의 일을 돕는 재가자들을 가르키는 말로 절의 처사나 보살들을 말한다. 원민園民이라고도 번역되는 이들은 출가자가 아닌 일반사회에서 생활하는 재가인이나 사원 내의 잡역을 생업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승단 구성원의 일부에 포함되어 있다. 아라미까는 출가자들이 본래의 목적인 불도수행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절의 청소, 물품을 손보는 것, 물을 채우는 것 등의 잡역을 대신 수행하였다. 어찌보면 절의 노예가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이들은 노예가 아니었다. 그들은 재가신도들이 사찰에 시주한 옷 등의 공양물을 받기도 했고 재가신도들의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살아갔다. 그들은 절 주변에 그들의 마을을 독립적으로 형성하여 살았으며 사찰 소유의 논과 밭을 경작하여 일부는 자신들이 갖고 일부는 사찰에 시주하는 형태로 삶을 영위했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출가자들은 걸식생활의 원칙을 바꾸지 않고도 실질적인 자급생활이 가능하게 되었다. 불교 승단의 자활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다하고 있었던 것이 바로 이 아라미까의 존재였다.
2. 깝삐야꾸띠
일반적으로 출가자들은 걸식하는 생활을 하는데 탁발하여 받은 음식은 전부 그날 안에 먹어야하며 후일을 위해 따로 보관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깝삐야 꾸띠에 만큼은 음식을 보관할 수 있었다. 깝삐야 꾸띠야에서 깝삐야는 비구를 대신해서 다양한 일(재공양해주거나, 만질 수 없는 돈을 대신 지불해 주는 일)을 도와주는 사는 사람, 꾸띠는 부엌을 대신하는 음식물 저장소를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이다.
사찰에 부엌이 있다는 것은 재가자에게 의존할 필요가 없어진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는 사회와의 단절을 뜻한다. 재가자들의 요구에 둔감하게 되는 계기가 되고 시대정신을 따라갈 수가 없게 되기에 초기불교에서 대승불교의 유발을 야기했다. 그래서 부엌을 없애고 깝삐야꾸띠라는 부엌을 대신하는 음식물 저장소를 만든 것이다. 생활의 근본이 되는 음식물 공급을 속세사람들의 호의에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규정이야말로 불교 승단과 속세와의 관계를 결정짓는 무엇보다 중요한 점이다. 즉 출가집단은 속세의 호의가 끊어진 시점에서는 존재할 수없는 집단인 것이고 이를 좀 더 융통성 있는 상황으로 바꾸게 도와준 것이 바로 깝삐야꾸띠이다.
3. 스님이 될 수 없는 사람들. 차법
출가자는 구족계를 받을 때 비구는 12가지, 비구니는 24가지의 비밀문답을 한다. 이 가운데 하나라도 해당되는 것이 있으면 지원자는 수계를 거부당하는데 이들을 차법이라 한다. 이중에는 출가 지원자 개인적인 자질에 관한 것도 있어 불교승단이 실제로 여러 장애를 세워 특정인을 배제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지원자의 자질에 관한 사항을 열거했을 때 비구 혹은 비구니가 될 수 없는 이들은 다음과 같다. 전향자(외도에서 불교로 전향하였다가 다시 외도로 돌아간 이), 외도, 중병인, 관리, 범죄자, 부채자, 노예, 20세가 되지 않은자, 부모의 허락을 얻지 못한자, 황문(거세자 및 동성애자), 적주자(가짜비구), 축생, 노역죄를 범한자, 비구니를 더럽힌 자, 양성구유자(남녀 양성을 모두 가지고 있는 자), 신체장애자 및 병자. 이들은 왜 출가자가 될 수 없었을까? 대부분의 차법은 일반사회와의 알력을 피하기 위해 제정되었고 좀 더 건강한 교단을 만들기 위해 정해진 것이었다. 이는 걸식으로 재가에 의존해 사는 불교승단이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그러나 차법은 결코 영원 불변의 법칙이 아니고 현대 사회에서는 오히려 차법이 사회의 비난을 부르는 오점이 되기에 현대에 맞는 법규가 요구되고 있다.
4. 재가신도 존재의의
석가모니 설화에서도 밝혀진 것처럼 불교의 출가자는 모든 생활을 재가자의 보시에 의지해야 한다. 출가자들은 원칙적으로 매일 아침 탁발을 하여 사람들로부터 남은 음식을 받아 그것으로 생활 양식을 삼는다. 이는 생활의 근본이 되는 음식물 공급을 속세사람들의 호의에 저적으로 의지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규정으로, 불교 승단과 속세와의 관계를 결정짓는 무엇보다 중요한 점이다. 속세의 호의가 끊어진 시점에서는 어쩔 수 없이 소멸할 수 밖에 없는 사회이다. 교단과 사회는 뗄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교단은 사회로부터 의, 식, 주등 생활에 필수적인 도움을 받았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법을 설하여 대중들을 구제하고 교화시켰다. 또한 복발갈마, 학가갈마, 하의갈마 등의 상호간 지켜야 할 규정을 명시하며 그 선을 넘지 않도록 했다. 복발갈마란 재가자 측이 출가자에 대해 잘못을 저질렀을 때, 비구를 함정에 빠뜨리거나 승단을 근거 없이 비방하였을 때 그 재가자의 집에 탁발하러 가지 않고 방문하지 않는다는 규정이다. 학가갈마는 재가자가 신심이 너무 깊어 지나치게 보시하여 가계가 기울어질 정도가 되면 승단이 그 집안의 보시를 거절하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교단은 재가자들과 친밀하고 가깝게 지내면서도 일정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5. 계界란 무엇인가?
계sima란 승단의 공간영역을 말하며 불교 승단 운영상 불가결의 개념이다. 이것이 없으면 율 대부분의 규정이 무의미해질 정도로 중요하다. 율 규정에 의하면 승단이라고 하는 것은 4인 이상의 비구(비구니)에 의해 구성된 집단으로 정의되어 있다. 즉 불교는 출가수행자가 4인 이상의 집단으로 생활하는 것을 기본으로 성립하는 종교이다. 율 가운데에서도 특히 건도는 여러 가지 행사, 의식의 집행방법을 상세히 정하고 있는데 그 기준은 구성원의 전원 참가에 있다. 우선 포살이나 자자와 같은 행사는 승단의 전체 구성원이 출석한 후에야 비로소 성립된다. 또 중요한 안건을 결정할 때에도 회의의 전원출석이 의무로 되어있다. 이러한 회의를 갈마라고 부른다. 갈마는 원칙적으로 승단 비구 혹은 비구니의 전원 출석에 의해 집행되며, 의결은 전원일치로 승인된다. 갈마에는 백일갈마白一羯磨, 백이갈마, 백사갈마의 세 종류가 있는데 각각 안건의 중요성에 따라 의결 방식이나 결정이 달라진다. 이와 같이 율이라고 하는 것은 승단 구성원 전원이 정기적으로 한 장소에 모일 것을 요구한다.
계의 경계선은 누구라도 알 수 있는 표시를 기점으로 하여 결정된다. 어느 곳의 큰 바위부터 어느 강의 분기점까지를 한쪽으로 하고, 그 분기점에서부터 어느 마을의 삼난무 한 그루까지를 한쪽으로 한다는 등 이러한 식으로 표시를 연결해 선에 둘러싸인 부분을 하나의 계로 정한다. 또 승단 독자의 소유지가 있어 그곳에 사원이 세워져 있을 경우에는 그 부지의 경계를 그대로 계의 경계로 할 때도 있다. 일반적으로 계의 설정은 매우 자유롭지만 닫ㄴ 한가지 엄격한 제약이 있다. 바로 중복의 금지이다. 하나의 영역이 동시에 두 개의 승단에 속하게 되면 승단 운영상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절대로 계가 중복되는 일이 없도록 설정해야 한다. 더욱이 두 계를 하나의 경계선으로 인정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경계가 접해있을 때 한 사람이 양쪽에 걸쳐있으면 양쪽 계에 동시에 속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 계 사이에는 적어도 사람이 양다리를 걸치지 않을 정도의 공백지대가 마련되어야만 한다. 이 제약에 위반되면 설정된 계는 무효화 되며 계로서 인정받지 못한다.
불교에서 출가란 한 사람이 특정 불교교단의 구성원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사람이라도 출가하면 그 출가 생활은 특정 승단의 일원으로 승인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승단의 의미를 바르게 알아둘 필요가 있으며 승단의 성립 조건인 계의 개념을 이해해둬야한다.
6. 위하라
위하라는 머무르며 수행하는 공간이다. 승려들은 위하라에 머물며 경전을 배우거나 수행하며 살아간다. 비구가 생활하던 건물에는 크게 다섯 종류 중 하나인 위하라는 일반적으로 ‘출가자의 주거’라고 하는 의미로 쓰인다. 또한 율의 건축규정에 의하면 매우 큰 건축물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한데 이 위하라가 세워져 있는 장소는 번화가나 마을에서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걸식하러 가기에 적당한 거리에 위치한다. 일반인의 출입이 빈번하거나 수행에 방해가 될 정도로 마을에 지나치게 가깝지만 않으면 된다. 구조는 벽을 바르고 지붕은 벽돌이나 돌, 풀 등으로 잇는다. 마루나 벽은 백, 흑, 적토색으로 나누어 바르고 보기 좋게 완성한다. 특이한 점은 벽면에 무늬를 그려 넣어 장식해도 좋다고 하는 것이다. 이는 불교 예술과 관련이 있다. 그림은 남녀의 자태를 제외 한 꽃, 풀 등의 단순한 유형의 무늬에 한정되어있었지만 환락과 오감의 즐거움을 금했던 불교가 조금은 미적인 사항을 용인했음을 엿볼 수 있다. 위하라는 안뜰을 둘러싼 형태로 만들어져 있어 신도의 공양물을 받을 때 사용하는 장소나 음료수, 불씨 등을 보관하는 시설이 따로 있었다. 불교 승단이 집단생활을 전제로 운영된다고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자고 일어나는 것 까지 공동생활의 의무로 되어있는 것은 아니었다. 특정 행사에 빠지지 않고 참가하기만 하면 괜찮았으며 평소에는 혼자 생활해도 아무 상관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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