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 원자력의 초기 역사
한국에 원자력이 도입된 우선적 계기가 된 것은 에너지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이다. 정부는 원자력의 군사적 응용 가능성, 즉 당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던 남북 관계에서 군사적 열세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반면 과학자들은 원자력을 통해 한국 과학기술의 기반을 닦는데 우선적인 목표를 두었고 원자력을 통한 과학기술 진흥에 관심을 두었다.
1950년대 말 한국 정부의 원자력 계획에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원자로 기종 및 원자력 연구소 부지 선택 문제였다. 먼저 원자로 기종 선택 관련 문제. ‘연구용 원자로는 전력수요가 급박한 한국의 상황에 맞지 않고 기술자 양성 정도에나 그칠것이니 발전용 원자로를 도입해야한다’는 주장과 ‘우선 연구용 원자로를 받아들여서 원자력 연구 및 과학기술 발전의 기초를 닦고 점차적으로 발전용 원자로를 도입’하자는 두가지 주장이 맞섰다. 둘째 입지 관련 문제. 이승만 대통령은 군사기지 근처(군의 호위를 받을 수 있는)를 부흥부는 공업 관련 기반시설이 잘 갖춰져있는 충주비료공장 부근을, 문교부의 과학자 출신 관료들은 기존의 과학 연구와 원자력 연구가 연계될 수 있는 서울에서 가까운 곳을 부지로 주장했다. 부지가 결정되는 데에는 미국의 영향도 작용. 미국의 원자력 과학자인 ‘조지 윗플’이 방문하여 서울대 공대 근처에 원자력 공학 실험실이 생겨야한다는 견해를 보였는데, 실제로 나중에 이곳에 원자력 연구소가 지어졌다. 이 때 미국이 우려했던 것은 한국의 원자력 계획이 원조국인 미국의 통제를 넘어서는 것.
과학자들의 원자력 사업과 내분.
1959년 설립된 원자력원, 원자력연구소에는 설립 초기부터 내분이 일어났다. 4.19, 5.16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격동의 시기에 원자력기구의 기관장인 원자력원장이 정권에 따라 교체되고. 핵심은 과학자인 연구관들과 행정공무원들 사이에 있었다. 과학자들은 행정조직의 타성에 젖은 운영이 연구를 위한 여건을 마련해주지 못한다고 불만. 상황이 극단화 되면서 연구원들은 국무총리실을 찾아가서 사직서를 내기도 하고 진정서를 배포하기도. 과학자들이 볼 때 원자력 기구의 행정적 간섭은 자신들의 유학시절 해외의 연구소에서 보았던 연구를 한국에서 시작하겠다는 의욕을 가로막는 무모,무지,무능한 장애물 이었다. 반면 행정업무를 담당하던 사람들의 입장: 과학자들은 지나친 엘리트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들의 연구 관심에만 몰두해 있어서 행정적으로 무리한 요구를 하는 등 유연하지 못하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실용적 문제를 전념하려고 하지 않고 그들이 하고자 했던 ’기초적 문제‘의 연구에만 관심이 있었다’는것. 한국의 근대화를 위해 복무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과학기술을 통해서’였다.
1950년대 들어 원자력에 대한 회의론이 생겨나고 확산되었는데 이는 도입된 원자력이 당장의 유용한 결과를 가져다주지 못한 상황. ‘한국에 도입된 원자로가 즉각 이용 가능한 것이 아닌 교육, 연구를 위한 것이기에 즉각적인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은 원자력과 관련되지 않은 사람들을 설득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국회에서의 회의론 확산은 원자력 기구에서 볼 땐 매우 심각한 문제. 예산 삭감으로 이어져 사업 전반이 위축될 수 있기 때문. 실제로 매년 조금씩 삭감되고 있었다. 원자력 사업의 무생산성을 질책하는 상황 하에서 원자력 연구소의 과학자들은 ‘당장 결과를 낼 수 없는 원자력 과학에서 무언가 실용적인 것을 요구하는’ 외부적 압력을 불편해 했고 기초 연구에 대한 정부의 투자가 해마다 줄어가는 상황을 아쉬워했다. 문교부 주도로 진행된 원자력 사업에서 과학자들에게는 그리 긴급한 일이 아니었을지 모르겠으나 경제관련 부처와 한국 전력등의 기관에서는 불만으로 여겨질 수 있는 문제.
원자력 자립화 추구와 좌절
1966년 설리된 KIST는 원자력연구소로부터 ‘한국을 대표하는 연구소’의 지위를 빼앗았다. 원연구소와 KIST의 과학자 대우 차이가 매우 컸고 그 결과 원자력 연구소의 많은 과학자들이 KIST로 이직하기도 했다. KIST가 자체적인 수익사업의 기반을 가지고 출발한 것은 원자력연구소의 무생산성에 대한 반작용으로도 볼 수 있다. 대통령 직속기관->과학기술처 산하의 원자력청으로 격하. 또 하나, 원자력 발전의 주체가 한국전력으로 결정(1969). 이 결정이 내려지기 전까지 과학기술처(원자력청)와 상공부(한국전력)의 첨예한 논쟁. 과기처는 그 특수성 때문에 원자력 사업을 기업에 맡길 수 없다, 상공부는 원자력도 전력이므로 여태까지의 전력사업의 노하우를 반영할 수 있도록 한전에 원자력발전의 주체가 돼야한다고 주장.
이는 원자력을 바라보는 기본 이념의 차이. 원자력청의 계획에서 ‘자주성’이 ‘국민의 이익,복지’보다 우선적인 과제로 설정되어있는 것이 한전과의 차이.
한국정부가 추진하고 있던 핵연료 재처리 사업 및 핵무기 개발 사업은 70년대 중후반 미국의 압력으로 좌절. 당시 한국정부는 캐나다, 프랑스와 교류하면서 핵연료의 자립화를 추진하고 있었는데 인도가 1974년 캐나다로부터 도입한 기술로 핵실험에 성공-> 미국이 캐나다 등의 국가가 제3국으로 핵연료 재처리 시설에 도움이 되는 기술을 수출하지 못하도록 영향력 행사.
2. 한국 원자력의 담론
앞에서 살펴본 한국 원자력의 초기 역사를 바탕으로 세가지 담론적 특징을 끌어내보자. 1. 기술 낙관주의, 2. 기술민족주의의 강한 존재, 3. 안전담론의 결여
1 기술 낙관주의
미국의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를 남의 일인양 보고 언론매체, TV, 박람회, 전시회 등으로 원자력 관련 대중 계몽 운동을 실천했다. 이 시기의 원자력은 새로운 과학기술 그 자체였고 새 시대를 열어 줄 ‘제3의 불’이었다.
한국사회를 도약시킬 에너지로서의 원자력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커서 방사능의 위험은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2 기술 민족주의
현대 과학기술은 특정 가치와 결합하면서 존재의 이유를 얻고 스스로의 존재를 강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기술은 민족주의적 정서와 결합함으로써 자기 방어적인 모습을 보일 경우가 많은데 이를 ‘기술민족주의’라고 흔히 지칭한다. 흔히 ‘한국 원자력의 아버지’라 일컫는 고 ‘이휘소’가 교통사고로 사망했을 당시 미국의 암살이라는 음모론이 제기된 것은 사회 전반의 민족주의적 원자력 담론과 관련이 있다. 이휘소를 원자력의 아버지로 모심으로써 한국이 인도와 같은 핵자립국이 되기를 희망했던 것이다.
3 안전 담론의 결여
1970년대까지 한국에서 원자력의 위험성에 대한 자각 및 사회적 고려는 전반적으로 희박했다. 국제적으로 원자력의 위험성에 대한 사건이 많았지만 한국에서는 상대적으로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소련의 핵 실험에 ‘죽음의 재’가 생겼고 이것이 비가 내리면서 일본에서까지 방사능이 검출된 사건에 대해서도 그리 강력한 문제제기를 받지 못했다. 국회에서도 국회의원들의 질문의 초점은 한국에는 방사능을 검출할 장비가 없는것이냐 는 것이었으며 고의로 위험한 상황을 알리지 않았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거의 의심하지 않았다. 국회의원들은 원자력과 관련된 사항은 과학자들이 전담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 또한 원자력기구 측은 위험성에 대해 인정하고 공개적으로 알리기보다는 어떻게든 그것을 감춤으로써 불신을 막으려 했을뿐.
3. 원자력은 궁극적으로 무엇에 기여해야하는가?
한국은 뒤늦게 근대화에 뛰어든 국가로서 원자력을 통해 국가의 부족한 에너지 상황을 극복하려 했으며 강대국으로부터의 국가적 자립을 추구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고려되지 않은 점은 국민의 안전, 복지의 측면이었다.
과학기술은 인간과같은 자유의지를 가지지 않는다. 과학기술은 정치, 경제, 사회와 불가분한 관계를 맺기 때문에 이에 깊은 영향을 받고 방향을 선회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국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작 된 원자력이 원자력 자체의 존재를 강화시키기 위한 방향으로 발전한다면 이는 때로는 일반 대중의 이익과는 거리가 있는 방향일 수 있다.
한국 원자력은 궁극적으로 누구를 위해 존재하고 무엇에 기여해야하는가? 그것은 현 세대 혹은 미래의 후손들을 위한 방향으로 발전해야 할것이다. 원자력 사업은 항상 이를 염두해 두고 나아가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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