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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Strok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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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키야

 

상키야는 이원론적 실재론이다. 쁘라끄리띠(물질)parakriti와 뿌루샤(정신, 자아)purusa라는 두 궁극적 실재의 이론 때문에 이원적이다. 그리고 상키야는 물질과 정신이 동등하게 실재한다고 믿으므로 실재론이다.

우리는 세계를 다양한 대상들로 구성된 것으로서 경험한다. 상키야는 이들 대상의 원인이 무엇이며 그들이 어떻게 생겼는가 하고 묻는다. 그리고 쁘라끄리띠가 우리의 신체, 감각, 마음을 포함한 모든 대상들의 궁극적 원인이라고 답한다. 쁘라끄리띠는 비아非我이며 의식이 없다. 그러므로 뿌루샤, 즉 자아의 여러 가지 경험대상으로서만 자체를 드러낼 수 있다. 상키야에 따르면 쁘라끄리띠는 세가지 구나 guna인 ,sattva, rajas, tamas로 구성되어있다. 사뜨바는 순수성, 미세함, 가벼움, 밝음을 본질로 하는 구성요소이고 라쟈스는 활동과 운동의 원리를 대표한다. 따마스는 물질적 대상에 있어서 무거움이나 또는 운동, 활동에 대한 반대와 저항으로 자체를 드러내는 요소이다.

상키야 학파는 물리적 세계인 쁘라끄리띠와 自我인 뿌루샤라는 두가지 궁극적 실재를 인정하는 이원적 체계이다. 물리적 세계는 앞에서 살펴본바와 같고 뿌루샤는 내면의 자아로서 순수의식이다. 상키야는 뿌루샤를 쁘라끄리띠로, 혹은 쁘라끄리띠를 뿌루샤로 환원시키려는 어 제안도 우리의 경험에 어긋나는 것으로서 거부한다. 경험이란 언제나 경험자와 피경험자, 의식과 의식의 대상이라는 양극으로 이루어져있기 때문이다. 라서 뿌루샤와 쁘라끄리띠의 구분은 절대적이고 불변적이다. 쁘라끄리띠와 마찬가지로 뿌루샤도 지각되지 않는다.

뿌루샤의 궁극적 목적은 쁘라끄리띠와의 연루에서 야기되는 인간의 불완전과 한계로부터의 해방이다. 자아가 무지 때문에 쁘라끄리띠와의 얽힘이 실재라는 착각에 희생물이 되었으며 구원이란 그런 얽힘에 수반되는 불완전은 비실재이고 쁘라끄리띠와의 그릇된 동일화로부터 일어나는 것임을 깨닫는 것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아의 해방은 그것이 쁘라끄리띠로부터 영원히, 절대적으로 독립된 것이라는 인식으로 성취된다.

 

상키야에서의 속박, 해탈

상키야에 따르면 자아란 영원하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수동적이며 인식도 갖지 않는다. 자아는 순수의식이다. 그러나 무지 때문에 자아는 쁘라끄리띠의 소산인 마나스, 아함라, 마하뜨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그러한 그릇된 동일화를 통해 자아는 착각의 희생물로 전락하며, 고통과 아픔의 주경험주체라고 느끼게 된다. 이런 식으로 자아는 세계의 대상들에 대한 집착을 증대시킨다. 그러한 집착이 속박과 비자유를 형성한다. 그리고 자아가 자신의 참된 모습을 모르는 한 비자아에 대한 집착과 그에 따르는 상태는 다르마의 법칙에 따라 지속될 것이다. 그리하여 자아는 생사의 윤회에 얽혀든다. 상키야 학파도 무지를 속박과 근원으로 본다. 따라서 해탈이란 자아가 무지와 착각의 사슬을 부숨으로써 쁘라끄리띠로부터 전혀 독립적이며 영원, 불사, 자유로운 뿌루샤로서의 참된 존재를 실현하는 것이다. 즉 해탈이란 자아가 에고도 마음도 知나 그 밖에 어떤 쁘라끄리띠의 소산도 아니라는 인식이다.

뿌루샤는 참된 존재로서의 자앙란 기쁨과 슬픔, 따라서 완전과 불완전을 영원히 넘어선ㄱ 이다. 그러므로 상키야에 있어서 구원이란 도덕적 지적 완전의 성취가 아니라 자아가 비자아로부터 전적으로 영구히 독립된 것이라는 인식으로 이루어진다.

자아란 쁘라끄리띠로부터 영구히 독립되고 자유로운 것이므로 구원이 육신의 사후에 달성되거나 추구되는 그 무엇이 아니다. 다시 말해 해탈이란 시공적으로 인과적으로 결정되는 사건이 아니다. 해탈은 우리가 아직 살아있는 동안 바로 지금, 여기에서 달성되는 것이라고 상키야는 말한다. 우리가 육신을 갖지 않을 때 어떤 것을 실현한다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자아의 쁘라끄리띠로부터 절대적이고 영원한 독립을 실현한 사람을 해탈한자라고 부른다. 그는 쁘라끄리띠에 묶는 르마의 사슬을 부수고 생사의 순환으로부터 벗어난 자 이다. 그렇다면 고통과 속박의 근원인 무지의 장막을 뚫고 영원히 자유로운 뿌루샤로서의 자신의 참된 성품을 실현시키는 방법, 수행 혹은 기술이 있는가? 상키야는 그런 수행법이 있다고 가르친다. 그것이 바로 ‘요가’이다.

 

상키야와 요가의 접점

철학체계로서의 요가는 전통적으로 상키야 학파와 밀접히 연합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 이유는 두가지이다. 상키야는 그것이 가르치는 실재에 대한 여러 가지 진리를 실현하는 실천적 수단으로서 요가를 적극적으로 인정한다. 또한 요가학파는 상키야를 해탈 kaivalya의 성취를 위한 실천과 수행법으로서의 요가에 대한 이론적 기초와 해석을 제공하는 것으로 본다. 다시 말해서 요가학파는 상키야의 형이삭학과 인식론을 요가수행에 대한 가장 적합하고 합당한 이론적 얼개로 수용한다. 이와같은 이유로 두 학파는 상호보완적인 학파로 간주된다. 그러나 이 둘 사이에는 몇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다. 비록 상키야와 요가 모두가 하나가 아니라 많은 뿌루샤가 있다고 주장하나, 상키야와 달리 요가 학파는 신 isvata, 혹은 지고의 뿌루샤가 있다고 가르친다. 어떤 자아도 설사 그것이 완전한 해탈 상태에 있다 해도 최고의 뿌루샤와 동등할 수는 없다.

 

요가의 속박, 해탈

요가의 궁극적 목적은 빠르끄리띠의 속박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인식을 획득하는 것이다. 참다운 모습의 자아가 불사이며 쁘라끄리띠로부터 절대적으로 독립된 것이라는 인식이다. 그러한 인식은 자아를 쁘라끄리띠에 결박시키는 무지와 착각을 단번에 파괴하고 뿌루샤로서의 자아의 참된 존재를 드러낸다. 인간이 자신의 감각과 욕망을 굴복시키고 완전한 평정과 고요함을 얻지 않는 한 해탈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찌따(마음) citta 라는 내적 기관(붓디buddhi, 아함까라, 마나스의 복합체)에 대한 완전한 통제와 지배가 요가 수행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요가는 그 자신의 의식 속 더욱 깊이 침잠함으로써 대상이 아닌 순수 주관의 상태를 깨닫는다. 그는 또한 쁘라끄리띠와 얽혀 있다는 일상적 느낌이 착각과 무지의 소산임을 깨닫는다. 그리하여 대상을 전혀 갖지 않는 삼매에서 수행자 자신이 곧 대상이 된다. 이것이 모든 요가의 궁극적 목표인 최고 의식의 달성이며 초월적 주관성의 실현이고 불사의 뿌루샤로서의 자성을 발견한 자아이다. 쁘라끄리띠와 전혀 구별되는 영원한 뿌루샤(초월적 주관)으로서의 참 존재를 인식한 자는 속박과 무지로부터의 절대적 자유의 상태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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