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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Strok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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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암베드카르, 그는 누구인가?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Bhimrao Ramji Ambedkar, 1891년 4월 14일 ~ 1956년 12월 6일)는 인도의 불가촉천민(달리트)들의 권익을 위해서 불가촉천민 식수권 운동, 불가촉천민 분리선거 운동, 집단 불교 개종운동을 이끈 인도의 정치인이다. 그는 사회적으로 가장 낮은 계층에 해당하는 마하르 출신이었다. 마하르란 거리 청소나 소각 등을 담당하던 소위 ‘불가촉 천민’에 속하는 집단을 말한다. 힌두 사회에서 불가촉 천민은 다만 탄생함으로써 존재로 인정될 뿐이었고, 사회적으로는 상층의 힌두계급과는 접촉할 수 없을 만큼 열등한 신분을 지닌 집단이었다. 실제로 상층계급은 불가촉 천민의 그림자조차 닿기를 꺼려하는 것이 인도의 현실이다. 하지만 암베드카르는 정통적인 불교의 교리에 따라서 사회적인 신분차별은 부당하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신불교 운동을 주도했던 암베드카르의 궁극적 목적은 불가촉천민이 인간으로서의 기본권을 향유하는 데 있었다. 수드라의 신분이나 여성으로서는 신에게 가까이 갈 수 없다고 규정하는 힌두교의 불평등을 비판하고, 불교의 평등주의를 고양시킨 암베드카르의 주장은 전국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는 현대사회에서 수용할 만한 종교는 오직 불교뿐이며 만약 현대사회가 불교를 수용하지 않는다면 멸망을 면치 못할 것이라 했다. 또한 다른 어떠한 종교도 붓다의 가르침 이상으로 지적이고 과학적인 현대인의 마음에 파고들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며 불교에 대한 믿음을 강조했다. 인도의 불교도들은 암베드카르가 보살과 같다고 여긴다. 인도불교도의 개종에 큰 역할을 했던 그의 공적을 인정한 결과이다. 현재 마하라슈트라 주를 중심으로 암베드카르의 뜻을 잇고 있으며 불교로의 개종은 확산되어 가는 추세이다.

 

②. 현대 인도불교의 중흥

불교의 발상지 인도에서는 근년에 들어서 불교신자가 급속히 증가하는 추세에 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암베드카르의 신불교 운동은 불교 자체의 부흥이라기보다는 불교를 통해 천민들의 사회적 지위를 개혁하고자 했던 사회운동이었다는 평가를 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최근 인도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는 불교 개종식을 비롯한 불교집회는 인도뿐만 아니라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현재 인도에서는 ‘인도불교청년회’, ‘불교도발전협회’ 등 여러 불교단체를 중심으로 다양한 집회와 의식, 축제 등을 거행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석가족의 후손들이 매년 음력 9월 보름에 개최하는 축제의 경우는 20년이 넘도록 이어지고 있는 행사로서 고타마 붓다의 가르침을 널리 고양시키는 계기가 되고 있다. 또한 이러한 추세에 힘입어서 인도에 불교사원을 세우기 위한 각종 모금 행사가 펼쳐지고 있으며, 해외 불교도의 도움을 간절히 요청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인도의 불교부흥에는 또 다른 요인이 덧붙여진다. 바로 티베트인들의 유입이다.

티베트지역을 중국이 점령한 뒤 거세지는 박해를 피하고자 티베트인들은 국경을 넘기 시작했으며, 1959년에는 약 10만 명의 티베트인들이 인도로 피난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로도 이어지고 있는 티베트불교도들의 인도 이주는 사실상 인도불교의 재확산에 큰 역할을 하였으며, 암베드카르의 신불교 운동보다도 훨씬 더 강한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 실제 현실이라고 본다. 고향에서 추방당한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티베트불교의 스승들은 인도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에 불교사상을 전파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인도는 티베트불교의 직접적인 수혜자로서 새로운 인도불교사를 쓰고 있다.

흔히 인도에서 지속적이고 살아 있는 불교로서의 전통은 끊겼다고는 말해 왔지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이제 불교의 산실에서 재생하는 기미가 확연하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③. 현대 인도 불교의 문제점과 과제.

윗글을 본다면 현대 인도불교는 제 2의 전성기를 맞는 듯 보인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우리는 인도불교가 갖고 있는 문제점들을 살펴봄으로써 인도불교의 현황을 제대로 볼 필요가 있다.

인도불교가 당면한 여러 가지 문제점들은 크게 불교계 내부의 문제와 외부, 특히 힌두교 진영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문제들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1950년대 중반 이후 인도의 불교는 사회운동, 특히 카스트 철폐운동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이는 다시 정치와의 연결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데, 달리뜨(불가촉천민)들이 자신들의 권리와 이익을 보호하고 진정한 평등을 성취하기 위하여 활발하게 정치에 참여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하라슈트라(인도의 주(州))의 공화당은 암베드카르의 뜻에 의해 창립된 정당으로 원래 종교 정당으로 계획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추종자들이 모두 불교도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불교 정당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공화당은 특히 주 의회와 기초 자치단체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며 불사(佛事)를 위한 정부 보조금을 책정하기도 하고 지역 내에서의 불교도들의 권익 보호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이 사회적, 정치적 권익을 보호하기 위하여 활발하게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비난할 일은 결코 아니지만 종교가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당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를 낳게 한다. 사실 인도에서는 대부분의 종교가 정당과 연관되어 있으며, 종교색을 띠지 않은 정당들도 특정 종교집단의 표를 얻기 위하여 사원 건립 등과 같은 종교적인 공약을 남발하고 유권자들의 종교적인 정서에 호소하여 타종교에 대한 적대감을 부추기곤 한다. 또, 종교단체의 이름을 걸고 주최되는 각종 종교집회가 구호가 난무하는 정치가들의 선전마당이 되어 버리거나 반대로 정치집회가 종교적 선동으로 광신도들의 회합이 되어버리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서 일부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사욕을 채우기 위해 불교도들을 이용할 가능성은 충분하다.

또, 사회운동과 정치적 측면이 강조된 인도불교의 모습은 순수한 신앙심에 의존해야 할 종교로서의 모습이 부족해 보이기도 한다. 대다수의 인도 불자들은 순수하게 부처의 가르침에 받아 귀의했다기보다는, 개종이 주는 부수적인 효과에 대한 기대와 그들의 지도자인 암베드카르 개인에 대한 충성심으로 귀의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신앙심이 상대적으로 약할 수도 있다. 실제로 많은 인도 불자들은 불교 자체에 대한 이해가 그다지 깊지 못하며, 그나마도 암베드카르의 불교 해석에만 철저하게 의존하고 있다. 대다수의 인도 불자들이 따르고 있는 암베드카르의 교리 해석은 지나치게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것으로 평가받아 왔다. 이에 대한 문제는 학문적인 측면에서 자세히 고찰되어야 할 필요가 있으나 간략하게 언급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번째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인도불교의 가장 큰 특징인 사회개혁적인 메시지를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 발생한 문제이다. 암베드카르는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 사회악과 맞서 투쟁할 것을 강조하며, 이는 결국 불교의 근본 정신이라 할 수 있는 ‘자비’의 정신에 대치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물론 암베드카르의 저서에 자비에 대한 강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피상적인 설명에 그치고 만다. 불교의 교리와 암베드카르의 해석에서 이 세상을 ‘고(苦)’로 본 인식은 동일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기존 불교에서는 고통의 원인을 자기 안에 있는 집착에서 찾고, 수행을 통해 그 근본을 제거하라고 가르치는 데 반해 암베드카르식의 불교 해석에서는 고의 원인이 자기 외부의 사회, 특히 힌두교 사회제도 안에 존재하며 투쟁을 통해 그 근원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두번째 문제는 지나치게 이성주의에 입각한 불교 해석으로 불교철학의 핵심 개념들을 자의적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암베드카르는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며 물질의 순환을 제외한 모든 윤회를 부정한다. 비물질적 존재의 윤회를 완전히 부정함에 따라서 연기설도 달리 설명된다. 그가 말하는 연기설에서 업은 오로지 현세에 있어서만 인과율에 의해 적용된다. 윤회를 부정하는 사고체계에서는 전세도 내세도 없으니 당연한 결과다. 힌두교에 대한 반감으로 힌두교의 중심 교의들을 부정하다 보니 지나친 이성주의로 빠져, 사용하는 용어는 같지만 불교에서는 달리 설명하고 있는 철학적인 개념들마저 부정하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다음으로 현재 인도불교가 외부와 관련하여 안고 있는 문제를 알아보겠다. 이는 대부분 힌두교와 관련된 것이다. 같은 뿌리에서 나와 철학적, 역사적, 문화적 전통을 상당 부분 공유하고 있는 두 종교의 관계는 참으로 복잡 미묘하다. 먼저 불교는 현대 힌두교와 맥을 같이하는 브라만교에 대한 개혁 형태로 태어난 종교로서 역사의 한 시기에 두 종교는 치열한 경쟁관계에 있기도 하였으며, 유구한 역사를 함께 존재하면서 서로 많은 영향을 주고 받은 것도 사실이다. 이후 불교는 힌두교의 세력 신장에 눌려 점점 쇠퇴해 갔고, 결국 인도에서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대부분 불가촉천민 출신으로 힌두교도들에 대하여 기본적으로 피해의식을 갖고 있는 불교도들에게 힌두교에 대한 부정적인 의식을 가중시켜 주고 있다. 또한 두 종교는 오랜 기간의 상호 영향으로 기본적으로 사용하는 용어도 유사하고, 피상적으로 볼 때 두 종교의 교리는 비슷해 보이는 부분도 있다. 특히 불교의 초기 발전 단계에서 불교에게 주도권을 빼앗긴 적이 있는 힌두교(당시의 브라만교)는 경쟁 종교인 불교에 대한 나름대로의 대응 교리를 개발하였다.

그것은 붓다가 힌두교의 주신(主神) 중의 하나인 ‘비슈누 신’의 아홉 번째 화신이라는 근거로 불교가 힌두교의 일파라고 하는 주장이다. 4세기 이전에 성립한 ‘뿌라나’ 문헌에는 원래 “잘못된 교리를 베풀어 악마들을 속이고 이들로 하여금 베다 예식을 하지 못하게 하여 그 결과로 힌두교의 신들에게 패배하도록 만들기 위하여” 비슈누가 샤카족 중에 환생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것이 비슈누의 화신 사상과 연결되어 붓다는 비슈누의 화신으로서 힌두 신에 포함되어 힌두교의 신격 중 하나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힌두교의 교리상 불교는 힌두교의 한 분파로 격하되고 말게 된다.

불교 신도들이 보기엔 어불성설인 이러한 주장은 오늘날에도 힌두교도들 사이에서는 광범위하게 통용되고 있는 교리이며, 힌두 원리주의자들이 불교를 폄하하고 불교도들의 독립적 정체성을 훼손하기 위하여 이용하는 논리이기도 하다. 이미 불교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마하라슈트라와 같은 지역에서는 이러한 힌두교의 억지 주장이 파고들 여지는 거의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같은 논리가 아직 불교교리에 어두운 인도의 초심자들에게 주입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이러한 힌두교측의 주장을 근대 이후 인도의 여러 개혁 종파들의 운명과 연관지어 생각해 볼 때 우려를 금할 수 없다. 중세 이래 인도에서는 많은 종교운동들이 사회개혁의 일환으로 일어났다. 말을 바꾸어 사회 개혁운동들의 많은 경우 종교색을 띠고 종교운동의 형태로 일어났다고 할 수도 있다. 많은 개혁 종파들이 성립 초기에는 거의 독립된 형태를 띠고 힌두교와는 전혀 별개의 종교로 발전해 가는 듯 했으나, 시간이 지나갈수록 힌두교에 융화되어 본래의 개혁적인 성격을 제대로 살려나가지 못하고 힌두교의 한 일파로 흡수되어 가는 모습을 보인다. 힌두교 측의 “인도에서 발생한 모든 종교는 넓은 의미에서 모두 힌두이즘”이라는 주장에 의해 희생되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 불교인들 입장에서는 수긍할 수 없지만, 힌두교 측에서 주장하는 교리로 본다면 결국 인도불교의 운명도 같은 것이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들의 논리에서 불교란 힌두교의 한 개혁종파에 불과하니까 말이다. 설사 불교가 인도 내에서 그 정체성을 지켜 나간다 하더라도 새로 개종한 북인도 불자들에 대한 실질적인 교리 교육이 거의 불가능한 현재와 같은 상태에서 그들이 과연 진정한 불자로 여겨질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1950년대 중반에 암베드카르를 따라 개종했던 사람들의 경우는 이에 대한 증거를 제공한다. 암베드카르의 사상을 전파할 만한 지도자도 어느 정도 있었고, 외국의 불교 단체나 포교사들도 조금이나마 활동을 벌였던 마하라슈트라의 경우와는 달리, 이들은 불교에 대한 이해보다는 단순히 ‘구원자’ 암베드카르 박사에 대한 존경심에 의지하여 개종을 단행했던 데다가 지도자의 부재로 개종 이후에도 체계적인 교리 교육을 받을 기회도 없었고, 외국의 불교에 접할 기회도 가질 수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과거 힌두교 전통과 제대로 절연하지도 못했고, 불교를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했다. 결국 엄밀히 말한다면 이들은 힌두교도와 불교도의 중간쯤 되는 애매한 위치에 남게 되었다. 불교의 명절뿐 아니라 힌두교 축제도 함께 즐기고, 불교로 개종했으면서도 힌두교의 종교적 관습도 지키는 이름뿐인 불교신자가 되어 버린 것이다. 어떤 경로를 통해서건 제대로 된 불교교리의 재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새로 탄생한 수만의 인도 불자들이 어떠한 처지에 처하게 될지를 보여주는 극명한 실례라 할 수 있다.

 

3. 결론- 한국 불교의 역할

우리 한국의 불자들에게는 멀게만 느껴지는 낯선 땅의 이야기지만, 한국의 불교계가 인도불교를 도울 길도 없지는 않을 것 같다. 불자들을 교육시키고 지속적인 포교활동을 벌여 나가는 데 필요한 인적, 재정적 자원의 마련과 같은 너무나 기본적인 문제들은 물론이거니와, 인도불교라는 특수한 상황에 맞추어 포교활동을 하기 위한 교리체계와 철학적 기반의 마련 같은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앞서도 설명한 것처럼 힌두 원리주의 진영은 불교의 확산에 대응하기 위한 그들 나름의 교리체계를 개발하여 인도불교의 정체성을 흐리고 있으며, 힌두교와 불교교리상의 일견 유사해 보이는 철학적 해석들도 깊이 있는 지식을 갖추지 못한 인도의 불자들에게 불교와 힌두교의 구별을 모호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인도의 특수성을 감안할 때 인도불교에는 힌두교의 교리와 명백히 구분하여 불교를 설명해줄 수 있는 교리체계가 필요하며, 이는 미묘한 철학적 논의를 포함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과제는 인도의 사상적 전통에 익숙한 인도 학자들의 몫이어야 하겠지만, 인도 불교학자들의 상황으로 보아 당장은 양적, 질적으로 만족스러운 연구성과를 내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그렇다면 이것이 우리 불교계의 힘으로라도 어느 정도 이루어져서 이들에게 확고한 교리적 기반을 마련해 주어야 할 것이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현대의 인도불교, 보다 정확히는 암베드카르에 의해 마련된 불교교리와 불경 해석에 대한 폭넓은 연구와 이해가 있어야 한다. 이들의 교리가 우리나라를 비롯한 ‘인도의 특수한 현실’을 이해하기 힘든 다른 나라의 불자들에게는 지나치게 과격하고 극단적인 것으로 비춰지는 것이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다른 이들의 현실을 폭넓은 이해와 아량으로 받아들여 준다면 이해하지 못할 일도 아닌 듯싶다.

지금까지 근대 이후 인도불교의 지난날과 현재 상황을 살펴보면서 그 한계와 문제점을 함께 알아봤고 가능한 대로 현실적인 모습을 그려보려 노력하였다. 최근의 인도불교의 활발한 부흥의 조짐은 매우 반갑고 주목할 만한 일임에는 틀림없으나, ‘몇만명의 불교 개종’이라는 현상 뒤에 숨어 있는 본질을 발견하려는 노력이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만으로 상황을 판단하고 막연한 기대나 환상을 가지는 것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고 그만큼 위험할 수도 있다. 사건의 본질을 알고 난 다음에야 문제의식도 생길 수 있고, 그에 대한 대처방안도 마련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세계 3대 종교 중 하나지만 정작 발상지인 인도에서는 그 힘을 잃어버린 불교에 대해 더 큰 관심을 갖고 지켜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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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 내가 이걸 1학년때 썼단거여? 지금도 모르는걸 이땐 어떻게 알았을까..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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