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iteDwarf

블로그 이미지
안녕
by TheStrokes
  • Total hit
  • Today hit
  • Yesterday hit

서론

-과학과 사회, 종교

 

흔히 현대사회를 ‘과학기술 중심사회’라고 한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과학기술은 우리의 사고방식이나 생활양식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에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는 장소와 시간을 꼼꼼히 챙겨야 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심지어 휴대전화를 잠시라도 손에서 떼어놓으면 불안해지는 ‘휴대전화 중독증’까지 등장했다. 당장 컴퓨터가 사라진다면 수많은 금융, 경제 등의 분야에서의 전산 업무는 중단되고 세상은 혼란에 빠진다. 이 외에도 수많은 분야에서 대부분 적용 할 수 있고 우리 생활 전반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 과학기술이다. 각종 가전제품과 가구, 신발, 종이와 펜, 전자제품 등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은 물론 상하수도 시설, 전기설비, 건축물, 도로시설, 교통시설 등 눈에 잘 띄지 않는 것들에 이르기까지 과학기술의 성과물이 아닌 것을 찾기 힘들다. 그리고 대중들은 이러한 과학기술을 이성적, 논리적이고 정확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법정에서 형사나 민사 사건에 대한판결을 내릴 때에도 핵심적 근거가 되는 것이 과학이다. 예를 들어 사건의 범인을 가려낼 때 결정적 단서가 되는 것은 사건 현장의 물품들과 범행도구에 묻어있는 지문, 혈흔 등이다. 이 지문과 혈흔 등의 과학적 분석을 통해 범인이 밝혀진다. 사회적으로 다툼이 발생했을 때 최종적으로 판가름을 하는 법정에서조차 과학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라면 다른 곳에서는 말할 필요조차 없지 않을까.

이렇게 객관적이고 명확한 과학이 어떻게 종교와 연관 지어질 수 있을까? 흔히들 종교는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한다. 사실 불교의 윤회설이나 기독교의 창조론 등은 사람들 내면의 믿음 속에서만 그 존재 기반을 찾을 수 있을 뿐 다른 어떠한 명확한 근거도 논리도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종교는 기존의 믿음이나 신념이 위기에 봉착했을 때 약간의 수정을 통하여 그를 이어나간다. 바로 여기서 과학과 종교의 연결점을 찾을 수 있다. 가령 로마의 바티칸 교황청에서는 진화론과 창조론의 중간입장에서 ‘진화론적 창조론’으로서 다윈의 진화론을 수용하고 있다. ‘인간 진화 과정의 체계를 신께서 설계하셨다’라는 식으로 말이다. 또한 17세기의 위대한 과학자인 아이작 뉴턴은 ‘뉴턴이 과학에 대한 논문을 100편 발표했다면 종교에 대한 논문은 1000편을 발표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뉴턴은 이 세계는 신이 창조했고 세계는 신이 설계한대로 움직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신이 설계한 세계의 체계를 밝혀내는 것이 바로 과학자들의 소명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소속돼있던 영국 과학자들의 모임인 왕립학회 구성원의 3분의 2가 청교도인들 이었다는 사실은 과학자들이 신에 대한 믿음을 간과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리고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칼뱅주의를 통해 자본주의와 종교 간의 연결고리를 찾았다. 칼뱅의 예정설에 따르면 인간 각자의 운명은 신에 의해 이미 정해져 있어서 인간의 노력으로 바꿀 수 없다. 칼뱅주의자들은 이에 대한 탈출구를 현실에서 찾고자 했다. 즉 내가 신에게 선택받았다는 사실을 현세적 성공을 통해 증명해 보이는 것이었다. ‘힘써 일하고 벌어들인 돈을 낭비하지 않고 금욕적이고 청빈한 생활에 힘쓸 것’이라는 기독교의 윤리는 ‘축적된 자본의 투자를 통한 자본의 재축적에 힘쓸 것’이라는 자본주의 정신과 서로 맞물리게 된다. 사실 베버의 이런 해석은 사회학적 이론에 기초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인과론보다는 상관론에 입각하고 있기 때문에 이해가 쉽지 않다. 미국의 사회학자 로버트 머튼은 자신의 박사논문에서 바로 이 해석법을 사용하여 17세기 영국의 과학자사회를 분석했다. 앞서 얘기했던 왕립학회 구성원의 3분의 2가 청교도였다는 점을 밝힌 것이 바로 로버트 머튼인데 그는 자본주의 발전에 기독교가 기여했듯, 과학의 발전에도 종교(청교도주의)가 기여했다는 결론을 내놓는다. 과학 활동은 신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 아니라 신이 자연안에 새겨놓은 비밀을 밝혀내서 신의 영광을 드높이는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위의 내용을 바탕으로 종교국가인 인도에서 어떻게 과학기술이 발달했는지에 대해 알아보고 이를 통해 고대와 현대의 인도 과학기술을 살펴보자.

 

본론

 

1. 인도의 고대 과학기술

BC 1,500년 경 북인도에 아리안 족이 침입함과 더불어 인더스 문명도 끝이 났다. 이들은 변화하는 세계의 뒤에 불변의 법칙과 질서(르따)가 있다고 믿었고 태양이나 번개, 불, 바람과 같은 자연의 힘을 인격화시킨 신들(deva, 天)을 찬송하고 숭배하는 제식주의적 종교를 발전시켰다. 원래 인도사상의 근간이 되는 베다(Veda)는 지혜, 즉 신의 가르침이라 여겨졌고 이는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은 맥락으로 과학과 신을 잇는 연결고리가 되었다. 인도의 고대 과학은 이 베다에 기초한 제사의식을 통해 발전했다. 좀 더 정확한 날짜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별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분석했으며 이는 천문학, 점성술의 발달로 이어졌다. 풀잎 무더기로만 만들던 제단을 좀 더 바르게 설계하기 위해 기하학과 수학이 발달했고 장수를 바라는 마음에서 주술과 의학이 발달했다.

 

①우주관

지금으로부터 약 4500년 전, 인더스 강 유역을 따라 하나의 문명이 싹트고 있었다. 현재의 인도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당시 인도인들은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보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우주에 대해 상상하며 꿈을 꾸었을 것이다. 당연한 것이겠지만 당시 사람들의 상상에 기반을 둔 우주는 실제 우주와는 매우 다르다. 맨 처음 그들이 상상한 우주는 맨 아래부터 순서대로 코브라-거북이-코끼리가 지구를 떠받치고 있고 그 위에는 또다시 코끼리가 있는 형상이었다. 이 코끼리는 천상의 세계를 짊어지고 있고 천계 위에는 다시 태양, 달, 별이 돌고 있으며 세상의 맨 꼭대기에는 신神이 존재한다는 것이 고대 인도인들의 생각이었다. 이를 표현한 삽화에는 코끼리가 총 7마리가 등장하는데 이는 코끼리로 대표되는 인도 문화를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태양과 달, 별보다 신을 위에 표현한데서 당시에도 절대자인 신에 대한 개념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로부터 1500년 후에는 인도의 초기 문명을 이끈 성전인 ‘리그베다’의 하나인 ‘비슈누 플리나’가 등장한다. 여기에서는 우주 생성을 설명하고 있는데 놀랍게도 현대 우주론의 토대가 되고 있는 빅뱅이론의 우주란(宇宙卵)의 개념이 도입되어있다. 이 우주란에는 우리가 생활하는 땅 그리고 태양, 달과 별들이 운행하는 천계와 성인들의 수행 장소인 성계(聖界)가 존재한다고 표현되어있다. 그 주위에는 물이 흐르고 불, 바람 등의 순서로 우주란을 둘러싸고 있다. 이후 다시 500년이 지난 후에 불교가 탄생하면서 새로운 우주관이 생겨났는데 이때의 우주관은 소승불교와 대승불교의 우주관으로 나뉜다. 다들 알다시피 소승불교는 불교가 여러 가지 분파로 분열하던 시기에 생겨났고, 대승불교는 아쇼카왕이 죽은 뒤 서북인도가 외국 세력에 들어가면서 생겨났다. 이는 소승불교와 대승불교의 우주관에 차이를 낳게 된 계기가 되었다. 먼저 소승불교의 우주관부터 살펴보자. 소승불교에서는 일반적인 하늘을 ‘색계’라는 물질계 하늘이 덮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색계 위로는 무색계가 있고 최종적으로 불계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이 하늘 아래에는 수미산(須彌山)이 솟아있다. 이 수미산의 정상에는 제석천을 왕으로 모시는 33명의 신들이 살고 있다. 수미산 아래에는 네 개의 대륙이 표현돼 있는데 이 대륙들은 바다에 의해 나눠진다. 각각의 대륙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그 중 남쪽 대륙이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라 한다. 그리고 지하에는 지옥으로 보이는 세계가 있다. 그 아래는 각각 풍륜, 수륜, 금륜으로 이루어져있다. 이상 살펴본 소승불교의 우주관에서 주목할 점은 현대 천문학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우주 구조이론과 닮아있다는 것이다. 고대 인도인들은 거대한 풍륜과 수미산 그리고 이들을 모두 합한 구조를 ‘1세계’라 불렀다. 우주엔 이런 세계가 많이 존재하며 1000개의 세계를 모은 것을 ‘소세계’라 불렀다. 다시 이 소세계를 100개 뭉친 것을 ‘중세계’, 1000개의 중세계를 합친 것을 ‘대세계’라 불렀다. 이는 우주 구조가 작은 은하가 여러 개 모여서 보다 더 큰 은하 군을 형성하고 있으며 다시 그 큰 은하계가 모여서 더 큰 은하군단을 이루고 있다는 현대 천문학의 개념과 상당히 유사하며 1600년 전 고대 인도인들의 뛰어난 상상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번에는 대승불교의 우주관을 살펴보자. 대승불교와 소승불교의 세계관은 부처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라진다. 소승에서 부처란 역사적 실존 인물이며 그가 열반에 들어선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사람으로 취급된다. 그러므로 불탑은 ‘부처의 묘’와도 같은 것이다. 반면 대승에서의 불탑은 서민들이 참배하는 하나의 신전이며 부처는 그 신전 안에 영생한다고 본다. 부처가 죽은 뒤 너무 오랜 세월이 흘렀기 때문에 이에 대한 역사적 사실로서의 감각이 사라지고, 신격화되는 부처는 그대로 우주의 동의어가 된다. 대승에서 부처는 전 세계에 존재한다. 이것이 법화경의 풀이방법인데 이는 화엄에 이르러 다수의 부처가 동시에 우주에 존재한다고 하는 이론으로 발전한다.

화엄경전에서 우주에는 수많은 풍륜이 깔려있다. 이 중 가장 밑바닥에 깔려있는 풍륜을 평등주(平等住)라고 하고 최상단의 풍륜을 수승위광장(殊勝威光藏)이라 한다. 그리고 그 위에는 대연화라고 하는 거대한 연꽃이 피어있다. 대연화 주변의 꽃들은 대륜위산봉이라 하고 대연화 중앙에 있는 화탁은 화엄세계의 대지를 의미한다. 이 화탁은 금강으로 만들어져있고 구멍이 많이 나있는데 그 하나하나가 향수해를 이루고 있다. 이상이 고대 인도에서의 우주관이다.

 

②천문학

천문학은 고대 인도에서 운세를 점치거나 점성술을 위해 사용되었다. 초기에는 신들의 영혼을 해, 달, 별등과 연관 지어 생각하였고 각각의 행성들은 비, 가뭄, 계절 등의 현상을 관장한다고 생각되었다. 인류 최초의 천문학자는 제사장이라는 말도 있듯이 ‘하늘’의 이해는 곧 ‘신’의 이해와 연결되고 이는 점성술과 천문학의 연결로 이어진다. 스톤헨지등과 같은 유적을 볼 때 고대의 건축은 천문과 종교의 기능을 모두 충족했음을 알 수 있다. 고대 인도의 천문학은 종교와 영적관점을 가지고 있었음과 동시에 우주 현상의 정확한 관찰을 포함하였다. 이 천문학은 아시아 대륙에서 수학의 성장을 위한 촉매제 역할을 했고 서구로 전달되어 인류 발달에 큰 공헌을 했다. 최초의 천문학적 기록은 기원전 2000년, 힌두교 성전인 리그베다에서 발견된다. 그리고 2500년 뒤에 천문학은 인도 고대 과학에서 크게 부상했음을 당시의 여러 논문에서 볼 수 있다. 고대 인도의 천문학자들은 점성학 표를 만들기 위해 별과 행성을 사용하였다. 농업을 중시하던 고대 사회에서 정확한 날짜에 파종을 하는 것은 매우 중요했고 이 날짜를 알아내기 위해 태양과 달을 이용하여 일, 월, 연도를 측정하기 시작하였다. 또 리그베다에서는 고대 인도인들이 한 해를 360일로 나눈 것을 발견할 수 있다. 1년은 12개월 한 달은 다시 30일로 세분화 되었는데 특이한 점은 5년에 두 번씩 366일이 존재하도록 했다는 점이다. 이는 현재의 윤달 개념과도 비슷한데 여기서 인도 고대 천문학의 정확성을 알 수 있다. 또 리그베다에는 제단의 정확한 방향을 설정하기 위해 동서남북의 4방위를 사용했다는 것도 기록되어 있다.

기원전 500년 경 아리아바타(Aryabhata)라는 인도 천문학자는 지구의 회전에 영향을 주는 행성의 움직임을 고려하여 수학 시스템을 발견했다. 그는 지구 둘레와 지름의 값을 구하려 했고 월식과 일식을 발견했다. 그리고 기원전 498년에 출판된 그의 책 Aryabhatiy에서 일식 계산을 위한 수치와 기하학적 규칙을 설명했다. 이후 1세기경 인도 천문학자들은 지구가 구형임을 발견하고 행성들의 둘레 측정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4세기 경 주전원과 이심률을 사용한 그리스계 수리천문학이 인도에 전래되자 인도 천문학은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게 되고 5세기 말 새로운 힌두 천문학이 성립된다. 이것은 지구를 중심으로 혹성 모델에 의해 혹성의 위치를 계산하는 것으로, 이 계산에서 인도는 삼각함수를 고안하였다. 6세기 경 인도의 천문학자들은 지구는 물체를 끌어당기는 힘이 있고 이는 모든 곳에 적용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 한 뉴턴보다 훨씬 이전의 인식이었다. 싯단타 천문학은 지구가 구형이고 행성의 둘레를 계산하기 위해 발전됐고 7세기에 브라마굽타(Brahmagupta)라는 천문학자는 지구의 둘레가 36000km라는 답을 내놓는다(이는 현대 과학기술로 측정한 지구 둘레인 40000km와 매우 흡사하다). 인도 천문학은 그들의 다른 학문, 문화들과 마찬가지로 이슬람으로 넘어가면서 이슬람 천문학의 기초를 형성하게 된다. 그리고 16세기부터 18세기에 이르는 무갈제국시대 동안 이슬람 관측 기술과 힌두교의 수학기술을 혼합하여 커다란 천문학전 발전을 이룩했다. 후에 인도 천문학은 영국의 식민 지배를 통해 전 세계로 퍼져나가고 현대 천문학의 주요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③수학

요즘 인도수학이라 하면 베다수학을 많이 떠올리지만 인도수학은 베다수학 뿐만 아니라 세계 수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인도인들은 기호를 적극 활용하며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숫자인 인도-아라비아숫자를 만들었고 10진법을 사용했다. 또한 인도의 수학자는 음수의 생각을 일찍부터 가졌고 이것을 법칙으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인도수학에서는 1부터 9까지 아홉 개의 숫자와 특별한 기호인 0을 사용했고 각 숫자가 놓이는 자리에 따라 나타내는 값이 다른 특별한 방식으로 수를 표현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0’의 발견이다. 이전까지는 전혀 구체화시킬 수 없었던 무(無)의 개념은 0의 등장과 함께 비로소 실제적인 기호로 표현될 수 있었다. 힌두의 수학자들은 0이 숫자들을 구별하는 기능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고유한 수임을 발견했다. 1이나 2가 고유한 숫자인 것과 마찬가지로 0 역시 엄연한 수로서 존재했다. 즉 ‘아무것도 없음’을 나타내는 수인 것이다. 1부터 9까지 아홉 개의 숫자와 0을 써서 10이 될 때 마다 한자리씩 올려가는 것을 생각해 낸 일은 인류 역사상 매우 대단한 발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0의 발견에 대한 일반적인 시각은 간단하고 하찮은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것이 문명의 발달에 얼마나 큰 기여를 했는가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쉽게 얘기해서 숫자 0은 빈자리를 채워 수를 간편하게 나타내 주고 계산을 손쉽게 해 줬다. 따라서 사람들은 큰 수를 다루며 과학문명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인도에서 발명된 숫자는 아라비아로 전해졌고 그 후 유럽으로 전해졌다. 아라비아 숫자와 0은 인도에서 최초로 창조되어 서양으로 전파되어 꽃을 피운 것이다.

인도의 고전 수학이 0의 개념을 발견하며 인류 역사에 큰 공헌을 한 반면 이후 인도 수학은 발달을 멈추었다. 그 첫 번째 이유로는 승려나 왕족들만이 수학을 연구했기 때문이다. 당시 인도의 학문은 귀족만을 위한 것이었고 수학도 대중과는 분리되어 있어서 유희화되는 경향이 있었다. 두 번째 이유로는 운문 형식으로 수학을 나타냈다는 점이다. 인도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시의 형식으로 남겨 놓곤 했는데 시는 수학적인 내용을 자세하게 옮길 수 없었고, 의미가 애매모호하게 되기 쉬웠다. 그래서 시를 쓴 본인이나 상당한 학식을 가진 사람 이외에는 시로 읊은 수학을 이해하는 데 큰 고생을 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후세 사람들이 공부하고 싶어도 연구하는 도중에 그만 두게 되어 수학의 발달이 저절로 멈추게 된 것이다. 수학은 증명이나 계산을 분명하게 써서 나타내어야만 제 구실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원자설

인도는 예로부터 여러 가지 요소설(원소설)이 전개되었다. 기원전 6세기 경 인도에서는 땅(地), 물(水) 불(火), 바람(風)의 4원소설이 널리 전개되었고 각 요소들은 결코 분할될 수 없다고 여겨졌다. 이들은 부분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즉 다른 것들에 의해 구성되지 않기 때문에 영원 불멸하다는 것이 고대 인도인들의 생각이었다. 이 4원소에 힌두교도들은 아카사(akasa)라는 제 5원소를 추가하였는데 이는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가 갖고 있던 5원소설(에테르)과 통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불교는 asaka를 인정하지 않고 4원소만을 인정했고 이는 브라만교에 대한 반대운동으로 이어졌다. 각각의 원소는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알맹이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는 그리스의 원자(atom)와 상통하는 생각이었다. 불교도들은 여기에 시간적인 원자성을 보태어 원자가 물질의 최소단위일 뿐 아니라 최소단위의 시간 동안만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하나의 원자는 극히 잠깐의 순간에만 존재하다 사라지고 상황에 따라 다른 원자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상의 덧없음에 착안한 불교적 원자론이다. 이후 인도의 힌두교·불교·자이나교는 각기 원자론을 전개했다.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기타』에도 원자 이야기가 나온다.

 

⑤건축기술

건축의 사전적 의미는 ‘인프라를 쌓거나 건물을 짓는 과정’이다. 이 건축이란 단어를 한자로 풀면 세울 건(建)과 쌓을 축(築)이라는 두 글자의 결합으로 이루어져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두 글자로 동양과 서양의 건물을 짓는 방식이 갈라진다. 예부터 동양의 건물은 세울 건자에 그 근간을 두고 있다. 우리의 조선시대 궁을 비롯해 전통 가옥은 모두 나무를 이용해 지어졌고 이는 자연스레 나무를 세워 건물을 짓는 방식으로 이어졌다(하늘로 높게 솟은 나무를 쌓을 순 없는 노릇이니). 반면 서양의 성당, 궁전 등의 주재료는 돌, 바위이고 당연히 쌓아나가는 방식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과거 건축물들은 대부분 이 두 가지 방식 중 하나를 택하거나 둘을 혼합한 방식을 택하고 있다. 하지만 인도의 건축은 이 선상에서 떼어놓고 이해해야한다. 인도의 건축물은 우리가 알고 있는 중국, 일본 등 동양의 건축이나 서양의 건축과는 굉장히 다르다. 신들의 조각이 가득한 대사원이나 바위산을 깎아 만든 석굴사원 등의 인도 건축은 현대인들에게 매우 신비롭게 여겨진다. 건축물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예술과는 달리 특정 목적에 부합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 즉 건축은 합목적적이라는 것이다. 고대의 건축 문화의 근본을 알게 되면 모두 합목적적인 바탕에서 성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합목적에 근거하여 이루어진 표현이나 사상이 바로 건축의 예술성이다. 인도는 지리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그리고 종교적으로도 유럽 전체와 맞먹을만한 광대함과 깊이를 가지고 있는 문명권이다. 자연히 건축물의 종류에 있어서도 인도 건축이 가지고 있는 다양성은 엄청나고 서양의 건축과 비교해보면 인도 건축은 너무 다양하여 일관성이 없는 듯 보인다. 이는 종교의 다양성에서 그 바탕을 찾아볼 수 있다. 서양에서는 중세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기독교를 신봉해왔다. 물론 기독교는 가톨릭과 개신교로 나뉘지만 이 둘의 차이는 그렇게 크지 않고 건축 양식의 구별을 가져오지도 않았다. 반면 인도에서는 시대별로 지배적인 종교가 달랐다. 고대에는 불교가 중세부터는 이슬람교가, 그리고 현대에는 힌두교가 인도 종교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 외에도 자이나교나 시크교, 근세부터는 기독교 등이 인도에 들어오면서 각 종교들은 전국의 도시에 각자의 건물들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렇게 다양한 인도의 건축을 하나의 특징으로 콕 집어 말할 순 없지만 그들 모두를 관통하는 인도건축의 큰 특성이 있다. 그 첫 번째는 조각을 좋아했던 인도인들의 취향이 담겨있다는 것이다. 인도인들은 모든 조형예술 중에서 조각을 가장 좋아했기 때문에 건축물도 조각처럼 만들었다. 목조, 석조건물 할 것 없이 인도의 사원을 보면 조각을 하기 위해 건축물을 만든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정교하고 아름다운 조각이 새겨져있다. 그들은 건축물의 내외를 조각으로 장식할 뿐 아니라 건축물 전체를 조각으로 보았다. 화려한 장식과는 달리 그 공간은 매우 빈약하다. 건축물의 내부는 어둡고 작은 동굴로서 어디까지나 외향적인 조형물일 뿐이었다. 이러한 경향에 방향수정을 가한 것이 이슬람 건축이다. 우상숭배를 거부하는 이슬람은 조각과 회화 등의 우상적 표현을 금지하고 공간을 둘러싸는 막(膜)으로서의 건축을 발전시켰다. 이것이 인도 전통 건축에 영향을 주어 방향을 수정시킨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슬람 건축 또한 인도 고유 건축의 양향을 받아 다른 이슬람권의 건축물들과는 달리 매우 조각적이고 외향적인 표현을 했다는 것이다.

인도 건축물의 또 다른 특징은 바로 석조임에도 불구하고 목조적인 원리에 의해 지어졌다는 것이다. 고대 인도에서는 지금보다 목재가 풍부하여 목조적인 가구(架構)와 표현에 중점을 두었다. 인도인들은 중세에 석조건축이 주류가 되었어도, 이슬람 건축의 아치와 돔이 전해진 뒤에도 가구법에 집착하여 돌을 나무처럼 조각하였다. 여기에는 구조적인 면 보다는 인도 전반에 깊이 배인 미적 감각이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를 통해 인도의 석조건축은 목조적인 기둥, 보의 구조 등을 탐구함과 동시에 다양한 종교적 특색을 담아내며 이슬람 건축과 유럽 건축에 뒤지지 않는 건축문화를 만들어냈다.

 

2. 근현대 인도의 과학기술

현재 인도의 과학기술은 IT, 원자력공학, 우주항공산업 등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13억의 풍부한 노동력과 세계 어느 나라 못지않은 뜨거운 교육열, 계급 할당제와 신분제 탈피 등에 대한 열망은 인도가 성장할 수 있는 바탕이 되고 있다.

194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이후 인도 경제는 지지부진한 성장을 해왔다. 초대 총리인 자와할랄 네루(J. Nehru)는 17년간 인도를 통치하였는데 이 기간 동안 인도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3~4%에 불과했다. 같은 기간 동아시아의 국가들이 6~8%의 경제성장을 보인 것에 비하면 이는 초라한 성적이었다. 네루는 인도를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로, 경제적으로는 사회주의체제로 이끌었다. 네루는 분명 정치, 종교적인 면에서는 존경받아 마땅한 인물이지만 경제정책은 그다지 좋지 못한 성적을 보인 것이 사실이다. 네루와 함께 독립 이후 인도를 이끌었던 인물 중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바로 마하트마 간디이다. 그는 인도의 산업화를 반대했고 자급자족적인 경제를 추구하였다. 또한 도시화를 반대하고 농촌을 중시해야한다는 주장을 펼쳤는데 이는 카스트제도를 유지하고자 하는 기득권층에게 좋은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①IT, 소프트웨어

결국 인도는 1966년 제 1차 외환위기를 맞게 되고 1990년 걸프사태의 영향으로 전 세계가 유가 폭등, 소비투자 위축 등으로 휘청거릴 때 인도는 제 2차 외환위기를 겪는다. 이에 따라 1991년 인도는 자립경제체제를 버리고 개방형 시장경제체제로 전환하게 된다. 1991년 당시 총리였던 나라시마 라오는 2%에 가까운 루피 절하를 실시한 것을 시초로 ‘산업정책성명’, ‘무역정책성명’을 연이어 발표하고 경제자유화의 기본자세를 취했다. 이 시기의 경제 자유화는 인도로서는 엄청난 행운이었다. 인도는 당시 미국을 중심으로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던 IT(정보통신기술)혁명을 접했고 이를 자국의 새로운 경제 전략의 핵으로 삼기로 한 것이다. 만약 1991년 이전과 이후의 시점에 경제자유화를 실시했다면 현재 인도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인도의 소프트웨어 산업은 그 시기와 타이밍을 절묘하게 맞추었다. 하지만 뚜렷한 예측도 없이 무작정 선진국의 산업에 뛰어드는 것은 인도로서는 불안한 측면이 많았다. 국가의 수도, 전력, 도로, 통신 등과 같은 기반시설도 미미한 상황이었는데 선진국에서조차 그 미래를 예측 할 수 없는 IT라는 분야에 나라의 흥망성쇠를 맡긴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도박이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종교국가인 인도에서 표면상으로는 종교와 정반대되는 과학이 성장하기엔 어려움이 있어 보였다. 하지만 고도의 추상적인 사고를 요구하는 종교가 이를 현실적으로 실현해 나간다는 과학을 만나면서 내면적 의미적으로 매우 밀접한 관계가 되었다. 종교와 과학은 현재의 IT와 문화적으로 어딘가 하나의 줄로 묶여져 있는 것이다. 인도가 IT 산업 분야에서 두드러진 발전을 이룬 데에는 소프트웨어 산업 자체의 특수성과 인도 고유의 사회적, 역사적 조건이 잘 결합되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인도에서는 전통적으로 지적, 정신적 노동은 존중하는 반면 육체적 노동은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 때문에 기술계 대학 졸업생들도 쉽게 공장 등에서 일하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소프트웨어산업은 순수한 두뇌 노동이었고 이는 우수한 인재들이 IT산업으로 뛰어들게 된 계기가 되었다. 수학과 과학을 좋아하는 인도인들은 지속적으로 정보통신산업에 참여하고자 했다. 더군다나 다른 산업에 비해 임금도 훨씬 높고 해외에서 일 할 기회도 많으므로 인도의 인재들은 IT산업에 취직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현재 인도 내에서 가장 인기 있고 선망 받는 직종은 하나 IT기술자이고 이는 자연스럽게 공과대학의 입학 경쟁률이 높아지는 결과를 낳았다. 인도 내 최고의 공과대학인 IIT(Indian Institute of Technology)의 한 해 정원은 2600명인데 반해 지원자는 20만 명에 육박한다는 사실은 인도 내에서 IT산업이 얼마나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마이크로소프트, 인텔, IBM 등 세계적인 IT기업에서는 매년 IIT의 졸업생들을 모셔가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한다. 13억 인구 중 상위 0.1% 최고의 두뇌를 데려가는 것이 기업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좀 더 세부적으로 들어가보면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의 이유가 있다. 그 첫 번째 이유로는 영어를 들 수 있다. 200여 년간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아온 인도는 영국의 식민정책에 따라 자국어 사용을 억압받고 영어 사용을 강요받았다(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을 당시 일본어 사용을 강요받았던 것처럼). 당시 인도인들에게 이는 매우 치욕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20세기 후반부터 21세기에 들어서까지 이 치욕은 국제사회에서 인도인들의 경쟁력을 높이는 매우 중요한 토양으로 탈바꿈한다. 13억 인도인 가운데 영어를 하는 사람은 대략 1억 5천만 명 정도라고 한다. 무려 800개가 넘는 언어를 가지고 있는 인도에서 통용되는 언어는 바로 영어다. 이러한 시대적, 사회적 배경에서 인도인들은 세계시장에 뛰어들 수 있는 강력한 무기 하나를 가지게 된 것이다. 인도인들이 세계 굴지의 IT기업들을 장악하고 있는 두 번째 이유는 값싼 노동력이다. 13억이 넘는 인구 중 최고의 두뇌를 자랑하는 IIT의 인재들의 몸값은 과연 얼마나 쳐줘야 할까? 인도에서 3~5년 정도 일한 IT 업계의 엔지니어 연봉이 2만 달러라고 한다. 미국에선 7만 5천 달러를 줘야 하니 겨우 4분의 1정도인 셈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다.

인도의 IT 산업 시장은 현재도 활발히 움직이고 발전을 거듭해 나가고 있으며 13억이라는 어마어마한 인구를 이용한 ‘인해전술’은 IT 뿐 아니라 인도의 전반적인 산업을 지탱하고 있는 버팀목이 되고 있다.

 

②핵무기와 원자력 기술

인도의 과학기술을 얘기 할 때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핵무기와 원자력 발전이다. 인도의 초기 핵정책은 경제발전을 위한 에너지원을 공급받기 위한 방향으로 전개되었고 군사적 목적으로서의 개발 의지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인도 초대 총리인 네루는 일반적인 외교 정책과 비슷하게 핵무기에 대해서도 중립적이고 평화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서양의 공격적이고 비인간적인 무기로서의 핵무기를 비난함과 동시에 자신들은 이와 다른 평화적 목적으로서의 핵실험을 표방한 것이다. 따라서 인도는 독립 이후 줄곧 국제사회의 핵무기 경쟁을 반대하며 핵 평화정책을 주도하는 국가로 알려지게 됐다. 그러나 인도는 1974년 핵실험을 하며 국제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핵무기의 평화적 이용을 강조하던 인도가 반기를 드는 행동을 했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미국, 캐나다로부터 제공받은 군사적 목적의 원자로가 아닌 연구 목적으로서의 원자로를 이용해 핵 실험을 한 최초의 국가였기 때문이다. 실험 이후 인도는 평화적 목적에서의 핵 실험이었다고 거듭 강조하였지만 국제사회에서 인도는 공식적인 핵무기 보유국으로 인정되었다. 당시 이에 대한 여론조사의 결과 90%이상의 인도인들이 자신들의 핵 실험에 자부심을 가지고 국제사회에서의 영향력이 강화되었다고 생각했다. 이후 1986년 인도는 2차 핵실험에 성공하며 네루시대의 핵 평화정책에서 완전히 벗어나 남아시아의 핵 개발 경쟁을 촉구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낳았다. 실제로 인도는 핵확산금지조약(NPT)에 참여를 반대하고 원자력 시설 사찰을 거부하는 등 핵무장 국가로 나아가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여기에는 주변국들과의 마찰이 한몫 했는데 특히 중국과의 마찰이 큰 원인으로 작용했다. 당시 인도와 중국은 국경분쟁 등으로 마찰을 빚고 있었는데 이에 대한 안보 강화 목적이 요구되었고 중국의 위협에 맞설 수 있는 핵무기 개발이 요구되고 있었다. 또한 미국은 무서운 속도로 자신들을 추격해오고 있던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에서 인도의 NPT 조인 거부, 핵시설 사찰 거부 등을 묵인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결국 2007년 인도는 미국으로부터 공식적으로 핵보유국의 지위를 인정받게 된다. 인도는 2009년 기준으로 45~70기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으며 최대 110기의 핵무기를 제조할 수 있는 플루토늄을 보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상 살펴본바와 같이 인도는 원자력 기술의 강국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인도는 전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빈민가는 말할 것도 없고 최고급 레스토랑에서조차 단전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다국적 기업들의 인도 진출에 발목을 잡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전력 부족문제이다. 우리나라의 물가가 200% 상승하는 동안 전기세는 10% 오르는데 그쳤다. 전문가들은 이를 원자력의 힘이라고 한다. 물론 이는 우리나라가 세계 5대 원자력 강국인 이유도 있지만 핵무기까지 보유하고 있는 원자력 강국인 인도에서 왜 이러한 전력부족 사태가 발생하는 것일까? 이는 원자력이 인도 전력시장 내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극히 일부이기 때문이다. 2012년 현재 에너지원별 인도의 발전설비 현황을 살펴보면 화력이 66.5%, 수력 19.1%, 신재생이 12.1%를 차지하고 있는 반면 원자력은 그 비중이 2.3%밖에 되지 않는다. 이는 곧 핵무기로서의 원자력은 비약적으로 발전 했지만 실용적 자원으로서의 원자력 개발은 아직 미비하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에 인도 정부는 2045년까지 220GW의 원전을 계획하고 있다. 인도는 화석연료를 외국에 심각하게 의존하고 있어 원자력 점유율을 늘려 2050년에는 전체 전력의 25%까지 끌어 올린다는 계획이다.

 

③위성, 우주과학

21세기 전 세계의 우주 과학은 미국, 러시아, 중국, 인도, 일본이 이끌고 있다. 그 중 인도는 우주로켓을 보유하고 다른 나라의 위성 발사를 대행해 주는 몇 안 되는 나라다(러시아, 미국, 프랑스, 중국, 우크라이나, 인도). 현재 인도는 우주산업의 전 분야에 걸쳐 다양하고 탄탄한 기술과 13억에 이르는 인구, 풍부한 연구인력 등을 기반으로 국민 생활 조건을 향상시키는 방향으로 우주과학을 발전시키고 있다. 그동안 인도 로켓에 대해서는 그다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제3세계 국가였던 인도가 세계로부터 고립된 상황에서 어떻게 국제적 수준의 우주기술을 독자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는지 많은 이들이 궁금해 했다. 이를 알기 위해서는 17세기 인도의 로켓 개발로 거슬러 올라가야한다.

17세기 인도는 중국 고대 로켓기술의 영향을 받아 쇠통으로 만든 추진체를 사용하여 로켓을 발명했다. 이 로켓은 사정거리가 1km에 이르렀고 1799년 영국 동인도회사의 군대가 인도를 침공했을 당시 실제로 사용되어 영국군을 놀라게 했다. 하지만 끈질긴 항쟁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초반 인도는 영국에 점령당하고 만다. 이후 영국의 식민 지배가 시작되면서 인도의 로켓 기술은 암흑기에 빠진다.

침체돼 있던 인도의 우주 과학은 1969년 인도 우주 연구 기구(ISRO)의 설립과 함께 러시아의 로켓 기술을 이용한 인도 최초의 인공위성인 ‘아리아바타’를 발사시키며 다시 꽃피기 시작한다. 첫 위성을 발사한 뒤 인도의 과학자들은 연구를 거듭해 고체 추진제를 사용하는 과학 관측 로켓을 만들었고, 1979년에는 마침내 4단식 고체 추진제 우주 로켓인 ‘SLV-3’를 완성한다. 하지만 SLV-3는 첫 번째 발사에서 바다에 추락하며 실패로 돌아간다. 그리고 바로 다음 해인 1980년 두 번째 발사에서 성공해 무게 로히니(Rohini) 위성을 지구 궤도에 진입시킨다. 그리고 1989년 5월 22일 오전 7시 10분 인도의 우주과학의 역사에 한 획을 긋는 미사일인 ‘아그니’가 발사되었다. 아그니에 사용된 기술은 당시 미국에조차 존재하지 않았던 최첨단 기술이었다. 아그니를 계기로 인도는 고도의 정밀도를 갖춘 장거리 비핵무기 개발 능력을 보유하게 됐다. 이후 인도는 고체 추진제를 사용하는 로켓을 더욱 발전시켜 좀 더 큰 인공위성을 발사할 수 있는 ‘극위성 발사체’(PSLV)를 1993년에 완성하게 된다. 최초의 PSLV 로켓 발사 역시 바다에 추락하고 말았지만, 1994년 두 번째 발사는 성공적으로 이뤄진다. 로켓 개발에 자신이 생긴 인도는 이때부터 돈을 받고 위성을 발사하는 이른바 ‘우주 택배’ 사업을 시작하고 1999년에 최초의 상업 발사에 3대의 위성이 쓰인다. 이 가운데 하나가 바로 우리나라의 우리별 3호이다. 인도는 자국 국민 생활 조건을 향상시키는 유형의 결과물을 제공할 수 있는 직접적인 우주개발에 집중하면서 위성발사용 로켓, 통신위성, 지구관측위성 등을 자력으로 개발하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인도는 자국 자체 수요에 의한 잦은 발사 경험과 풍부한 인적 자원을 바탕으로 향후 국제적인 발사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론

-과학을 통해 본 사회, 경제적 담론

 

21세기 들어 미국이 인도의 섬유 시장에 뛰어들기 전까지만 해도 인도는 수천 년간 면화를 생산해온 섬유 산업 강국이었다. 그러나 90년대 초 농업시장이 개방되며 자본과 국제권력을 앞세운 미국의 거대기업들이 인도 시장에 들어오면서 이야기는 달라진다. 미국은 인도 고유의 특산품, 작물을 ‘훔치기’ 시작하고, 농약, 비료, 종자 시장을 잠식시켜나갔다. 미국의 값비싼 면화 종자를 사고 그 종자에만 고유하게 작용하는 농약을 구매하기 위해 농민들은 높은 이율의 사채를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새로운 품종의 면화를 살 때 진 빚에다 면화 해충에 내성이 생기면서 재배과정에서 뿌린 농약 및 비료 값을 감당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토종씨앗 대신 다국적 기업의 씨앗과 농약을 사느라 농민들이 매년 큰 빚을 지는 구조가 굳어졌다. 결국 빚을 감당하지 못한 농민들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고 지난 10년 간 인도에서 20만 명의 농민이 자살하기에 이른다. 현재 인도의 과학, 산업, 농업 등 모든 분야에 걸쳐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힘’이다. IT 강국이라고는 하지만 자국 고유의 기업은 세계시장에서 미국의 기업에 상대가 안되는 게 현실이다. 인도의 인재들이 세계 유수 기업에 들어가서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힘써 일해 버는 돈은 결국 모두 미국의 손에 들어간다. 물론 이미 선진화 된 미국 기업에서 일하고자 하는 욕망은 자본주의의 거부할 수 없는 흐름이지만 그들의 고등교육을 받은 두뇌를 자국 기업의 부흥에 사용하는 것은 자본주의를 뛰어넘은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자국에 힘을 싣는 길이다. 힘이 생기면 현재 인도의 가장 큰 문제인 빈부격차를 해소할 수 있고 극빈층을 줄여나가서 ‘못사는 나라’라는 인식을 벗어던질 수 있다. 이것이 인도가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방법이다.

대부분의 현대 과학기술은 전쟁이나 군사적 목적에 의해 탄생됐다. 최초의 컴퓨터인 에니악(ANIAC)은 미사일 목표거리의 빠르고 정확한 계산을 위해 발명됐고 세계최초로 휴대전화를 개발한 미국의 모토로라는 2차 대전 당시 무전기를 만들던 회사였다. 우주과학의 시초인 로켓은 말할 것도 없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고엽제는 생명과학의 대표주자인 GMO(유전자변형)산업에서 선두를 달리는 기업에 의해 발명되었다. 과거에 생명을 위협하기 위해 출발한 발명이 현재는 우리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다. 과학기술은 분명 우리 삶을 윤택하게 하고 편리하게 바꿔놨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러한 과학기술은 우리의 건강, 나아가서는 목숨까지 위협하고 있다. 앞서 살펴본 미국의 인도 섬유 시장 공습 사례는 거시적 관점에서 본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우리 생활에 좀 더 밀접한 면에서 보자면 컴퓨터, 스마트폰 중독에 따른 대인기피증, 우울증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애초에 ‘살상’을 목적으로 탄생한 과학기술이 그 칼날을 다시 우리에게 들이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지금 이를 잘못됐다고 비난하며 ‘우리 모두 과학기술을 버립시다.’라는 헛소리를 하는 건 아니다. 과학기술의 편리에 깊게 빠져있는 우리를 한번 되돌아보자는 것이다. 수천 년 전 부처님은 중도中道의 개념을 제시하며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 삶을 강조하셨다. 과학기술의 과도기에 서있는 바로 지금이 중도가 가장 절실할 때 이다. 맨날 보는 스마트폰 지겹지도 않나? 거기서 밥이 나오나 돈이 나오나. 가끔은 휴대폰을 손에서 놓고 내 앞에 앉아있는 친구, 동료의 얼굴을 한 번씩 돌아봐라. 물론 정신건강에 썩 좋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핸드폰 쳐다보면서 전자파 쬐는 것보단 백번 나을 거다.

 

 

참고문헌

 

강윤재. 『세상을 바꾼 과학논쟁』. 궁리. 2011.

김희보. 『세계사 101 장면』. 가람기획. 2004.

조경철. 「고대 인도와 구약성경의 우주관」. IYAZINE. 2009.

Martyn Shuttleworth.「Indian Astronomy In The First Millennium」. 2001.

허민. 『수학의 위대한 발견』. 수학동아. 2009

이광연. 「0의 발견」. 네이버캐스트. 2012.

최미화. 『돌턴이 들려주는 원자 이야기』. 자음과 모음. 2005.

가미야 다케오. 『인도의 건축』. 東方出版. 1996.

로버트 T 캐롤. 『회의주의자 사전』. 잎파랑. 2007.

이옥순. 『인도현대사』. 창비. 2007.

이장규, 김준술. 『19단의 비밀 다음은 인도다』. 생각의 나무. 2007.

나카지마 다케시. 『인도의 시대』. 북북서. 2007.

손승호, 류재욱, 최윤정, 구민재, 김찬완. 『인도의 주요산업-통신, 승용차, IT, 발전, 섬유, 금융』. 한국수출입은행. 2003.

임덕순. 『인도의 과학기술체제와 정책』. 과학기술정책관리연구소. 1997.

이은구. 『IT혁명과 인도의 새로운 탄생』. 세창미디어. 2003.

Navtrek.「Origin of India's Nuclear Weapon Program」,Indian Nuclear History. 2010.

이익환. 「인도의 원자력산업 및 기술 개발 동향 분석」. 한국과학기술연구원.

한영민, 이광진, 홍일희. 「인도의 우주발사체 역사와 개발 동향」. 항공우주산업기술동향. 2011.

박민희, 임종진. "인도 목화농민들 ‘자살’ 전염병처럼 돈다".『한겨레신문』. 2006.05.23.

 

 

' > 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의 원자력기술  (0) 2014.07.09
이런저런 과학기술 담론  (0) 2014.07.09
커뮤니케이션 - 전통, 비판 패러다임  (0) 2014.07.09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마키아밸리/홉스  (2) 2014.07.09
젊은보수  (0) 2014.07.09
AND

ARTICLE CATEGORY

WhiteDwarf (770)
(130)
(75)
(420)
그림 (4)
2010년 여름 (11)
자료저장소 (77)
기타 미완성 (0)
조혈모세포(골수)기증 (12)
로씨야 여행 (14)
A (0)

RECENT ARTICLE

RECENT TRACKBACK

CALENDAR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