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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Strok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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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의한 세상의 분리

세상은 본디 하나였다. 창조론과 같은 종교적 영역은 차치하고 입증 가능한 과학의 입장에서 본다면 빅뱅이라는 조그마한 별의 폭발로부터 이 우주 만물은 생성되었다. 아니, 종교의 영역에서 보더라도 세상 만물은 하느님이라는 하나의 절대자로부터 탄생했다. 오늘날 우리 세계를 구성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모두 하나의 뿌리로 귀결된다. 현상과 실체 역시 하나다. 단지 우리가 현상을 통해 실체를 재단할 뿐이다. 어리석은 인간의 어리석은 판단이 낳은 우리의 현실이다.

부처의 말을 빌리자면 현상세계는 연기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실체가 없다. 세상은 무수한 인연과 관계를 통해 형성된 것이지, 특정 사상이나 개념에 의해 탄생한 것이 아니다. 즉 본디 하나인 세상은 인간의 그릇된 생각이 개입된 순간 여럿으로 분리되었다. 인간의 자아와 이 세계는 고정되어있지 않지만 우리는 우리의 기준에 따라 세상을 고정하고 규정짓는 것이다.

세상은 본디 하나인데 인간이 여럿으로 구분할 뿐이라는 2500여 년 전 부처의 이야기는 과거와 현재, 미래를 막론하고 온 세계에 적용된다. 그리고 그 분류는 학문, 사상, 이념, 과학기술 등 수많은 기준들에 의해 행해진다.

모든 학문은 철학으로 회귀한다. 인문학, 수학, 과학 등의 학문은 모두 철학을 증명하기 위한 하나의 전략적 접근방법일 뿐이다. 사회학과 경영학, 경제학, 정치학 역시 근본적으로는 철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수학은 자연의 절대적인 모습을 기술하는 최고의 수단이자 철학적 도구였다. 물리학은 신의 의미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탄생했고 자연의 보이지 않는 원칙들을 수학적으로 완벽하게 구사하였다. 철학적으로 사색되어지는 절대적인 것을 기하학적인 표현으로 다루고, 그것을 공학적인 표현들로 응용하는 과정에서 현대 공학적 사고관이 탄생했다. 속되게 말하자면 그러한 철학은 신학의 노예 격이다. 철학은 신학에서 하느님의 존재를 탐구하는 과정상으로서의 형이상학적인 도구이다. 철학은 모든 사상의 근거를 제공해준 시초요 어머니요 아버지, 신적인 존재다. 철학이라는 모체에서 잉태 된 모든 학문들은 각자가 장성하여 우리 주변을 둘러싸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현재 세상은 본말이 전도되어 서로 경쟁하는 총체적인 모순으로 치닫고 있다. 마치 인류라는 범주 안에서 흑인과 백인, 황인종은 각자 피부색이 다르니 서로 다른 존재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

무슨 학과다’, 혹은 무슨 성향이다등의 변명을 통해 스스로를 제한하고 있다. 문과생이면 수학과 과학을 못하고 이과생이면 철학과 경제를 못하는 것이 당연시 여겨지는 세상이다. 수학과 과학, 철학과 경제는 모두 같은 뿌리를 지닌 학문인데도 말이다. ‘나는 좌파 성향이기 때문에 이명박과 박근혜가 싫다는 말 역시 무지의 소치이다. 이 외에도 우리 주변에 한 가지만 고집하는 데에서 파생되는 문제점은 이루 말 할 수 없이 많다. 문제는 이러한 편협한 관점에서 우리의 불행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버거운 이유는 오직 하나의 길만을 염두해두고 살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의 방식과 길만 존재한다는 생각으로 모든 것에 집중하기에 스트레스를 받고 마음이 조급해진다. 쉽게 얘기해서 문과생이라 취업이 안되는 것이 아니라 문과생의 길만을 고집해서 취업이 안되는 것이며, 좌성향이라 정부여당이 싫은 게 아니라 좌편향적인 생각만을 고집해서 정부여당이 꼴보기 싫은 것이다. 오늘날 우리 모두는 어떤 면에서든 편협한 관점에 놓여있다. 이런 우리들에게 좌절과 절망이 엄습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2500여년 전 부처가 한쪽에 치우치지 말고 그 것을 초월하는 중도를 유지하라고 이야기 한 것은 이 때문이리라.

 

세계는 상인가 무상인가, 상이며 무상인가, 상도 아니고 무상도 아닌가.

세계는 유한인가 무한인가 유한이며 무한인가, 유한도 아니고 무한도 아닌가.

정신과 육체는 하나인가 둘인가

여래는 사후에 유인가 무인가, 유이며 무인가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가

- 잡아함

 

이런 문제에 대해 부처는 답변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이는 무와 유 두 극단을 초월해있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편협한 관점을 피하는 것은 물론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라는 양비론도 지양해야하며 그저 그 사안을 있는 대로 바라보고 나아가 그것과 주변의 현실과의 상호작용을 정확히 파악해야한다는 것이 부처의 이야기다.

연기설 역시 이 주장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다. 세상 모든 것은 하나의 특정 카테고리에 공유되지 않는다. 우리 자신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현상세계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위와 같은 화두를 안고 이 세상을 관찰해보자.

 

2. 본론

2.1 화엄사상과 뒤르켐

화엄(華嚴)사상에서는 세계를 이원적 대립이 없는 하나의 조화로운 세계로 본다. 화엄은 근본적으로 사물과 사물 사이에 분절과 위계질서가 전혀 없는 평등주의적 세계관”(길희성, 1997)을 취한다.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은 상호 의존 관계 속에서 각자의 이유와 권리를 갖고 있다. 아무리 하찮은 존재라도 우주의 중심으로서 주인이 되고 다른 모든 것들은 그것의 성립을 도와주는 하인이 된다. 동시에 그 주인은 또 다른 요소를 지탱해주는 하인이 된다. 따라서 세상은 모든 것이 상호 연계적인 관계로 얽혀 조화로움을 이루고 있다. 즉 화엄적 세계관은 개체가 전체를 위해, 전체가 개체를 위해 존재하는 유기체적 세계관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각 개체에는 우월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가 평등한 존재란 말이다. 모든 것은 고정적인 역할과 지위에 머물러있지 않고 항상 유동적이다. 모두가 중심이고 모두가 주변부이다.

이러한 화엄의 세계관은 현대에서도 특이한 방식으로 현실화 되고 있다. ‘지구촌이라는 단어로 표현되듯 전 세계는 점점 하나가 되어간다. 유럽연합, 아세안, 북대서양조약기구 등 전세계의 나라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주변국들과 협력하고 있고 나아가 전 세계는 UN이라는 국제기구 아래 각 나라들의 장벽을 허물고 있다. WTO(세계무역기구)를 통해 국가간 자유로운 무역이 가능해졌으며 세계의 시장은 하나로 묶이고 있다. 또한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으로 전세계의 정보와 지식은 공유되고 있으며 교통수단의 발달로 인해 각국간 자유로운 왕래가 가능해졌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해 이미 지구촌이 되어버린 세계는 생각과 정보, 가치와 생활양식들의 공유를 통해 장벽이 없는 하나의 세계문화를 형성해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현실세계는 화엄적 세계관처럼 각자 모두가 동등한 세상은 아니다. 서로 연대하고 있되 주종관계가 형성되어 있으며 엄연히 갑과 을의 위계가 존재한다. 이러한 문제는 근원은 바로 인간의 탐욕이다. 생태계에는 모든 것이 서로 거미줄처럼 완벽하게 얽혀 돌아가지만 오직 인간만이 탐욕으로 이러한 조화를 깨뜨린다. 사회는 자연과는 달리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에 의해 왜곡된다. 집단적이든 개인적이든 역사적으로 인류는 항상 지배와 복종, 억압과 착취의 관계를 유지해왔다. 이는 시대가 흐름에 따라 점점 심화되고 있다. 세상의 부는 소수에게로 집중되고 있는 반면 못사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더 못살게 된다. 지배계급의 피지배계급 착취는 과거와 별반 다르지 않다. 오히려 상대적인 개념인 행복의 특성상 삶의 만족도는 점점 떨어진다. 자살률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고 자기 입으로 자기가 행복하다고 이야기 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또한 계층화와 집단화가 심화됨에 따라 사회의 분화는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우리 사회의 1인가구 숫자가 점점 늘어나는 것은 그만큼 사회로부터 고립되어가는 구성원들이 많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구성원들 간 협동, 단결은 더욱 찾아보기 힘들다.

이는 기계적 연대와 유기적 연대를 이야기 한 뒤르켐의 이론과 맞닿아 있다. “뒤르켐은 전통과 근대를 구분하는 사회적 특성의 차이를 사회적 연대의 유형에서 발견하였다”(박선웅, 2013) 과거 사회 구성원들은 서로가 공유하는 가치와 규범에 의해 연대했다. 이 때 관찰되는 기계적 연대는 상대적으로 단순한 사회구조를 지니며 낮은 노동 분업 상태에서 나타난다. 사회 대부분의 구성원들이 유사한 직종에 종사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공통의 경험과 믿음을 바탕으로 서로 이어져 있다. 기계적 연대의 핵심은 동일한 그룹 안에서 개인들은 서로 유사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근대사회로 넘어오면서 인구의 이동, 분업의 발달, 일의 전문화가 발생하면서 다양성과 이질성이 촉진되었고 한 사회의 공동체는 저마다 다른 배경과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로 구성되기에 이른다. 이에 뒤르켐은 과거의 기계적 연대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것이며 그렇다고 무질서와 혼돈, 해체의 길을 걷지도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질성과 다양성이 내포된 사회를 묶을 새로운 질서, 즉 유기적 연대가 탄생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사회적 연대의 구분은 구성원 각자의 기능의 연관관계에 따르는 것이다.

유기적 연대에는 두 불안정성이 내포되어 있다. 첫째는 사회의 다양성이 증대되면서 사회는 혼란에 빠질 것이라는 주장이다. 세계는 빠른 속도로 근대화가 이루어지고 있고 이 속도가 빠르면 빠를수록 규범과 도덕 정립이 힘들어질 것이고, 결국 사회혼란 즉 아노미 현상을 초래할 것이라는 이야기다. 둘째는 유기적 연대는 기능적, 업무적 관계이기 때문에 가변성이 높고 일시적이며 불안정하다는 것이다. 뒤르켐은 이를 극복하고 근대의 기계적 연대처럼 견고한 연대를 이루는 방법을 궁리했고, 이를 위해 원시종교를 연구하기에 이른다.

그 결과 뒤르켐은 모든 종교는 대상을 성스러운 것과 속스러운 것으로 구분한다는 것과, 의례(종교의식)을 통해 내부의 결속을 강화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먼저 성과 속의 구분부터 보자. 그에 따르면 성스러운 것은 그 자체의 속성 때문에 성스러운 것이 아니다. 성과 속의 구분은 대상의 본질과는 관계없이 자의적이며 대상의 성스러움을 규정하는 것은 속과의 관계에서 비롯된다. 또한 성과 속은 서로 이질적이고 적재적이며 결코 섞일 수 없으며 만에 하나 섞일 경우 속이 성을 오염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화엄의 세계관에서 역시 부분들에게 어떤 고정된 위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부분들의 위치와 역할은 항시 유동적”(길희성, 1997)이다.

원시종교 연구의 두 번 째 결과물은 의례이다. 의례는 단순히 신앙을 밖으로 표현해내는 게 아니라 신앙을 형성하고 강화하여 재생산하는 역할을 한다. 종교의식을 통해 반복적으로 믿음을 강화하고 이는 서로의 유대감과 정체성을 돈독히 하는 역할을 한다.

화엄적 세계관을 해석할 때 유의해야할 점은 자칫 주어진 세계를 완벽한 세계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세계의 불평등과 빈부격차를 포함한 여러 문제점 역시 유기적 흐름의 일부이고 조화로운 세계에 포함된 것이라고 착각할 수 있다. 또한 각자는 서로를 위해 존재하며 하나가 모두를 위해 존재하고 모두는 부분을 위해 존재한다는 부분에서 전체주의적 사고를 정당화 하는 쪽으로 흐를 수 있다.

화엄사상은 사회를 부분들이 막힘없이 조화로운 이상세계로 보는 반면 우리의 현실감각은 사회란 갈등과 대립의 세계임을 말해주고 있다.

 

 

2.2 과학, 기술, 인간, 종교

흔히 현대사회를 과학기술 중심사회라고 한다. 과학기술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의 사고방식이나 생활양식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에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는 시간과 장소를 꼼꼼히 챙겨야 했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 없이 손가락만 몇 번 움직이면 된다. 당장 컴퓨터가 사라진다면 수많은 금융, 경제 등의 분야에서의 전산 업무는 중단되고 세상은 혼란에 빠진다. 이 외에도 수많은 분야에서 대부분 적용 할 수 있고 우리 생활 전반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 과학기술이다. 각종 가전제품과 가구, 신발, 종이와 펜, 전자제품 등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은 물론 상하수도 시설, 전기설비, 건축물, 도로시설, 교통시설 등 눈에 잘 띄지 않는 것들에 이르기까지 과학기술의 성과물이 아닌 것을 찾기 힘들다.

각설하고 종교는 과학기술의 발달에 큰 기여를 했다는 것이다. 잘 나가다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싶을 수도 있다. 과학기술은 오늘날의 사회에서 거의 절대적인 신뢰와 지지를 받고 있는 반면 종교는 심하게 표현하면 뜬구름 잡는 소리로 여겨진다.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종교가 어떻게 세상을 판단하는 도구 중 가장 객관적인 잣대로 받아들여지는 과학의 발전에 기여를 했단 말인가?

그러나 베버와 로버트 머튼이라는 두 학자의 입장이 개입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먼저 베버는 그의 저서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정신에서 칼뱅주의를 통해 자본주의와 종교 간의 연결고리를 찾았다. 칼뱅의 예정설에 따르면 인간 각자의 운명은 신에 의해 이미 정해져 있어서 인간의 노력으로 바꿀 수 없다. 칼뱅주의자들은 이에 대한 탈출구를 현실에서 찾고자 했다. 즉 내가 신에게 선택받았다는 사실을 현세적 성공을 통해 증명해 보이는 것이었다. ‘힘써 일하고 벌어들인 돈을 낭비하지 않고 금욕적이고 청빈한 생활에 힘쓸 것이라는 기독교의 윤리는 축적된 자본의 투자를 통한 자본의 재축적에 힘쓸 것이라는 자본주의 정신과 서로 맞물리게 된다.

미국의 사회학자 로버트 머튼은 자신의 박사논문에서 바로 이 해석법을 사용하여 17세기 영국의 과학자사회를 분석했다. 17세기를 대표하는 위대한 과학자이자 물리학자인 아이작 뉴턴은 뉴턴이 과학에 대한 논문을 100편 발표했다면 종교에 대한 논문은 1000편을 발표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뉴턴은 이 세계는 신이 창조했고 세계는 신이 설계한대로 움직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신이 설계한 세계의 체계를 밝혀내는 것이 바로 과학자들의 소명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소속돼있던 영국 과학자들의 모임인 왕립학회 구성원의 3분의 2가 청교도인들 이었다는 사실은 과학자들이 신에 대한 믿음을 간과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로버트 머튼은 그는 자본주의 발전에 기독교가 기여했듯, 과학의 발전에도 종교(청교도주의)가 기여했다는 결론을 내놓는다. 과학 활동은 신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 아니라 신이 자연안에 새겨놓은 비밀을 밝혀내서 신의 영광을 드높이는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강윤재, 2011)

현대의 종교는 과학을 배척하지 않고 오히려 수용하는 쪽을 택했다. 가령 로마의 바티칸 교황청에서는 진화론과 창조론의 중간입장에서 진화론적 창조론으로서 다윈의 진화론을 수용한다. ‘인간 진화 과정의 체계를 신께서 설계하셨다라는 식으로 말이다.

서론에서 언급했듯 역시 모든 학문은 결국 하나로 귀결된다. 과학과 종교는 물론이고 자연과 과학도 마찬가지다. 뒷페이지의 아름다운 그림들로 시선을 옮겨보자.

 

 

 

 

 

 

 

 

 

 

 

 

 

 

 

 

 

 

 

 

 

 

 

 

 

 

 

 

 

 

 

 

 

 

 

 

<그림 1> <그림2>

 

<그림3> <그림4>

<그림5> <그림6>

-<그림 1> 나비

<그림 2>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Polis)

<그림 3> 소라 게

<그림 4> 고대 아테네 신전

- 출처 : Raymond L. Bisplinghoff, Samuel Colman. Harmonic Proportion And Form In Nature Art And Architecture(2003)

<그림 5> 시계의 내부구조. 출처: ‘Patek Phillippe’

<그림 6> 우주선 설계도의 일부.

 

이 얼마나 위대하고 경이로운 사진과 그림들인가? 우리는 이 사진을 보고 자연의 아름다움에 경탄을 금치 못하고 과학, 기술의 정교함에 혀를 내두른다. 아름다움과 정교함의 묘한 조화가 위 사진 속에 그대로 나타난다. 겉으로는 달라보이고 그것이 형성되고 이루어지는 과정 역시 차이가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모두 같은 원리 하에 구성되어있다. 자연을 의미하는 나비와 소라껍질을 묘사한 <그림1><그림3>에서 보이는 기하학적 문양은,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를 촬영한<그림2>와 신을 모시는 전당을 그린 <그림4>와 같은 고대 건축물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그림5>에서 볼 수 있듯 단 0.1mm의 오차만 있어도 엄청난 시간의 간극이 벌어지는 시계라는 사물에서도 다른 그림들과 같은 본질을 찾아볼 수 있다. <그림 6>을 보면 현대 과학의 집약체이자 기술의 최첨단을 뽐내는 우주선 역시 그 궤를 같이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 사진들은 결국 가장 자연의 극치인 나비와 과학기술의 최첨단인 우주선의 본질은 동일이 동일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도시와 과학, 기술 속에도 생물이 존재하고 자연법칙들이 운행되며 그 속에 만물의 일부가 살아 숨쉬고 삶을 영위한다. 이들 모두는 서로 견제와 균형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철학적으로 사색되어지는 절대적인 것을 기하학적인 표현으로 다루고, 그것을 공학적인 표현들로 응용하는 과정에서 현대 공학적 사고관이 탄생했다. 세상 만물은 상호작용을 반복하고 인연을 맺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 아무런 의미 없이 존재하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시선을 하나의 대상에 머물게 해선 안된다.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 우리 주변을 둘러보도록 해야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사실 대부분의 현대 과학기술은 전쟁이나 군사적 목적에 의해 탄생됐다. 최초의 컴퓨터인 에니악(ANIAC)은 미사일 목표거리의 빠르고 정확한 계산을 위해 발명됐고 세계최초로 휴대전화를 개발한 미국의 모토로라는 2차 대전 당시 무전기를 만들던 회사였다. 우주과학의 시초인 로켓은 말할 것도 없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고엽제는 생명과학의 대표주자인 GMO(유전자변형)산업에서 선두를 달리는 기업에 의해 발명되었다. 과거에 생명을 위협하기 위해 출발한 발명이 현재는 우리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다. 스마트폰은 단편적으로 보면 서로와 서로를 잇는 매개체 역할을 하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친구와 연인을 만나도 서로의 눈동자보다는 스마트폰에 얼굴을 파묻는다. 이에 따라 대인기피증, 우울증과 같은 정신질환이 급증했다. 과학기술은 우리 삶을 윤택하게 하고 편리한 생활을 가져다 줬지만 역설적으로 우리를 단절시키고 불편함을 안겨주기도 했다.

애초에 살상을 목적으로 탄생한 과학기술이 그 칼날을 다시 우리에게 들이밀고 있는 것이다. 세상은 점점 더 편해지지만 진실은 점점 더 불편해진다. 이 역시 세상을 우리 마음대로 구분 짓고 분류한 것 때문에 발생한 문제다. 전술했듯 자연상태의 인간은 자연과 어울리고 그 속에 살며 모든 것은 조화로웠다. 하지만 본래 우리와 하나였던 자연을 인간의 편의를 개발과 발전이란 이름 아래 자연을 파괴하기 시작했고 우리의 비극은 시작되었다. 문제의 근원은 바로 인간의 탐욕이다. 생태계에는 모든 것이 서로 거미줄처럼 완벽하게 얽혀 돌아가지만 오직 인간만이 탐욕으로 이러한 조화를 깨뜨린다.

토마스쿤에 의하면 과학기술은 축적적으로가 아닌 혁명적으로 발전했다. 축적적이란 것은 한번 지식이라고 인정받은 것은 영원히 지식의 지위를 박탈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이 지식들이 쌓여발전하는 것을 축적적 발전이라 한다. 하지만 고전역학이 뒤집히고 양자역학의 체계가 정립되고, 천동설이 가고 지동설의 시대가 도래한것 처럼 과학적 지식은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다. 즉 과거과학과 현대과학은 같은 기준에서 비교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때문에 과거과학에서 현대과학으로의 발전은 연속적이지 못하독 불연속적, 즉 혁명적이라는 것이 토마스 쿤의 주장이다. 천동설에서 규정한 중요한 문제들은 지동설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또한 천동설과 지동설의 문제 해결법이나 해결 결과를 평가하는 방법도 상이하다. 이런 점에서 천동설, 지동설과 관련된 과학적 틀은 공약불가능한 것이라고 쿤은 설명한다. 그리고 토마스쿤은 여기서 이 과학적틀을 패러다임이라 이름붙였다.

과학혁명은 이 패러다임의 변화를 뜻한다. 수많은 패러다임 중 하나가 주도권을 잡고 많은 과학자가 그 패러다임을 공유하고 그 아래에서 연구하는 시기를 정상과학이라 한다. 그러나 어떤 지배적인 패러다임도 영원할 순 없다. 현재의 패러다임 내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가 생기고 그 문제의 수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절대로 풀리지 않는 문제가 발생하면 그 패러다임은 위기에 봉착한다. 이 때 그 위기를 극복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하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이 그 부분에 대해서만 예외를 두고 조금씩 고쳐나가는 수 밖에 없다. 이를 논리 실증주의라 한다. 그리고 만약 이 위기를 극복할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한다면 기존의 패러다임의 위기는 심화된다. 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패러다임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가령 지동설 또한 천동설만큼 문제가 많았다(지구가 자전한다면 왜 우리는 어지럽지 않은가? 왜 지구 밖으로 튕겨나가지 않는가? 등과 같은. 이는 후에 갈릴레오에 의해 해결). 하지만 새로운 패러다임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후속세대가 등장하고 점점 다수를 차지하면 패러다임의 전환, 즉 과학혁명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쿤의 비판적 시각은 과학을 까내리기 위해서가 아닌 실체를 검증하기 위함임을 알아야한다. 과학은 과학 그 자체만으로 발전하지 않고 사회, 정치적 이해관계에 영향을 받는다. 과학이란게 항상 옳은 것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니 항상 경계하고 의심해야 한다는 것이 토마스 쿤의 주장의 요지이다. 이 세상에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

 

2.3 이념과 사상의 구분, 대립

지구의 지각이 현재의 상태를 띄게 된 45억 년 전 판게아때부터 오랜 기간 동안 우리의 땅은 하나였다. 하지만 불과 60여 년 전 전쟁의 여파로 한반도는 남한과 북한으로 나뉘었으며 한민족이라는 같은 핏줄은 한국인과 북한인으로 갈렸다. 게다가 이마저도 남한은 전라도와 경상도, 좌파와 우파로 대변되는 두 이념의 갈등이 팽배해있다. 뿐만 아니라 그 이념의 내부에서도 계파가 나뉘어 있다. 이쯤 되면 이 나라가 존속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경이로울 지경이다.

201496, 광화문에서 인상적인 집회가 열렸다. 광화문을 점거하고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단식투쟁에 저항하는 폭식투쟁집회가 열린 것이다. 그간 세월호 특별법 제정에 대한 찬성 여론과 유가족을 옹호하는 이야기는 많았다. 이들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윤리적으로 허용되지 않았으며 인간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비난을 면치 못하는 행동이었다. 참사가 발생한 416일 이후 대한민국에서 세월호는 거의 종교에 가까운 현상이었다. 마치 종교집단 내에서 예수, 부처 등을 비판할 경우 집단내에서 완전히 사장되어버리는 사실과 같았다. 좌익세력들은 기소독점주의이라는 대한민국 법에 명시되어 있는 사안을 무시하고 수사권, 기소권을 달라고 투정을 부렸다. 모두에게 열려있는 공간인 광화문을 무단으로 점거하고 농성을 벌였고 이들을 제지하는 경찰은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아니 폭력경찰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쓸까봐 눈앞에서 불법을 저지르고 있는 이들을 방관할 뿐이었다. 2014416일 이후 대한민국에서 세월호는 공권력도 어찌할 수 없는 거의 종교에 가까운 현상이었다.

젊은이들이 진보적인 사상과 사고방식을 가지는 것은 역사적, 사회적으로 심지어는 도덕적으로도 당연한 현상으로 여겨졌다. 2차 대전 당시 처칠은 20대에 진보가 아니면 심장이 없는 것이라 했고, 칼 포퍼는 젊어서 맑스에 빠지지 않으면 바보라는 말을 남겼을 정도로 청년이라면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에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고 개선을 요구하며 현실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동안의 사회를 지배하던 통념이었다. 과거 한국 사회에서는 이 사상들이 전파되고 실현된 사례가 많다. 기득권의 부정부패에 분개한 청년들의 혁명인 4.19 혁명이 그랬고 독재정권의 부당함에 치를 떨었던 시민들의 분노가 표출된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그랬다. 그러나 2014년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이러한 통념에 점점 균열이 발생하고 있다. 진보적이길 거부하고 심지어는 스스로 보수를 자처하는 청년들이 적지 않다.

젊은이들은 더 이상 부자들과 기득권층을 혐오하는 세력들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젊은 보수 세력은 그 세력을 확장해 나가고 있다. 사회에 대한 불만과 개선을 요구해야 하는 젊은이들은 어째서 사회 변화보다는 유지에 힘쓰는, 소위 말하는 기득권층으로 일컬어지는 세력을 지지하는 것일까?

그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 조국에 대한 애국심과 좌파세력들에 대한 반감에서 찾을 수 있다. 젊은 보수들은 기본적으로 한국전쟁 이후 남은 쑥대밭에서 불과 50년 만에 세계 10위권의 국가경쟁력을 지니게 된 대한민국과 그것을 가능케 한 기성세대를 존중하고 우러러본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윗세대들의 피와 땀이 서린 노력이 있었기에 존재할 수 있었다는 점을 결코 잊어선 안 된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 믿음은 우리 부모님세대, 더 정확하게는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들께서 일군 이 조국을 하루아침에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리려는 세력들에 대한 분노로 이어진다.

그리고 광화문의 폭식투쟁은 이 분노가 총체적으로 발현된 사회적 현상이었다. 폭식 투쟁은 조국을 부정하는 세력들을 더 이상은 두고 볼 수 없다는 보수청년들에 의해 단행되었다. 그 동안은 인터넷 상에서만 조용히 활동했을 뿐 현실세계에서는 딱히 목소리를 내지 않았던 이들이 거리로 뛰쳐나온 것이다. 이들은 광화문 광장 한켠에서 세월호 특별법 제정에 반대하는 집회를 벌였다. 세월호 특별법은 대한민국의 사법체계를 부정하는 것이며 어린 아이의 땡깡과도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특별법 제정에 찬성하는 세력을 비판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시민의 쉼터인 광화문을 우리 모두에게 돌려줄 것을 요구했다. 그들은 단식 농성중인 집단들 앞에 앉아 피자, 햄버거 등을 나눠먹는 폭식퍼포먼스를 선보였다. 그 과정에서 세월호 유가족들과의 물리적 충돌이 있었고 이에 경찰이 개입되기도 했다. 이들의 집회와 퍼포먼스는 인터넷 기사,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해 일파만파 퍼져갔고 소식을 접한 보수 성향의 네티즌들은 속속 광화문으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젊은 보수우파들의 모임인 자유대학생연합까지 가세해 그 세력은 점점 커졌고, 저녁 6시를 기해서는 규모가 수백 명에 이르렀다. 세력이 커지자 목소리도 덩달아 커졌다. 다수의 대중들로 변모한 그들은 더 이상 음지에 암약하는 소수의 패배자들이 아니었다. 자신감을 얻은 그들은 급기야 진보세력의 상징적 아이콘인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을 향해 상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수백명이 모여 한 목소리로 김대중 개xx’, ‘노무현 씨xx’이라는 구호를 외치는 그 모습은 광기에 가까웠다. 20대 청년들이 구성원들의 대부분이었던 그들은 피끓는 청춘을 제어하지 못하고 금방이라도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달려들 기세였다. 이 쯤 되자 그들을 지지하던 필자도 상황이 뭔가 잘 못 돌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자신의 조그만 목소리를 세상에 알리고자 했던 소수의 보수세력들이 규모가 커지자 겉잡을 수 없는 광기의 집단으로 변모한 것이다. “광기 속에서 포효하는 동물성은 인간에게서 인간성을 앗아 갔다. 이는 그 사람을 또 다른 힘의 영역으로 떠넘겨 버리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원래 본성을 되찾아 주기 위함이었다.”(Foucault 1999: 74)라는 푸코의 이야기처럼 그들의 광기는 뼛속 깊이 자리 잡은 좌익세력들에 대한 불만의 발로였고 그들로 하여금 인간이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게 만들었다. 사실상 사이비 종교집단의 집회와 다를 바 없었다.

이 쯤 되자 청년들이 보수 세력이 되어 광기를 표출하기까지의 과정이 궁금했다. 대체 어떤 매커니즘에 의해 오늘날의 젊은이들이 강력한 이념적 성향을 띄게 된 것이며, 눈 앞에 표출되는 사이비종교에 가까운 집단을 이루게 된 것일까?

사실 이는 당연시 여겨지는 것을 당연하지 않게 바라보는 관점에서 시작했다. 전술했듯 그동안은 청년=진보라는 것이 사실상 공식과도 같았다. 젊은 보수세력들은 이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탄생했다. 그것은 언제부턴가 소위 말하는 한국의 좌파세력이 진실 된 좌파가 아니라는 깨달음에 근간을 두고 있다. 한국의 좌파는 모든 걸 정치적으로 해석하고 이용하여 일만 터졌다하면 국가를 전복시키기라도 할 기세로 정부를 물어뜯었다. 2008년 이명박 정권의 미국 소 수입을 반대하며 정권 퇴진을 주장했던 촛불시위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신문, 방송 등의 언론매체에서는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보도하기도 하며 인터넷에는 터무니없는 유언비어가 여론을 들끓게 만들었다. 어처구니없게도 그 말도 안 되는 선동에 대중들은 손쉽게 넘어가고 말았다. 소수의 대중들이 이에 의문을 품기도 했으나 이들은 곧 한나라당 알바혹은 수구꼴통이라고 매도되어 입이 틀어 막혔다. 그러나 결국 세월이 흘러 광우병 사태는 모두 거짓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젊은이들은 무분별한 선동의 위험성과 무책임함을 자각한다. 실제로 젊은 보수 세력들 가운데 당시 촛불집회에 참가했던 이들이 상당수이다. 이는 청년보수세력 형성에 하나의 큰 기제로 작용했다. 젊은이들은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고 문제가 되는 사안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자신만의 철학을 확립해 나간다.

이는 광우병 사태 뿐 아니라 지난 서울시장 선거에서 현 서울시장 박원순의 농약급식 사태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만약 현 서울 시장이 박원순이 아닌 보수진영의 인물이었다면 농약급식 반대, 서울시장 퇴진 촛불집회가 벌어졌을 것은 불 보듯 뻔하다. 그러나 현재 농약급식을 가지고 들고 일어나는 집단은 찾아볼 수 없다. 진보진영은 그 어떤 비극적인 사태에도 자신의 편이라면 눈감고 묵인한다. 모든 좌파를 싸잡아 비난하고자 하는 의도는 추호도 없으나, ‘한명의 간첩이 100명의 종북주의자와 10,000명의 좌파를 만든다는 유명한 표어는 적어도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인 우리나라에서는 무시해서는 안 될, 충분히 실현 가능성 있는 이야기이다. 이미 우리나라 급진좌파들은 더 이상 좌파가 아니다.

이러한 청년 보수의 확대 현상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청년보수들의 확장의 근간은 어찌 보면 철저한 복종일 수도 있다. 기성세대와 기득권층에 한없이 복종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자신들을 지배해주길 바라는 노예근성이라는 것이다. 이는 대중들이 권력에 자발적으로 복종한다는 측면에서 안토니오 그람시의 헤게모니(hegemony)’라는 개념과 닮았다.

그람시는 대중들이 1920년대 무솔리니의 파시즘에 열광하는 현상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그는 이성적이라기보다는 광신적이며, 민주적이라기보다는 독단적인 파시즘에 이태리 국민들이 왜 그렇게 열광한 것인지 궁금해했다. 그리고 이 의문에 대해 대중들의 자발적 동의’, 즉 헤게모니가 강력하게 작용했다는 답을 얻었다.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한 사회에서 사회혁명이 일어난다고 주장했던 마르크스의 이론에 따르면 사회혁명은 유럽에서 먼저 일어났어야 했으나 오히려 사회주의 혁명은 소련에서 발생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 역시 바로 파시즘 헤게모니에 의한 결과라고 이야기한다. 마르크스가 이야기 한 상부구조의 이데올로기는 허위의식에 기반한 가짜였던 반면 그람시의 이데올로기는 대중의 자발적 동의를 얻은 진짜였다. “상이한 목표를 가진 수많은 상반된 의지들이 하나의 동일하고 공통의 세계관의 기반 위에서 동일한 목표를 위해 서로 결합되는 것은 곧 문화적-사회적 통일에 의해서이다.”(전태국, 2013) 이탈리아의 기득권층과 피지배계층은 정신적, 문화적으로 공유하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한 서구사회에서는 구성원들의 사익 추구와 목표, 가치관의 다양성이 컸기 때문에 대중의 자발적 동의를 이끌어내기 힘들었으며 따라서 사회혁명을 이루기 어려웠던 것이다. 물론 젊은 보수세력들이 사회혁명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그저 새누리당 알바일베충으로 매도되는 상황에서 자신들을 이끌어주고 지배해줄 기제가 필요했던 것일 뿐이다.

독일의 사회학자 에리히 프롬은 파시즘 중에서도 가장 악질이자 가장 반동적이며 가장 야수적인 독일의 파시즘, 즉 나치즘을 분석한다. 그는 자신의 저서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통해 나치즘이라는 인류 최악의 사상체계가 어떻게 탄생할 수 있었는지를 분석한다. 이성적 사유를 강조하며 인간의 인식 구조를 논했던 헤겔과 칸트의 철학을 배운 국민들이자 슈베르트와 슈만의 차분한 음악을 듣고 자라난 독일 국민들이, 비이성적이고 폭력적인 나치즘에 열광한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독일은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정치, 경제적 혼란에 빠져있었으며 극심한 이념의 갈등이 팽배해 있던 상황이었다. 이념의 갈등이 많았다는 것은 민주적인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오히려 독일 국민들은 히틀러라는 비민주적 괴물에게 열광했다. 에리히 프롬은 이것이 경제적 의미인지 아니면 인간 본연에 내재해있는 특정한 속성 때문인지를 고민하고 분석했다. 그리고 그는 프로이트 등의 심리학자들의 이론을 통해 독일인의 나치추종 현상을 바라보며 인간에게는 노예근성이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인간 본연에는 자유보다는 오히려 노예가 되길 원하는 저열한 심리적 특성이 내재해 있으며, 누구나 개인이 홀로 서는 것 보다는 조직 속에 포함되어 함께하는 데서 더 큰 안정감을 얻는다고 이야기한다. “개인에게 안전을 주었던 원초적 유대가 일단 끊어지면, 그리고 개인이 완전히 독립된 존재로서 외부 세계와 직면하면, 그는 참을 수 없이 무력하고 고독한 상태를 극복”(에리히프롬(Erich Fromm [1941](2013) : 149)해야한다. 따라서 개인은 자신이 속해있는 조직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때로는 사회적 관습에 굴복하여 자신의 행동을 제약하는 경우가 있다. “사실 인간이 결단을 내리는 현상을 관찰해보면, 실제로는 관습이나 의무나 단순한 압박에 굴복하는 것인데도 그들 자신의 결단인 것처럼 잘못 생각 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1941]2013 : 209)

인류는 역사적으로 자유, 평등, 평화를 기조로 발발한 프랑스 혁명과 독일, 네덜란드, 스위스에서 발생한 종교혁명과 같은 정치적, 종교적 굴레로부터의 자유 혹은 전쟁으로부터의 자유 등 끊임없이 ‘~로부터의 자유를 쟁취해왔다. 프롬은 인간이 수백 년 간 그동안 자신을 옭아매고 압박했던 무언가로부터의 자유를 충분히 쟁취했고 이제 그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꾀한다고 주장한다. 즉 개인의 고립이 아닌 전체로의(toward) 도피를 추구하는 것이다. 독일 국민들에게는 그 도피처가 바로 히틀러였다고 에리히 프롬은 이야기한다.

히틀러의 나치즘에 열광했던 독일국민들과 같이 한국의 보수 세력 역시 무언가로부터의 자유가 아닌 그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추구한다. 50년 전 이룬 일본으로부터의 독립과 4.19 혁명, 5.18민주화 운동 등을 통해 무언가로부터의 자유는 일구었지만 지금은 더 이상 무언가로부터 자유롭고 싶어 하지 않는다. 오히려 조국을 위협하고 있는 북쪽의 돼지 한 마리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줄 수 있는 기득권과 정권에 자발적으로 복종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가능케 해주는 세력은 좌파가 아닌 우파세력임을 너무도 잘고 있기에 국가를 전복시키려는 종북세력들에 대해 극심한 반감을 가지는 것이다. 또한 어찌 보면 젊은 보수 세력들은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에 반한다는 점에서 역시 파시즘, 나치즘과 그 궤를 같이 한다.

혹자는 젊은 보수를 향해 나라를 이끌어갈 젊은이들이 발전적이고 진보적인 사고방식을 가지지 않는다며 비난할 수도 있다. 또한 벌써부터 그렇게 굴종하고 순응적이어서 앞으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것이냐며 안타까워할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가치관 차이일 뿐 타인이 개입해서는 안 되는 불가침의 영역이다.

또한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사실은 대한민국은 분단국가라는 것이다. 위쪽에는 북한이라는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족속들이 언제 침략해올지 모르는 매우 위험한 상황이다. 북괴는 수십 년간 군사도발을 멈추지 않고 있으며 최근까지 위협수위를 낮추지 않고 있다. 대외적으로는 군사도발, 대내적으로는 간첩활동을 전개해가며 호시탐탐 우리의 금수강산과 찬란한 결과물들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결국 한 민족끼리 총구를 겨누는 이러한 비극적인 상황 역시 하나로 귀결되는 인간의 이념을 양분하는 과정에서 태어났다.

 

3. 나가며

 

세상을 분별하는 것은 대승불교의 교리를 찬술한 대승기신론에서는 인간의 두가지 그릇된 견해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나는 자아를 고정적으로 보는 견해(人我見)이고, 또 하나는 현상 세계는 실체적인 요소가 모여 이루어져 있다고 하는 견해(法我見)”(이평래, 2014)이다. 태어남과 죽음의 고뇌가 실재한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모두 허상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지금 이를 잘못됐다고 비난하며 우리 서로를 구분짓지 말고 행복합시다라는 헛소리를 하는 건 아니다. 분별심에 빠져있는 우리를 한번 되돌아보자는 것이다. 수천 년 전 부처님은 중도中道의 개념을 제시하며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 삶을 강조하셨다. 과학기술의 과도기에 서있는 바로 지금이 중도가 가장 절실할 때 이다. 맨날 보는 스마트폰 지겹지도 않나? 거기서 밥이 나오나 돈이 나오나. 가끔은 휴대폰을 손에서 놓고 내 앞에 앉아있는 친구, 동료의 얼굴을 한 번씩 돌아보는 것이 좋다. 물론 정신건강에 썩 좋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핸드폰 쳐다보면서 전자파 쬐는 것보단 훨씬 나을 것이다.

 

 

 

 

 

 

<참고 문헌>

에리히 프롬(Erich Fromm). 2013. 자유로부터의 도피김석희 역; 휴머니스트.

박선웅, 최종렬 외 2. 2013. 문화사회학살림.

사라 밀스(Sara Mills). 2008. 현재의 역사가 미셸 푸코임경규 역; 엘피.

교양교재편찬위원회. 2009. 불교학 개론동국대학교 출판부.

송석구, 동국대학교 개교 90주년기념 세계불교학술회의준비위원회. 1996. 21세기 문명과 불교송석구 발행; 동국대학교 출판부.

이평래. 2014. 이평래 교수의 대승기신론 강설민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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