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은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지만, 미술관은 오래 보면 지겹다. 한 세 시간 구경하니 그 그림이 그 그림 같다. 아까 본 작품이 여기 또 있고, 아까 왔던 방에 또 온다. 슬슬 떠날 시간이 됐나보다. 추적추적 빗물이 뿌려지기 시작한다.
미술관 문을 나서 도착한 곳은 피의 구원 사원이다. 이름 한번 살벌하다. 직역하면 피흘리신 구세주의 교회란 뜻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동방정교회(러시아제국 국교) 기념관이다.
입장 티켓. 한화 5000원 정도다.
내부는 이런 모습이다. 성경의 주요 장면들이 벽화로 장식되어 있다. 그림 한 점 한 점이 예술적 가치를 지녔다. 저걸 그리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전부터 성경을 꼭 한번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해왔다. 믿음이나 신앙과는 별개로 하나의 문학작품을 접하는 마음가짐으로 말이다. 대체 이 양반이 무슨 얘길 했길래 전쟁이 나고 나라가 흥망했을까. 위대한 예술가들은 여기서 어떤 영감을 받았을까. 대학에서 종교를 전공했기에 불교 힌두교 이슬람 기독교 천주교 등에 대한 배경지식 정도는 있다. 불교경전들은 물론이고 나름 코란, 베다, 사서삼경도 읽었다. 근데 유독 이 성경만큼은 손이 잘 안 간다. 번역 잘 된 성경이 뭔지도 알고 도서관에서 빌리기까지 했다. 심지어 일요일 아침에 교회도 몇 번 나가봤다. 근데 첫 페이지를 채 못 넘기겠다. 예수나 하나님에 반감이 있는 건 아니다. 그 교인들을 싫어하는 건 더더욱 아니다.
무신론자 비율이 압도적인 우리나라에서는 신이 없다고 단언된다. 유신론자들은 바보 혹은 의지박약자 취급 당하기도 한다. 하지만 전세계로 눈을 돌리면 얘기가 다르다. 명실상부 세계 최강대국 미국은 우리랑 정반대다. 대통령 당선자는 취임식 선서에서 성경에 왼손을 올려놓는다. 말미에는 '신이여 도와주소서'라는 한마디로 마무리한다. 국회의원 90% 이상이, 국민의 70~80% 이상이 유신론자다. 이성적인 걸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역사 속 철학자와 과학자, 위인들도 신을 믿었다. 걔들이 바보라서 신을 찬양한 건 아닐 게다. 시대적으로 그게 당연했기 때문이란 건 말이 안된다. 그 당연한 사실에 반기를 들거나 의문을 제기하는 자들이 저들이니까.
뭣 모르던 어린 시절에는 무신론을 강하게 주장했다. 대학 1학년 때 종교학 중간고사 답안지에 '한 명이 미치면 정신병이지만 여럿이 미치면 종교라고 부른다' 한줄 끄적이곤 의기양양하게 강의실 문을 나왔을 정도다. 당시 읽었던 리차드 도킨스의 말인데, 대체 무슨 패기로 그 짓거리를 했는지 돌이켜보면 얼굴이 벌개진다. 그러다가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D0'라는 학점을 받았지만 후회는 없었다. 하지만 머리에 조금씩 지식이라고 부를 만한 게 쌓이고 여러 주장을 받아들이면서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난 사실 신이 없다고는 말 못하겠다. 굳이 유신론자냐 무신론자냐 물으면 불가지론자, 그러니까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는 쪽이다. 물론 전에 '인간론' 서론에 썼듯 우리 모두가 신이라는 생각은 변함 없다. 서로 영향을 주고 받고 세상을 창조해가는 우리 자신이 곧 신이라는 식이다. 근데 이건 어쩌면 내가 불교를 전공해서 도출된 결론일 수도 있다. 지금 얘기하는 건 이런 만물신 말고, 진짜 '창조주'다. 과연 신이 있을까 없을까. 우리가 죽으면 모습을 드러내시려나.
장소가 장소인지라 감상보다는 생각만 하게 되더라.
한켠에 이런 미니어쳐가 있다. 아래 사진 축소판이다.
저 꼭대기에서 보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내가 그렇게 아름답다고 한다. 공사 중이라 올라가진 못했다.
오페라 공연 시간까지 시간이 떠서 들른 쇼핑몰이다. 특별한 건 없다. 살만한 물건은 담배 뿐.
미하일로브스키 극장 팜플릿과 공연 시간표
극장 근처에서 하염없이 돌다가 입장한다. 이곳 역시 겉으로 보기엔 극장이란 걸 알 수 없다. 여타 다른 건물들과 비슷하게 생겨서다. 다 똑같은 건물인데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극장이 되고 쇼핑몰이 되고 담뱃가게가 된다. 입구의 문고리를 쥘 때마다 보물상자를 여는 기분이다. 한번은 경찰서 문을 연 적도 있다. 쏟아지는 경관들의 시선에 '어 시발 이게 아닌데' 하며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미하일로브스키 극장 내부. 작은 망원경을 들어야 할 것만 같다. 격식 있는 옷을 안 입고 가서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다들 크게 신경 쓰는 분위기는 아니다. 그래도 자리가 자리인지라 행실을 조심히 했다. 꽤나 '배운 사람들'이 모이는 모양이다. 면면에서 교양과 품위가 얼핏 느껴졌다. 직원들도 죄다 턱시도와 정장차림이다.
내가 관람한 작품은 베르디의 가면무도회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택하진 않았다. 이날 공연 리스트 중 그나마 이름을 들어본 게 이것 뿐이라서다. 처음엔 초집중했다. 배우들 노래를 들으며 사람 몸에서 저런 소리가 날 수 있다는 사실에 감탄하고 신들린 듯한 연기력에 매료됐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눈꺼풀이 무거워졌고 결국 중반부터 꾸벅꾸벅 졸았다. 얼른 나가서 담배 피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지고 인터미션만 기다려졌다. 뭐든 공연이라면 다 좋아서 대충 예매한 게 판단미스였다. 러시아에 와서 발레도 아니고 오페라를, 그것도 이탈리아어로 부르고 러시아어 자막이 뜨는 공연을 대체 왜 봤을까... 근데 지루한 이유가 단순히 내가 못 알아들어서만은 아닌가보다. 양옆 커플들도 고개를 푹 숙이고 숙면을 취하고 있었으니..
공연이 끝나고 곧바로 숙소로 들어가긴 아쉽다. 러시아에서의 마지막 밤을 어떻게 장식할까. 유람선에서 늦은 저녁과 술을 함께 하며 마무리 짓기로 한다. 비싸도 괜찮다. 엄마가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오라고 전날 100만원을 보내줬다. 후후. but... 유람선 선착창에 도착하자 야간 운행시간이 지났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이런 망할. 시계를 보니 열한시 가까이 돼있었다. 끝날 만도 하네...
하는 수 없이 숙소 돌아가는 길에 식당에 들렀다. 여기서라도 실컷 먹고 가야지.
사진은 보드카와 맥주다. 맥주잔 크기에 놀라서 손으로 사이즈를 잰 모습이다. 술과 음식을 꽤나 많이 먹었다. 총 10만원 넘게 나옴... 러시아에서 저무는 마지막 밤이 아쉬워서였을까. 유람선 못탄 한을 엄한 곳에 풀고 있다. 야간 유람선 타기 위해서라도 한번 더 오겠노라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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