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안다는 듯한 관망자적 태도는 모두를 모른다는 말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당장의 우월감을 보이고 싶다거나 독자들을 현혹하고 싶은 마음에 ‘얕은 지식’이라는 공통분모를 이 책은 내세운다. 그래서 ‘넓고 얕은 지식’만 있으면 심오한 대화놀이에 한 번 낄 수 있으니 이 책을 읽어보라는 심산이다. 의도는 좋다. 심히 어려울 수 있는 갖가지 정보들을 쉽게 풀어놓는 사전역할을 하니 복잡한 현상들을 쉽게 이해하고 싶은 독자입장에서는 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선한 의도가 꼭 옳은 결과물만을 내놓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역사, 경제, 정치, 사회, 윤리 등등의 이야기들의 기초를 제공한다. 다는 아니지만 이것만 읽으면 기초교양을 쌓을 수 있고 사람들과 어울려서 ‘아는 척’은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것이 이 책의 핵심이다. 문제는 사실을 호도한 정보들을 마치 굉장히 균형 잡힌 정보마냥 내뱉어 놓았다는 데에 있다. 사실, 너무도 많은 오류가 있어서 특정 어디부분이 틀리다 하는 말조차 못할 정도다. 책은 기본적으로 ‘균형잡인 시각’을 제공한다고 되어있으나 어디까지나 좌익적 사고에서 비롯된 시각으로 책을 서술했다고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자본주의를 깎아내리고 싶어 하는 마음이 여실히 보인다. 공산주의가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은 것(?!)’ 이라는 인식이 전반적으로 쓰여져 있다. 공산주의가 인류에게 어떠한 해악을 끼쳤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어나가게 했는지에 대한 서술은 없다. 다만 자본주의와 대립을 하는 체제이면서 결과적으로 실행되지 못해서 안타까운 체제 정도로 기술되어 있다.책의 가장 큰 오류는 두 가지인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는 자본주의에 대한 폄하이고 두 번째는 잘못된 사실에 기반한 지나친 표준화이다. 대책적인 자본주의 폄하는 책 전반에 교묘하게 기술되어 있다. 우선 책의 한 부분을 보겠다.
<책인용> 1권 P.104: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세계는 신자유주의라는 매우 소비적이고 시장중심적인,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매우 독특한 세계다. 신자유주의 체제에 살지 않았던 과거의 사람들은 우리와는 너무도 다르게 살았을 것이다. 다른 세계에서 산 만큼 지금의 우리와는 다르게 생각하고, 느끼고, 생활했을 것이다. 지적 대화를 위한 첫 여행지가 역사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금 내가 발 딛고 있는 세계가 매우 독특한 세계임을 아는 것, 내가 사는 세계가 지금까지의 인류 전체가 살아왔던 평균적이고 보편적인 삶의 모습은 아님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이 독특한 세계에 발 딛고 서 있는 독특한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왜곡된 ‘세계’에 서 있는 왜곡된 ‘나’를 이해하는 것. 이것이 지적대화를 위한 가장 기본적인 준비다.
당연히 자본주의를 살아온 시대는 그리 길지 않다. 인류의 역사는 어찌보면 자본주의를 위해서 달려온 것으로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자는 지금의 시대를 ‘왜곡된 세계’로 폄하하고, 지금의 세계가 인류전체가 살아온 평균적이고 보편적 삶의 모습이 아님을 강조한다. 그렇게 자본주의를 넘어선 무언가 더 엄청난 사상이 있을 것처럼 이야기 하지만 그 어떤 대안제시조차 없다. 마르크스가 주장한 이론들이 선(善)인 것처럼 적혀있다. 그러나 교묘히 결과론적으로 공산주의혁명이 실현되지 않았으니 자본주의가 득세를 한다고만 써놓았다. 신자유주의가 무조건적인 성장중심정책이고 기업과 국가의 경쟁력을 강화하지만 사회적 약자를 도울 수는 없다고 쓰여 있는 모습을 보면 웃음도 안나온다. 모두가 잘 살 수 있다던 공산주의 국가의 모든 전례만 봐도 그곳의 사회적 약자와 자유시장경제 하의 사회적 약자의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기반은 비교조차 될 수 없다. 저자는 자본주의 시장에서 자본주의를 비난하며 고매한 경지에 올라서 우매한 세상을 관찰하듯 책을 적어 놓았다. 그러나 돈은 저자가 벌어가고 잘못된 정보의 주입은 돈을 낸 독자가 얻어가니 이것이 자본주의의 폐해라면 폐해겠다.두 번째 문제점인 잘못된 사실에 기반한 지나친 표준화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겠다. 역사나 경제부분만 봐도 그렇다. 각각의 주제만 봐도 굉장히 두꺼운 책 한권씩은 족히 넘을 만한 것들이다. 분명히 쉽게는 쓰여 있으나 너무 쉽게만 쓰려다보니 지나친 표준화를 시키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당연히 이 책이 가지고 있는 기본 모토가 쉽게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표준화는 필요할 수 있겠으나 거짓을 진실처럼 적어 놓고 돈을 받는 것은 윤리적으로도 옳지 못한 모습이 아닐까 한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가상의 사례를 제시하거나 표를 그려놓고 쉽게 설명하려 한다. 가상의 사례를 제시하는 부분들은 4가지 정도의 선택지에서 그 결과가 어찌될지를 예측한다. 그 결과라는 것은 자본주의가 심화될 때 승자가 독식하는 사회 아니면 자본주의보다는 평등해진 사회에서 사회 약자층이 잘하는 사회로 되어있다. 심하게는 모두가 자본가의 노예가 된다는 결과도 적혀있다. 마르크스가 사람들을 선동할 때 했던 기법이 이와 달랐을까 의문이다. 지나친 양극단적 사례제시다. 언론과 방송을 보수와 진보로 구분해 놓는 표(책P. 214)만 봐도 이정도로 틀린 것을 적어 놓고 싶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경향신문과 한겨레가 중도에서 살짝 진보로 간 수준이라고 한다. 조선, 중앙, 동아가 그냥 우파 신문이라고 한다. 종편과 SBS가 우파이고 KBS, MBC가 중도라고 한다. 정당을 보수와 진보로 구분해 놓는 표(책P. 208)를 보면 더 기가 차다. 새누리당이 극우정당이고 민주당이 우파와 중도 사이에 위치한 정당이라고 한다. 정의당이 중도좌파다.보수와 진보를 나누는 기준이 워낙 복잡다단하기 때문에 큰 틀만 제대로 잡아주어도 다 틀리다고는 할 수 없지만 위에 거론된 기준이라는 것은 그냥 다 틀린 말이다. 한국사회는 지금 좌우가 아닌 좌와 좌의 정책대결로 흘러가고 있다. 그래서 포퓰리즘 과잉 정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고 ‘무상~’ 라고 하는 정책들이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런 한국 사회를 보고 이 책은 책인용(P.211) “한국 사회는 어찌되었건 간에 자본가와 기업의 이익이 대변되는 사회이며, 복지수준이 저조하고 빈부격차가 심화된 국가일 수밖에 없다.”라고 대한민국을 격하시키고 있다.
지식(Knowledge)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필자가 생각할 때는 단순히 널려져 있는 여러 정보(Data)들을 각자마다의 사유를 거쳐서 재생산된 산물이지 않을까 한다. 쉽게 말하면 개인의 주관과 생각이 단순한 정보(Data)를 넘어선 지식(Knowledge)을 만들어낸다고 본다. 이 책의 저자는 이러한 점에서 지식이라는 것을 너무 간과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지식이라는 것의 간과도 엄청난 문제이지만 틀린 것을 옳은 것처럼 혹은 균형 잡힌 것처럼 적어놓은 것을 보니 스멀스멀 화까지 올라온다. 지적대화를 위해 얕은 지식을 제공하겠다는 저자의 선한 의도는 알겠으나 틀린 사실을 기술해 놓는 잘못된 과정은 옳지 못하다. 지식은 깊어야 한다. 이렇게 “얕은 지식이 좋다.” 라는 생각이 판을 치니 한 여자 연예인이 안중근 의사를 못 알아 봤다고 대국민 사과를 하는 촌극이 나타난 것이 아닐까.
최 종 부 | 충북대학교 경영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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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썼네. 애초에 인문학은 넓고 얕은 지식이 필요없다. 그 끝이 모두 같은 얘길해서다. 하나만 진득하게 파고들면 공부할 게 알아서 눈에 보이는데 그런 수고는 귀찮고 어디가서 아는 척 허세는 부리고 싶으니 저딴 개같은 책이 날개 돋친듯 팔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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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썼네. 애초에 인문학은 넓고 얕은 지식이 필요없다. 그 끝이 모두 같은 얘길해서다. 하나만 진득하게 파고들면 공부할 게 알아서 눈에 보이는데 그런 수고는 귀찮고 어디가서 아는 척 허세는 부리고 싶으니 저딴 개같은 책이 날개 돋친듯 팔린다.
우리나라 인문학은 원래 70년대, 먹고살만해지고 서양철학과 문학등의 번역서들이 봇물처럼 터질때 시작했다. 그렇게 다른 국가들처럼 인문학의 개화가 시작되는듯했는데 웬걸 80년대 좌빨들이 마르크스 주의와 주체사상을 혼용하여 억지로 한국 독재정권 비판에 열을 올리다보니 되먹지도 않은 논리로 인문학을 점점 변질시켜갔다. 그런새끼들 중에 자본론 제대로 읽은새끼도 없고 유물론도 제대로 아는 새끼들도 없었다고 단언한다. 민주화되고 진짜 먹고살만해진 80년대 후반 90년대 초반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광풍이 불면서 후기구조주의의 대표적 프랑스 인기철학자들의 글들이 소개되고 뭔지도 모르면서 미셀푸코 등을 읊어대기 시작. 여기서 부터 인문학이 완전 망가졌다. 패션좌파의 시작과 함께 등장한 패션 인문학은 그 시작이 여기.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이 조선에서 상실의 시대라고 되먹지도 않은 번역제목으로 인기를 끌면서 아무 의미없는 허무주의 현대사회의 공허함을 읊어대는 것이 지식인의 멋이라 생각하고, 인문학을 무뇌의 학문으로 변질시켜버렸다. 그 이후 한국 인문학은 패션유행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니다가 급기야 뭔놈의 쇼프로그램에서 까지 데리다의 해체주의 문구가 등장하면서 진지한 탐구보단 얄팍한 몇개의 문구로 아는척하는 싸구려 학문영역으로 전락. 우리나라 인문학은 이렇게 개판이 됐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뛰어넘은 희대의 냄비받침들은 계속 양산되고, 그럴수록 대한민국 학계는 빛을 잃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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