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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by TheStrok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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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천히 준비하자. 입원은 일곱시 예정이지만 한시 쯤 집을 나섰다. 가방에 책과 신문 한 가득 채우고 칫솔 치약 클렌징폼 비누 면도기 등 생필품을 챙겼다. 책은 정확하게 기억은 안나는데 아마 사르트르, 헤겔, 칸트를 챙긴 것 같다. 그러고 '형 갔다 올게'하며 집에게 인사를 건넨다.


 우선 왕십리역 가서 보고 싶었던 영화부터 한 편 보자. 여느 때처럼 혼자 밥도 먹고 언제나 그랬듯 잔잔하게 인생을 흘리자. 내 꿈을 주제로 한 영화 스포트라이트를 봤는데 별로 재미 없었다는 건 함정. 뻔한 스토리 진부한 전개로 날 졸립게 했다. 내 기준으로 최악의 영화는 대체 두 시간동안 뭘 본 건지 기억이 안나는 영환데 이 작품이 딱 그짝이다.


 뭐 딱히 인상 깊었던 스토리도 아니었으니 쓸 말도 없네.

 다 보고 왕십리 푸드애비뉴인가 뭔가에 가서 스떼끼동을 먹었다. 1인당 하나씩 불판을 나눠줬는데 막판엔 다 태워먹어서 먹기 불편했다. 아니, 분위기가 심리적으로 밥을 빨리 먹도록 조성되어있었다. 이런 거 싫다. 밥은 천천히 먹어야지. 음식은 맛있었는데 너무 조급하게 먹은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다. 맥주도 한 잔 시키고 싶었는데 내일 기증을 위해 꾹꾹 참았지. 영화 보는 동안 담당 간호사 누나한테 전화가 한 통 와있었다. 알아서 잘 오라 뭐 별로 중요한 내용 아녔으니 생략. 밥 먹고 산책겸 병원까지 걸었다. 역시 술집 거리의 향기와 분위기는 너무 사랑스러워.


 병원 최고층에 위치한 VIP 병동에 도착하니 간호사 선생님들이 친절하게 맞아주셨다. '이리 오세요, 여기서 뭐 하시면 됩니다. 불편한 거 있으면 언제든 말씀하세요'라며. 나한테 그렇게 잘 해주지 마세요. 나는 그런 대접을 받을 사람이 아니에요. 그래도 너무 고마워요. 밥이 한 끼에 15000원이었다. 물론 내가 지불하진 않는다. 모두 내 골수를 받을 수혜자 부담. VIP 병실 이용료도 밥값도 간식 비도, 심지어 왔다갔다 교통비도 모두 그 분 부담이다. 죄송합니다... 그래서 일부러 택시 안타고 다님.



 기자 때도 그렇고 학생 때도 그렇고 아무리 봐도 나는 먹을 복은 타고 난 듯하다. 근데 왜 살은 안찌냐. 


대충 짐 풀고 방 먼지 털어내고 저녁까지 할 일이 없어서 밖에 돌아다녔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병원을 좋아했다. 아파서 간 적은 한 번도 없지만 그래서인지 괜히 병원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공부 제일 잘했다는 의느님들도 보고 환자들도 구경하면서 '나는 저렇게 아프지 않으니까 참 행복한 사람이야'하는 같지도 않은 안도감 때문인가? 그러다가 준수형한테 연락을 했다. 유일하게 병문안 와준 사람. 음 고맙네. 한 두시간 노가리 까다가 병원 앞 홍콩반점에 가서 짜장면을 먹었다. 배불러 뒤지겠는데 군만두까지 시켜줘서 힘들었음. 병실에 복귀해서는 금연파이프 물고 창틀에 똥폼 잡고 앉았더니 형이 사진 하나 찍어줬다.


-참 사진 정말 더럽게 못 찍네.


아 이 사람 보면 왜 담배를 피고 싶어지는 걸까. 참느라 혼났네. 인간이 되진 못해도 괴물이 되진 말자 우리. 형 보내주고 이것저것 하다보니 21시 30분. 예정대로 그라신 한 대를 맞았다. 아 다른 주사랑은 다르게 이건 너무 아프다. 찔리는 건 당연히 통증이 있을 거고 주사액을 넣는데 바늘을 타고 뜨거운 무언가가 피부를 지지는 느낌이다. 다행히도 여기 선생님들이 천천히 꾹꾹 눌러가며 놔주셔서 통증이 덜했다. 입원 전 주사실에서 맞을 땐 아파 뒤지는 줄 알았는데 말이다.


 이제 좀 자야지. 집에 없는 티비를 보다가 잤다. 티비라는 게 꽤 좋은 물건이다. 이것도 나중에 좀 길게 써야지만-테레비젼은 가만히 있어도 그 날의 중요한 정보들을 알아서 갖다바쳐주는 신통방통한 기계다. 딱히 노력을 들이지 않아도 정보를 습득할 수 있다. 그 탓에 대중이 획일화 되고 동일한 생각을 갖게 되는 부작용이 있긴 하다. 이런 생각을 하며 창밖을 관찰했다.




 야경이 너무 아름다웠다. 나는 지리 파악하는 걸 좋아한다. 머릿 속에 서울 지도를 조금씩 완성해가는 게 내 취미라면 취미다. '여기서 여기로 가면 어디가 나오고 저기로 가면 뭐가 나오고' 따위의 위치 파악이 꽤 재밌다. 언젠가 뇌 속에 서울 전체 지도를 완성하는 게 목표랄까. 첫째날 밤에 왕십리부터 우리 집까지의 지도를 만들었다. 음 저기 동대문이고 저기는 한양대, 남산타워, 저쪽은 한강이구나. 한강 다리를 건너는 저 많은 차들은 대체 어딜 저리 가는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들었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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