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 자는데 누가 왔다. 내 피를 뽑기 위해서. 세상에 아이고 시부럴 손등 핏줄에서 피를 뽑는다.
'팔뚝은 이따 기증할 때 쓰기 위해 아껴둬야 하니까'라고 하신다. 와 리얼 끔찍하다. 애초에 피를 뽑을 일 자체가 없었으니까 주사바늘이 더 무서웠다. 몸무게 미달로 헌혈 한 번도 안 해봐서 그런지 거부감이 굉장히 컸음. 이거 누가 논문 내면 꽤나 성공할 듯하다. 주사바늘 찔릴 때 신체 긴장감, 스트레스를 주제로 말이다. 으아 시발 어떻게 손등에 주사바늘을 꼽을 수가 있지.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다. 원래 잠결에 뭔갈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곯아떨어지지만 이건 안 그랬다. 채혈 후 너무 어이+정신이 없어서 방을 돌아다니고 티비 봤다. 근데 막상 정신차려보니 다시 자고 있었음ㅋㅋㅋ
또 한참 자다 누가 깨워서 일어나니 조혈모세포센터 간호사 팀장이 와계셨다. 되게 착하고 선한 웃음이 인상적이었어. 이 협회는 인상 보고 뽑는 게 확실해. 나는 이상하게 누가 웃어주면 반한다. 얼굴이 예쁘고 안 예쁘고를 떠나서 그냥 날 보고 미소 지어주면 뿅감... 이 분도 분명 이쁜 얼굴은 아닌데 보고 너무 선해서 행복해졌다. 아니다 걍 날 챙겨주는 사람한테 반하는 타입이다 나는. 아무튼 절차에 대해 이야기 나누다가 채취실로 이동했다. 드디어 골수 뽑을 시간이다. 사르트르, 배터리, 휴대폰 챙겼다. 내 꼭 다 읽고 말리라!!
도착하니 내 골수를 담당해줄 선생님이 있었다. 아 이 선생님 사진 찍었어야 하는데. 역시 너무 친절하고 맑은 눈망울. 근데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시는지 머리엔 흰머리가 꽤나 자리잡고 있었다. 그래도 지친 기색 하나 없이 내 질문에 혼신의 힘을 다 해 설명해주셨다. 아름답다.. 근데 주사바늘 꼽는 건 아름답지 않음. '으아아 XX!!' 욕할 뻔 한거 간신히 참았다. 아픈 걸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겠냐마는 난 유독 통증에 민감하다. 그래도 선생님이 잘 신경 써줘서-아프면 바로 말 해요, 어때요 지금. 괜찮아요? 등 친절하게. 물론 괜찮지 않았다- 무사히 넘어가도록 도와주셨다.
그렇게 아홉시부터 한시 조금 넘을 때 까지 골수를 뽑았다. 나는 네시간 동안 티비를 통해 전파되는 필리버스터, 야당 소식에 소새끼 말새끼를 찾았다. 이 인간들은 대체 언제까지 이 지랄을 할까. 발의하는 사람들 정말 약았다. 총선 앞두고 인지도 올리려는 개수작으로 밖엔 안 보인다. 그 사람들 대부분이 비례대표이며 지역구 지지율 역시 여당 후보에게 떡발리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이 증명하지.
그렇게 속으로 욕을 하고 바깥을 보며 숨을 돌리는 동안 선생님은 자기 일을 하셨다. 물론 말 걸때면 꼬박꼬박 정성스레 답해주셨고. 고맙습니다.
책을 읽으려 했는데 잘 안 읽혔다. 왼팔을 절대 움직이면 안 될 뿐더러 조금이라도 꼼짝 했다간 팔이 찌릿찌릿 아파왔으니까. 하릴 없이 티비 보고 창밖 거리나 감상하다보니 어영부영 네 시간이 지났다.
이게 내 몸에서 나온 그 소중한 조혈모세포라고 한다. 처음 봤을 땐 정말 많은 생각이 들었다. 만져보니 온기가 남아있었다는 게 가장 큰 충격이었다. 선생님 보는데 창피하게 눈물 질질 짤 뻔 했다. 그냥 너무 감격스러웠다. 그냥 명치 아래서 부터 뜨거운 무언가가 솟아오르는 기분이었다. 부디 가서 사람을 살려주길 바라. 한 5분 동안 멍하니 살펴보고 만져봤다. 보글보글 피어오르는 거품과 주황빛이 도는 피. 이 조그마한 팩 속의 액체가 한 생명을 살린다는 게 경이로웠다고나 할까.
청승은 그만 떨어야지- 그러고 채취실 문을 나섰다. 다른 후기 보니까 채취 후 휠체어를 태워줬다고 하는데 나는 그냥 걸어서, 아니 폴짝폴짝 뛰어서 병실로 돌아갔다. 그 길에 내 담당 협회 간호사 누나를 마주쳤다. 오랜만에 보니까 너무 반가웠다. 말을 걸려고 했는데 왠지 바빠보여서 그냥 지나쳤다. 채취전담 선생님이랑 뭔 할 말이 있었나보다. 하헣
방에 와서 차려놓은 밥을 먹고 정신 없이 AC/DC 들으며 헤드뱅잉 하고 있는데 담당 간호사 선생님이 왔다. 어우야 걸렸으면 쪽팔릴 뻔 했네. 선생님은 내게 명패랑 선물, 먹을거리 등을 주고 부작용, 이후 일정 등을 설명해주셨다. 하나 걱정되는 것은 내 몸무게보다 수혜자 몸무게가 더 많이 나가서 내일 한 차례 더 채취를 할 수도 있다는 것. '네 그럴 수도 있죠 뭐' 참 어처구니가 없긴 하다. 수혜자가 여잔데 나보다 몸무게가 많이 나가서 골수를 더 뽑아야 한다니. 이게 무슨 개또라이 같은... 살 좀 찌자 준호야. 선생님 말씀하시는 뉘앙스를 쭉 들어보니 내일 또 한다는 게 거의 확실시 됐다. 수혜자보다 몸무게가 적으면 거의 80% 이상이라고. 이 사실을 전할 때 괜히 머뭇거리길래 '아오 걍 내일 또 한다고 생각해둘게요' 했다. 서로 빵 터져서 낄낄댔다. 그렇게 잡담 좀 하다가 선생님은 가셨다. 아 이거는 내 상패.
세포 뽑으면 마라톤 완주한 것과 같은 체력이 소모된다고 하는데 이상하게 피곤하지 않았다. 최대한 많이 주무시라고 얘기 들었지만 잠이 안 왔다. 그래서 걍 밥 먹고 티비 보고 띵가띵가 책 좀 뒤척였다. 한 다섯시 쯤 선생님한테 전화가 왔다. 내일 재채취 여부를 전해주려는 전화다.
'뭐래요? 내일 또 해야 된대죠?'
'어떨 것 같아요? ㅎㅎ'
'왜요 왜요 어떤데요?'
'내일 또 안 해도 돼요 ㅋㅋㅋㅋㅋㅋ'
'오 정말요?'
'네. 최소 요구치가 3이고 충분하면 5, 많으면 10 정도라고 해요. 근데 박준호님은 13이 나왔어요!'
와우.
'오~~ 고맙습니다 선생님'
그렇게 채취를 많이 했는데도 아직 백혈구 수치가 40000 이상이라는 말도 덧붙이셨다. 정상 수치가 많아야 10000인데 채취 직전에 6만? 채취 후 4만이었다. 캬 역시 건강 하나는 타고 났구나 넌. 이건 며칠 지나면 다시 원상복구 된대. 뭐 그러고 열심히 쉬라는 말을 남기셨다.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밥 먹고 쉬고 있으면 자기가 오신댄다.
그 말 듣고 안심해서 좀 자려고 했는데 정신이 너무 말똥말똥하다. 이 때부터 저녁까지 뭐 했는지는 잘 모르겠음. 그냥 책 읽고 밥 먹고 돌아다녔던 것 같다. 아, 저녁 먹고 진짜 도저히 못 참겠어서 담배를 폈다(선생님이 알았다면 귀싸대기 날아갔을 판이지만 그래도 어쩌겠냐 일주일 동안 참았는데 이 정도는 용서해주세요) 한양대 병원에서 아래 야경을 바라보며 피는 담배란, 캬... 올라가는 길에 날 두려움에 떨게 했던 응급실도 구경 가고- 아 근데 여긴 간호사보다 의사가 더 예쁘다. 나이대도 훨씬 어리고 와 뭔 의느님이 이렇게 예쁘냐. (개소리네...)-열심히 티비 보고 담배 피고 야경 감상하고 자려고 누웠다.
근데 밤이 돼도 잠이 안 왔다. 티비를 틀었다. 복면가왕 설특집으로 복면중심(?)을 했는데 그동안 복면가왕의 프로그램 중 하이라이트만 모아서 틀어준 방송이다. 여기서 인상 깊은 무대를 하나 발견했다. 라젠카를 부른 '우리동네 음악대장' ㅋㅋㅋ 근데 누가 들어도 하현우다 이거. 저런 음색에 저만한 가창력을 지닌 사람이 대한민국에 몇 없으니까. 무한도전 못친소도 봤다. 바람 퐉 터지면서 사람 얼굴 까발리는데 너무 웃겨서 뒤질 뻔함. 히히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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