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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Strok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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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들은 누구와 사랑에 빠져든 적이 있는가? 당신들은 틀림없이 그 고귀함이나 감미로움, 헤어질 때의 고통과 슬픔이며 그 후의 공허함 따위를 미화하고 과장하려 들 테지만 기실 그 진상은 뜻밖에도 단순하고 명백하다. 그것은 당신이 이 여행 중에 눈길을 끄는 한 소녀와 만났다는 것이며, 결국은 부정확하기 마련인 관찰에 이어 당신이 던진 호의 섞인 눈길에 그녀가 답했다는 것이며, 무료를 함께 달래자는 당신의 용기를 다한 요청에 그녀가 다소곳이 응했다는 것이며, 그리하여 약간은 야릇한 열에 들뜬 당신들이 깜박깜박 자기를 잊어가며 주고받은, 분명 달콤하고 섬세하나 또한 그리 대단할 건 없는 몇 개 유형의 행위와 가끔씩은 정색해도 좋을 대화의 집합에 지나지 않는다. 설혹 당신들에게 공통되는 추억과 꿈이 있었고, 그래서 많은 아름답고 고귀한 것들을 이야기했으며, 혹은 그런 것들 자체를 행위로 주고받았다 할지라도 당신들 중 누군가는 도중에 내리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다. 우리의 대지에는 너무나 많은 역이 있고, 대개의 경우 우리들 각자의 행선지는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종 당신들은 만나기 전보다 훨씬 쓸쓸하고 허전한 마음으로 헤어져야 하며 불행히도 마땅한 새 상대를 구하지 못할 경우 그 나머지 여정은 피로하고 지루하여 못 견딜 것이 되어 버린다.
 물론 헤어질 무렵에는 서로가 오래도록 기억해 줄 것을 열렬히 희망하고 혹은 다시 만날 것을 굳게 약속하지만 그 또한 온전히 허무한 것이 되기 일쑤이다. 세상은 너무도 기억할 것이 많고, 한번 헤어진 이들이 다시 만날 수 있기에는 너무 넓은 까닭이다.
 어쩌다 운 좋게 둘의 행선지가 같은 경우에도 결과의 허망에는 큰 차이가 없다. 서로가 미지이던 시기, 열정의 한순간이 지나고 나면 마침내 당신들 서로를 묶고 있는 그 무효하고 권태로운 관계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하게 될 것을...
 당신들은 이제 나에게 우정을 말하려는가? 그러나 그것 역시도 우리들 삶의 한때를 현란하여 애매한 빛으로 채색하고 사라진 한 장의 의례적인 삽화일 뿐, 미문으로 장황하게 서술되거나 감격에 찬 목소리로 수다하게 떠들어댈 만한 것은 못 된다.
 열차에 올라 객석에 앉게 되거든 주위를 둘러보라. 누군가 그 시각 그 객차에 올랐다는 우연만으로 당신과 함께 앉게 되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당신이 열올려 얘기하려던 우정의 시작이다.
 우의라는 이름 아래의 달갑잖은 복종과 양보, 영혼의 밀실은 지극히 피상적인 이해, 다소 해로움이 있더라도 참아주어야 한다는 성가신 의무감, 항상 멀리 있어 정체 없는 것에 대한 논쟁과 건성으로 하는 수긍의 싱거운 미소, 크게 다를 바 없는 경험의 지루한 교환, 머리 기대는 것을 참아주는 대신에 팔을 상대의 어깨에 걸치는 계산, 그나마도 당신들의 동석이 길어짐에 따라 끝내는 흐지부지 되고 말 그 모든 관계-그것이 한때 그렇게도 굉장한 축복으로 여겨졌던 우정의 진정한 내용이다.
 그러므로 만약 당신들이 그런 사랑이나 우정의 결핍을 커다란 불행으로 여기고 각별히 그것을 고독이란 이름으로 과장하고 싶을 때, 비단과 보석으로 치장한 천한 육체에다 조야한 정신밖에 지니지 못한 여인과의 무분별한 관계 속으로 떨어지고 싶거나, 하찮은 천민들이며 속물들에게 ‘앞발이 아니라 두 손을 내밀’고 싶을 때에는 내 마음속에 있는 늙은 친구의 담담한 충고에 귀를 기울여 보는 게 좋다.
 “어린 놈아, 우리는 때로 빈 객석에 홀로 앉아 여행하게 되는 수도 있단다. 그럴 때 동석자를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리거나 이리저리 자리를 옮기는 것은 천하지. 오히려 이제 너를 스치면 다시 보기 힘들 차창 밖의 풍경을 감상하거나 어떤 가치 있는 생각에 잠겨 홀로 앉아 가는 쪽이 훨씬 멋스러운 법이란다...”
 그의 말이 옳다. 만약 우리가 감정의 과장에서 벗어나 그 본질 자체를 응시할 수 있다면, 고독이란 죽음 그것과 마찬가지로 결코 슬픔이나 고통의 이유는 될 수 없는 것이리라.
 일찍이 당신들의 몸과 마음을 그렇게 세차게 떨게 했던 미움이나 원한도 결국 우리들의 여행 중에 일어난 대단찮은 에피소드에 불과하다는 점에서는 이미 말한 우정이나 사랑과 다름이 없다. 즉 그것은 열차에 오르기 전 잘 닦아 신은 당신의 구두를 한 무례한이 밟고 지나간 것이며, 참지 못한 당신의 거친 항의가 그와의 언쟁을 낳게 한 것이며, 그 언쟁은 듣기 거북한 욕설로 번지고 혹은 실력행사로 들어가-그래서 공안원의 제지로 끝났건, 이웃의 만류로 참았건, 또 당신들이 열적게 돌아섰건, 오징어포에 소주잔을 기울이며 화해를 했건 도대체 그 일련의 불쾌한 돌발사가 당신들의 여행에 무슨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단 말인가?
 하여 만약 누군가가 당신에게 해악을 끼친 사람이 있다면, 맹렬한 증오로 그와 그가 끼친 해악을 기억하고, 또 그 정당한 보복을 가슴 깊이 맹세한 일이 있다면, 당신은 다시 내 늙은 친구의 충고를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
 “어린 놈아, 우리들 삶의 열차는 종종 너무 혼잡하여 본의 아니게 남의 발을 밟게 되는 수가 있단다. 만약 네가 진심으로 착하고 슬기로워지기를 원한다면 그런 것을 잘 이해하고 너야말로 남의 발을 밟지 않도록 주의해라. 불필요한 시비는 너 자신을 피로하게 하고 이웃을 괴롭힐 뿐이란다”
 그러하다. 한때 우리들의 기쁨이며 보람이었던 모든 것들, 그리하여 그처럼 쉽게 우리를 감격시키고 앞뒤 없는 우리들의 찬사와 경이를 찬탈해 간 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메울 수 없는 슬픔이나 또 끝모를 경멸의 원인된 모든 것들, 또 그렇게도 세찬 불길로 우리의 몸과 마음을 사르던 분노와 원한도 본질에 있어서는 그러하다. 오, 그 모든 우발적이며 단순하고 순간적인 것들...

사람의 아들들이여 우리는 그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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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이문열 만세 만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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