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의 문맹률은 개산 80%라고 한다. (…) 조선인 중에 문자를 모르는 동포가 1840만이라는 말이 된다' - 1933년, 동아일보
'(…) 문화민족으로서의 전통을 자랑하는 우리가 아직도 전인구의 칠할강이라는 문맹의 비율을 가지고 (…)' - 1946년, 동아일보
'특별경비대에 근무 중인 순경 장창환 외 14명을 문맹자로서 파면을 시키었는데 (…)' - 1947년, 동아일보
독립 직후 대한민국은 기층 민중은 물론 경찰도 글을 못읽어서 파면 당하던 세상이었다. 일제와 연관없이 최소한의 중등 교육이라도 받은 사람이 몇이었을까. 그들을 제외한다고 가정했을 때 국가 실무를 맡길 만한 사람이 몇이나 있었을까. 이승만은 친일파를 청산할 힘이 없었다.
1945년 8월15일 일본이 항복하고 9월 미군이 38선이남에 진주했다. 미국은 조선총독의 항복을 받아 남한을 접수했고 한국에는 하지중장을 두목으로 한 군정이 실시됐다. 군정하의 조선 땅에서 미군이 말단 행정업무까지 다 할 수 없으니 행정경험이 있는 조선인들을 미군의 보조로 썼다. 그러다보니 왜정시절 왜놈들 밑에서 관료생활을 하던 놈들이 다 자리를 꿰찼다. 대표적인게 군과 경찰. 군사조직인 조선경비대는 왜군출신들이 몰려와 병은 하사관으로, 하사관은 위관장교로, 위관장교는 영관장교로 눌러앉았다. 경찰의 경우 왜놈 밑에서 악랄하게 조선인을 탄압하던 말단 순사 경찰보조원 놈들이 전부 간부로 변신하여 자릴 꿰찼다. 그렇게 3년이 지나니 그 악질 친일파들 자리가 탄탄해졌다. 그러니 1948년 8월 대한민국이 건국되어 독립국가로 출발하는데 모든 공무원 조직은 군정시절 스며든 친일파들이 간부가 되는 비극이 일어났다. 1948년 반민특위를 만들어 친일파 척결을 하자는 민족주의자들이 있었지만 방대한 조직을 가진 친일공무원 조직에 무력화되었다. 그렇다고 '이승만은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했으니 그들을 중심으로 국정을 운용했다'는 말은 틀렸다. 중하층 임원 외 내각핵심부들은 독립운동가였기 때문이다.
부통령 이시영(임정내무총장) 국방부장관 이범석(청산리전투) 무임소장관 이윤영(국내항일) 외무장관 장택상(청구구락부사건) 내무장관 윤치영(홍업구락부사건) 법무장관 이 인(항일변호사, 한글학회사건) 채무장관 김도연(2.8독립사건) 문교장관 안호상(항일교육) 사회장관 전진한(국내항일) 체신장관 윤석구(국내항일) 교통장관 민희식(재미항일) 총무처장 김병연(국내항일)
한마디로 권력자들은 항일투쟁가, 조무래기들은 친일파로 운용할 수 밖에 없었던 체제였다. 물론 하급 관료들이 성장하여 나중에 대한민국에서 주요 역할을 수행했다는 사실을 고려해보면 이승만 대통령과 관련하여 친일을 조장했다는 주장을 전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잘 살펴보면 사실이 아니다. 해방 당시 대한민국에는 독립 운동을 한 사람은 얼마 없었던 반면 일제 체제에서 장교 내지는 관료로 근무한 경험이 있는 인물이 대다수를 형성하고 있었다. 독립운동가 중에는 실제로 필드에서 뛰며 일했던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일제 체제에서 관료로 일했던 사람 말고는 건국에 필요한 전문성을 구비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말이다. 공군의 경우 공군이 창설된 1948년 당시 대한민국에는 항공분야 유경험자가 500여 명 정도가 있었는데 일본과 연계되지 않은 조직, 예를 들면 중국군 내지는 광복군에서 근무했던 사람은 15명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일본군에서 근무했던 사람들이다(김정렬 회고록, '항공의 경종', pp. 79-81). 창군 당시 10여 명에 불과했던 비일본군 출신 항공인 가운데 2명이었던 최용덕과 김신은 나중에 공군참모총장으로까지 성장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비일본군 출신들에게 불이익을 주었다고도 볼 수 없다. 육군과 해군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해방 당시 조선 군인은 일본군, 광복군, 조선의용군 출신으로 분류된다. 해방 후 광복군과 일본군 출신은 대부분 귀국한 반면 조선의용군 출신은 대부분 만주에 정착했다. 우리나라에는 광복군과 비교해 일본군에서 근무했던 조선인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하지만 일제 당시 조선인은 임시정부 예하의 광복군으로서 나머지는 중국군에 소속된 조선의용군으로 독립 운동을 전개했다. 임시정부 예하 광복군으로 활동하던 사람과 비교하여 중국군의 일부로서 일본군과 싸웠던 조선의용군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1945년 이후 중국에서 2차 국공내전이 시작되면서 조선의용군 출신들은 국민당과 공산당으로 나누어 싸웠는데 대다수가 공산당에 소속되었다. 국공내전이 점차 모택동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진행되자 대부분의 조선의용군들은 모택동 소속이 되었다. 소위 말해 일제 당시 일본에 대항하여 싸웠다는 점에서 독립군으로 간주할 수도 있었던 조선의용군들이 1949년 말경에는 대부분이 공산 군대로 변한 것이다. 6.25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1949년 말경에는 10만에 달하는 조선의용군이 북한으로 들어왔다(국방부 군사편찬위원회, "6.15 전쟁사 1권 : 전쟁의 배경과 원인", pp. 199-202)
6.25 전쟁 당시 북한군에서 주요 역할을 했던 김두봉, 최창익, 한빈, 방우용, 고봉기, 김민산, 진반수, 박부, 홍순관, 하양천, 장진광, 허정숙, 김영숙, 장수련, 무정, 박효삼, 김창만, 이춘암, 주춘길, 유신, 김세광, 손달, 양계, 이림, 김한 중, 이지강, 이철중, 장중광, 장중진, 장지민, 장지복, 진국화, 최봉록, 최영, 하진동, 왕련, 김철원, 풍중천, 박일우, 이익성, 이권무, 조렬광, 김웅, 이상조, 김연, 이근산, 공호, 박훈일, 최명, 한경, 김택, 장평산, 이덕무, 이대성, 김신, 김흥, 이명선, 최계원, 이동호, 윤지평, 구재수, 김오진, 김수만, 유원천, 김종원, 김병권, 김병헌, 이원영, 조병룡, 채국반, 이명, 이유민, 왕자인 등은 모두 조선의용군 출신이었다. 이들은 일제 당시 만주에서 일본군에 대항해 싸웠다는 점에서 독립운동가로 분류될 수도 있는 사람들이다. 일제시대를 기준으로 하면 독립군이었던 사람들이 6.25 전쟁 당시 북한군의 주류를 이루면서 남침을 자행한 것이다. 이 같은 남침에 대항하여 싸웠던 대한민국 군의 주류 역시 일본군 출신이었다. 유감스럽게도 1945년 8월 15일 당시 북한 전 지역을 소련이 점령했던 관계로 조선의용군 출신들은 대한민국이 아니고 공산체제인 북한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지금와서 해방 당시 위관급 장교였던 반면 일본육사를 졸업했다는 사실 때문에 박정희, 정일권과 같은 사람을 무작정 모두 친일파로 모는 것은 그릇된 주장이다. 일제 당시 하급 관료에 불과했던 사람들을 친일파로 매도하는 행위는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근본적으로 흔들겠다는 발상과 다름 없다. 일제 당시 독립군으로 활동하던 공산주의자들이 북한에서 주류를 형성했던 반면 일제체제에서 일했던 사람들이 대한민국에서 실무자급 차원에서 주류를 이루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는 위에서 적었듯 자국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었던 약소국 대한민국 현대사의 비극일 뿐이다. 자신의 부모가 부족한 사람이라고 부모를 부정할 수 없듯이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의 과정에서 독립운동가들이 아니고 일제체제에서 일했던 사람들이 실무자로서 주요 역할을 했다고 하여 이제 와서 과도한 친일 논란을 전개하면 안 된다. 근대 대한민국에서는 친일파도 문제지만 공산주의자 또한 심각한 문제였다. 독립운동가일지라도 공산주의자로 활동했던 사람을 수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공산주의가 난무하던 해방 정국에서 자유민주주의체제를 고수하고자 노력했던 반면 마땅히 일할 사람이 없었던 대한민국, 일제체제에서 일했던 사람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던 대한민국, 독립운동가 출신들이 극소수에 불과했던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의 이승만의 고충을 이해해야 한다. 지금의 시각이 아니고 당시의 시각에서 대한민국 상황을 바라봐야 한다는 말이다. 이승만이 대한민국 대통령이 된 것은 1948년 8월15일이지만 북한에서 김일성이 실질적인 지도자가 된 것은 1946년 초반이다. 대한민국이 건국되기전 김일성이 많은 공산주의자들을 침투시켜 대한민국을 혼란케 했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추구했던 대한민국 입장에서 의미있는 독립운동가는 공산주의 활동을 했던 사람이 아닌 민주주의 민족주의 차원에서 일했던 분들이었고, 이 분들은 대부분 광복군 소속이었다. 안타깝게도 이 분들의 숫자는 그렇게 많지 않았던 것이다.
일각에서는 '북한은 친일파들이 기를 펴지 못했는데 대한민국은 그 반대였다'고 말하기도 한다. 민족의 정통성이 북한에 있다는 주장이다. 이는 사실이 아니다. 김일성의 북조선은 친일파를 행정조직의 근간으로 다 받아들였다. 심지어 장관들까지. 이승만정권이 장관들은 항일유공자 위주로 임명한 것과 극히 대비된다. 사실 친일 개판 정권은 김일성 정권인데 남녘에 암약해있는 빨갱이들의 간악한 선동으로 이승만이 친일파라고 모함을 당한다. 친일청산 못한 건 통탄스러운 일이다. 1945년 해방 당시 우리 손으로 일본의 항복을 받았으면 그들을 확실히 몰아내고 나라를 세웠겠지만 미국과 소련이라는 외세에 의해 해방을 이루다보니 불가항력적으로 못이룬 것이다. 항간에서는 박정희 대통령, 백선엽 장군, 정일권 국무총리, 김정렬 국무총리, 최규하 대통령 등 오늘날 대한민국이 존재하기까지 많은 기여를 한 분들을 친일파로 몰기도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들이 전부 만주군 출신이니까.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의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한 사람들 가운데 친일파가 아닌 사람이 누구인지 의문이 들 정도다. 지금이라도 민족의 정기를 바로잡아야 한다며 친일파 청산을 주장하는 사람도 없지 않다. 물론 맞는 말이다. 이에 노무현 정부때는 친일파 명단 작성을 위해 노력한 바 있다.
----이후 박정희
-박정희 대통령은 대한민국 정식 친일파 선정 명단에 들어가 있지 않다. 반민특위의 7천 명 명단은 물론 노무현 정권에서 만든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1005 인 명단에도 없다. 박정희 대통령을 친일파로 지정한 건 민간기구인 '민족문제 연구소'의 발표 뿐이다. 노무현은 취임하자마자 조중동, 박정희 죽이기 친일선동에 거의 목숨을 걸었다. 대표적인 사건이 당시 오마이뉴스 편집국장 정운현이 방원철을 데리고 미국까지 취재진을 이끌고 조선족 출신 고경인을 만나 인터뷰한 일. 먼저 방원철은 조선족 출신으로 군시절 박정희의 1기 선배다. 군복무시절 후배 조선인 생도들을 자주 구타했다고 한다. 박정희가 방원철보다 3살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1기 후배라는 이유로 다른 후배들과 똑같이 대우했다. 방원철은 아무리 때려도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고 견디는 박정희를 건방지다며 집중적으로 괴롭혔다. 방원철은 해방후 여운형의 건준에 참가하며 조선인민군 창군을 돕다 1948년 월남했다. 당시 계급은 조선인민군 중앙경위대 대대장이었다. 1963년에는 박정희 정권에 반대하는 군사쿠데타를 하려다 발각되어 주동자 김동하와 함께 수감된다. 즉 박대통령과 원수지간이다.
이후 조선족 고경인과의 인터뷰에서 고경인은 비밀광복군이란 것이 있는지도 몰랐다고 증언한다. 이 증언으로 박정희는 비밀광복군이 아니라며 지금까지의 비밀광복군 설을 노무현 정권에서 전부 뒤집어 버린다. 아니 고경인이 비밀광복군 존재를 모른것 하고 박정희가 비밀광복군이 아닌게 무슨 상관인지 의문이다. 당연히 이것만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근거다. 이후 그렇게도 박정희의 친일행각을 부각시키려 부단한 노력을 했으나 명확한 증거를 찾는 데 실패했다. 답도 안나오고 대책 없으니 노무현의 '박정희 친일파 몰아가기'는 수포로 돌아간다. 결국 2005년 노무현 참여정부 시절 대통령 직속 기구로 발족했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이하 친일진상규명위)’는 지난 2009년 4년 간의 조사를 마치면서 “박 전 대통령을 친일파로 분류할 수 없다”는 결론을 냈다. 2009년 11월 6일 <오마이뉴스>의 보도에 따르면 친일진상규명위의 핵심관계자는 해당 매체와의 통화에서 “박 전 대통령은 친일파로 분류되지 않는다”며 “지금까지 많은 논의를 했지만 박 전 대통령의 친일 행위를 입증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254890&CMPT_CD=SEARCH
http://hot-news.kr/detail.php?number=10468&thread=27r01)
박정희 혈서설 - 유일한 근거였던 만주신문 기사가 앞뒤가 맞지 않았고 신빙성을 담보할수 없어 학계에서 사장. 이에 종북단체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에 뿌리를 두고 있는 기관 ‘민족문제연구소’가 1939년자 <만주신문> 기사를 근거로 박 전 대통령이 만주군관학교에 지원하기 위해 혈서를 썼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하지만 만주군관학교 합격 발표일자(1939년 2월 24일)와 혈서 관련 기사(3월 31일)의 순서가 모순된다는 사실이 밝혀져 사실상 사장됐다(http://hot-news.kr/detail.php?number=10468&thread=27r01)
박정희는 일본군 사관학교에 입대했다.
1. 그의 입대는 김구 선생이 권유한 것이다(박정희는 김구의 아들 김신씨와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아래는 김구 선생의 비서 김정균(상해임시정부 비밀첩보원. 남의사 소속의 왕정국, 산서성 총사령관 염석산과 함께 독립 운동 전개. 해방 후 김구의 비서로 활동)의 증언.
김구 선생은 1939년 3월 어느 날 청년 박정희를 만났다. 그때 박정희는 20대 초반으로 아주 적극적인 사고를 지닌 청년이었다. 그때 처음 박정희 청년을 김구 선생에게 소개해준 사람이 김정균의 친한 친구인 신영학이라는 친구다. 신영학을 통해 소개받은 김정균은 박정희 청년의 뚜렷한 역사의식과 조국 광복의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는 김구 선생에게 소개를 하였다. 그때 박정희를 처음 본 김구 선생은 박정희를 1시간동안 부동자세로 세워 두었다. 김구 선생이 본 박정희는 키는 크지 않았지만 부릅 뜬 두 눈을 보고는 멈칫 놀랐다고 박정희가 나간 후에 김정균한테 말했다고 김정균은 기록하고 있다. 박정희 청년은 1시간 부동자세로 서 있었지만 자세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김구 선생이 박정희 청년을 세워두고 외출을 하여 40여 분만에 돌아 왔으나 박정희는 그때까지 부동자세로 서 있었다. 그때 김구 선생은 박정희가 서 있는 자리에 비밀 표시를 해 두었다. 그랬는데 박정희는 그 자리에서 1cm도 움직이지 않고 1시간을 서 있었다. 거기에 감탄한 김구 선생은 박정희 청년이 예사로운 사람이 아니라고 후에 그곳에 모인 광복군 동지들께 말했다고 한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김구 선생은 박정희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아마 1945년에 광복이 못되고 했더라면 박정희는 김구 선생을 도와 일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김구 선생이 박정희를 만주 군관 학교를 보낼려고 하였으나 박정희 청년이 적을 알아야 한다며 굳이 일본군 사관학교에 입학을 하였다고 김정균은 기록하고 있다. 박정희는 일본군 사관학교에 다니면서도 일본군의 무기정보 일본군의 전술공부 등 많은 정보를 김정균에게 알려주었다. 박정희 소좌가 일본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선양으로 떠날 때도 김정균한테 알렸다. 김구 선생은 박정희 소좌가 선양으로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김정균과 박정희 소좌는 수시로 연락을 하면서 일본군의 동태, 작전능력, 병력이동 계획을 보고했다. 결국 박정희가 일본군에 들어간 건 일종의 스파이 노릇을 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아래는 박정희가 김구를 통해 김학규 장군에게 전해준 지도라고 알려진 군사 배치도.
2. 박정희 형 박상희는 사회주의자인 동시에 일제시대 유명한 독립운동가, 언론인이었다. 일제강점기 1940년대 여운형이 결성한 건국동맹에서 활동했으며 해방 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 구미지부를 창설했고 1946년에는 민주주의민족전선 선산군지부 사무국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또한 셋째 형 박상일과도 매우 각별한 사이였고 존경하며 따랐다. 많은 좌익들이 박정희의 이러한 형들과의 관계를 강조하며 박정희도 남로당원에 가입했다고 선동하한다. 하지만 같은 이유로 그런 형과 반대인 친일적 행보를 보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일관성이 없는 모순이다. 박정희가 가장 존경하고 즐겨 읽던 책은 나폴레옹 전기였다 나폴레옹 부친은 프랑스의 식민지 코르시카의 독립군이였다. 그의 입장에서 보면 일본군에 가서 나폴레옹 처럼 군사력을 갖추어 대항하려는 계획은 그 당시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 하겠다. 북아일랜드 독립군 역시 영국군에서 배운 지식과 훈련을 바탕으로 한 아일랜드공화국군(IRA)에서 시작되었다. 박정희의 부친 박성빈도 동학혁명가였으므로 그가 친일성향이라는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다.
3. 박정희의 문경 보통학교 제자들은 한결같이 그가 몰래 태극기와 한글을 가르치며 민족의식을 가르쳤다고 증언한다. 문경보통학교에서 만주군이 되고자한 결정적 계기는 당시 일본 장학사가 방문했는데도 인사를 하지 않아 폭행을 당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박정희가 만주군 소위가 되어 고향에 가서 제일 처음 한 일은 당시 자신을 폭행한 장학사를 경호한 순사를 불러 일본도로 위협한 일.
-여운형은 일본군 내부에 있는 조선인 중 절반 이상이 비밀광복군이라고 밝혔다. 여운형의 말이 진실이라면 적어도 1/2 이상은 오히려 광복군이란 말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비밀광복군 소속이였다. 비록 이 비밀 광복군에 편입된 것이 일본군 또는 만주군에 소속된 한국인을 고향으로 돌려 보내기 위해 일본의 패전 이후 편성 된 것이라고 하나 박정희는 단순한 편입이 아니었다. 그가 광복군에서 10개월 간 광복군 3지대 평진 2중대장으로 활동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박정희는 책임자 최용덕 장군의 직속으로 편성되었다. 1중대장 이주일 중위 2중대장 박정희 중위 3중대장 윤영구 중위. 박정희가 진짜 친일행각을 위해 만주군 장교로 복무했다면 그를 광복군 장교로 편성시킨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된다.
현재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훗날 일본의 패전에 의해 본국 귀국 목적으로 임의로 편성된 비밀광복군 조직에 있던 인원까지 독립 유공자로 지정한다. 이것에 기준해도 박정희 대통령은 합법적인 비밀광복군이 된다. 이건 내 주장이 아니라 한겨레와 경향 조차도 이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박정희도 이런 기준이면 독립유공자가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4&oid=036&aid=0000008597
김규식박사의 비서실장이었던 송남헌은 그의 저서 '해방 3년사'(1권 26쪽.1990년 까치사 간행)에서 여운형과 함께 비밀광복군 결성에 참여했던 당시 일본군 소속 홍사익 박정희를 포함, 40여 명의 인물을 밝힌다. 박정희, 문용채(만군대위,군사영어학교,부군단장,육군중장예편) 최남근, 최창륜, 양국진(만주신경대 졸업,만군대위,군단장,육군중장예편) 이기건, 박임항(만주신경군관학교 1기 졸업,만군대위,군사령관,육군중장예편), 김백일, 이상열, 박준호,박동균 등이 비밀광복군 소속이다. 문용채는 "1945년 4월 박승환,박준호,이상열,최창륜과 나는 [조선건국동맹 만주분맹 군사위원회]를 조직했다. 그때 봉천비행단에는 박임항과 최창륜이 있었는데 최창륜이 2기 대표로 박정희를 추천했다. 나의 계급은 만군대위였고 그(박정희)는 소위였다"라고 증언한다. 이 외에도 창군전사, 육사졸업생 등에서 박정희가 비밀광복군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이를쓴 사람들이 박정희 정권과는 무관한 시기(사망 이후)에 좌익 계열이 쓴 책이란 점에서 오히려 신뢰할 수 있다. 비밀광복군 자체가 없다는 기존의 주장은 미 국방성과 미 국립문서보관소가 광복군 OSS 자료를 공개하면서 아무런 근거가 없어졌다. 공개된 자료중 하나인 광복軍 투쟁 전단에는 "일본군내 韓人은 때를 기다려라" "아직 전민족적으로 총궐기할 때는 아니다. 때를 기다려라. 제군들은 일군 내에서 작전을 방해하고 손상시키는 게 임무다. 자신이나 동포에게 위험이 없는 범위에서 활동하라. 겉으로는 친일(활동)을 하라"고 적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으며 이 전단은 김우전 초대 광복회장이 광복군 연락장교 자격으로 중국 남부 쿤밍(昆明) 주둔 미국의 전략첩보국(OSS)에 파견근무할 때인 1945년 4월28일 작성한 문서다. 국사편찬위원회는 미 국립문서보관소(NARA)에서 이 자료를 입수했다. 아래는 여운형의 비밀광복군 작업의 주동자 박승환의 조카 박명근의 증언
"박승환은 나의 삼촌이다. 삼촌이 요절한 뒤 나는 삼촌의 동지들을 자주 찾아갔다. 내가 심계원에 근무할 때 1군 참모장이던 박정희장군을 찾아 갔더니 삼촌의 이야기를 하면서 반갑게 맞아 주었다. 삼촌의 딸 정근이 해운대로 피서를 갔다가 익사했을 때는 군수기지 사령관으로 있던 박장군이 시체수습 등 여러가지 편리를 봐주었다. 내가 청와대 근무를 한 것도, 또 지역구 의원후보 공천을 받을 때 삼촌이 사상적으로 불온했다는 모략을 받았으나 박대통령께서는 그것을 막아 주셨다. 그분들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민족주의자라는 점을 분명히 했고,자신도 한때 그와같은 오해를 받아 군에서 홍역을 치른 적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이기청 의병정신선양회 사무총장 증언
군사혁명 후 박정희가 마지막 임정요인이었던 백강 조경환 선생 면목동 집으로 찾아와 큰 절을 올렸다. 박정희는 “제가 만주에 있던 다카키 마사오입니다” 하는데, 조선인 병사들을 독립군으로 빼돌렸던 다카키의 이름을 익히 들었기 때문에 놀라면서 반가와 했다고 증언한다. -잠깐 이 '다카키 마사오'라는 것도 재미있는 왜곡 선동 중 하나다. 당시 일제강점기에는 전 국민의85%가 창씨 개명을 완료했던 시절이다. 김대중은 목포상고 재학당시 도요다 다이쥬로 창씨개명했고 김영삼도 마찬가지로 가네무라 고유(金村康右)라는 일본식 이름을 갖고 있다. 당시 시대적 상황도 모른채 현재 잣대만을 가지고 위 인물들을 평가하며 전부 친일파라는 논리를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시대배경의 이해 없이 창씨개명을 가지고 무작정 비난하는 것은 세종대왕도 독재 정치했으니 폭군이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는 독립군을 보충해야 할 매우 어려운 상황인데 박 중좌의 활동으로 학병 12 명과 징병학병 탈출 160 명을 광복군 제 1 지대 3 구대에 편성 배치하였고, 제 3 지대에도 50 여명의 탈출 학병들을 충칭으로 보냈다"고 기록한다. 이 시기는 박정희 대통령이 제8 여단에 근무하고 있던 때와 일치한다. 박승환은 친일파의 딸 김순자와 결혼했는데 홍사익이 중매하고 이것도 여운형이 계획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거짓이라면 여운형의 친일활동 역시 이와 똑같은 전력을 근거로 친일파가 아니라고 주장한 것이므로 여운형 역시 친일파가 되어야 한다. 당시 관동군에 대한 정보는 oss 내에서는 이범석 장군이 맡고 있었으나 박정희 소좌가 정보장교로 대부분 제공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실제적으로 접근이 불가능한 고급정보를 유출 할 사람이 박정희 소좌를 제외하고 없다는 것이 당시 상황에서 합리적 정황근거로 부정하기 힘들다.
박정희가 항일정신이 강한 민족주의자 였단 증언들은 아래에도 많다
http://cafe.naver.com/nazzis/11178
아래는 광복군에 대한 자료
http://blog.naver.com/qnwkkr/120064777329
-훗날 박정희가 5.16 군사혁명 직후 한일관계를 적극적으로 개선시키려 했다는 것을 근거로 친일파로 몰아가는 이도 많다. 하지만 이는 국가발전을 위해서라면 물불 안가리고 뛰어든 박대통령의 의지를 단순화시킨 모함에 불과하다. 미약했던 조국의 과학기술 발전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일본인에게 훈장을 주면서까지 기술을 들여오려는 노력을 '친일'이라는 굴레로 가뒀다. 한국은 경제성장이 절실히 필요했고 박정희는 빠른 경제성장을 이룩하기 위해 국내 반대를 무릅쓰고 한일회담을 맺었다. 그렇게 국교를 정상화 하고 6억달러를 제공받아 대한민국 경제개발의 주춧돌로 삼았다. 박정희 대통령 당시 대한민국의 성장은 그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 사실이다.
..... 나는 한일 국교 정상화를 추진한다고 하여 야당으로부터 매국노라는 욕을 들었으며 월남에 국군을 파병한다고 하여,"젊은 이의 피를 판다"고 그들은 악담을 하였읍니다. 없는 나라에서 남의 돈이라도 빌려와서 경제건설을 서둘러 보겠다는 나의 노력에 대하여 그들은 "차관 망국"이라고 비난하였으며, 향토예비군을 창설한다고 하여, 그들은 국토방위를 "정치적 이용을 꾀한다"고 모함. 국토의 대동맥을 뚫는 고속도로 건설을 그들은 "국토의 해체"라고 하였습니다 .....
1969. 10. 10. 연설 중
역사는 객관적이고 상세하게 들여다봐야 한다. 그래야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다. 이념과 사상이 개입된 역사는 필연적으로 왜곡을 낳을 수 밖에 없다. '다까끼 마사오, 박정희는 만주군과 일본 육사에서 활동했으니 친일파다'라는 단순한 한마디가 대한민국 발전의 영웅을 괴물로 만들어놨다. 한 문장의 선동을 반박하기 위해서는 수천페이지의 문서와 근거가 필요하다고 한 괴벨스의 말이 와닿는다. 하지만 그 반박이 완성됐을때 사람들은 이미 선동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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