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두달전이었을거다. 가장 좋아했던 밴드의 신보가 나온지도 모른채 정신없이 살고있었다. 오랜만에 동생과 술한잔하는데 술집에서 익숙한 목소리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술기운으로 약간 어지러운 가운데서도 그 그리운 목소리는 너무나도 선명하게 내 귓등을 때렸다. 들고있던 술잔을 내려놓고 귀에 온 신경을 집중시켰다. 넬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길로 술집을 뛰쳐나가서 음악사로 향했다. '넬 신보 주세요' 그들의 새로운 소리는 이렇게 다가왔다. 집에 돌아가서 들뜬 마음으로 재생버튼을 누르고 약 한시간 뒤 마지막 트랙이 끝났을 때 나는 씁쓸한 기분을 감출수가 없었다. 기대가 너무 컸던탓일까? 솔직히 한번 돌리고 오디오를 꺼버렸다. 거기엔 지금까지 그들의 앨범을 처음 들을때마다 매번 느꼈던 설렘과 가슴벅찬 감동도 없었고 비 오는 거리를 까만 우산을 쓰고 걷는듯한 우울함도 없었다. 김종완 특유의 귀를 잡아끄는 멜로디 라인은 눈에 띄게 줄었고 가슴을 후벼파는 가사도 힘을 잃었다. 에서의 'Tokyo', 'Fisheye Lens' 등과 같은 실험적인 트랙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한참 실망하고 화가났다. 그토록 기다리던 그들이 이정도 밖에 안됐나, 건방진 얘기지만 나를 만족시키지 못한 그들에게 화가 났다. 그렇게는 수많은 씨디와 함께 장식장에 쳐박혔다.
그렇게 넬을 잊고 살던중 두달 뒤인 오늘. 아침에 근무서는데 그냥 정말 갑자기 'In days gone by'의 기타라인을 흥얼거렸다. 근데 흥얼거리면서도 그게 도대체 무슨곡인지 기억이 안났다. 그리고 엠피쓰리의 아티스트 목록을 훑다가 넬의 곡이란걸 깨달았다. 그리고 다시한번 이들의 새 이야기를 만나보기로 했다. <Slip Away>는 기존앨범들+산책앨범(4집과 5집 사이의 어쿠스틱앨범)을 반씩 섞어놓은 느낌을 주는 앨범이다. 대부분의 트랙은 러닝타임이 5분내외이고 6분을 넘는트랙도 쉽게 눈에 띈다. 지금까지 이건 넬만의 최고 강점이자 약점이기도 했다. 자신들이 하고싶은 말을 빠짐없이 온전히 전할수 있다는것이 강점이라면, 청자가 지루함을 느껴 트랙을 넘겨버리게 만든다는것은 작곡가에게 더할수 없는 슬픔을 안겨주는 치명적 약점이다. 넬은 기존 앨범에서 그들만의 탄탄한 멜로디라인과 뛰어난 가사로 이를 여타 다른 누구도 흉내낼수없는 뛰어난 장점으로 승화시켰다. 하지만 신보에서 이 장점은 많이 약해진듯하다. 첫번째 트랙인 'The Ending'은 그들의 어쿠스틱 앨범인 버전의 백색왜성을 떠올리게한다. 잔잔하게 시작하여 종국에 가서는 폭발해버리는 그 아름다운 곡은 넬 곡중 가장 명곡으로 꼽힌다. 하지만 'The Ending'은 '초록비가 내리고 파란달이 빛나던 온통 보라빛으로 아름답게 물들던' 넬이란 별이 이젠 빛이 바래버리고 만것같은 기분이 들게한다. 두번째 트랙인 'Go'의 잔잔한 인트로 뒤에 이어지는 '끝이없는 겨울, 얼어붙은 서울. 올려다본 하늘, 온통 너란 그늘'등과 같은 가사는 한없이 아름답고도 슬프다. 멜로디는 점점 증폭되어 결국 정점에서는 폭발할듯 울부짖는다. 보컬역시 잔잔하게 노랫말을 읊어대다가 그들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수있는 백그라운드 기법으로 울부짖으며 마무리 짓는다. 그리고 맨 마지막엔 의 '치유'에서 들어본듯한 신디사이저소리가 흐른다. 하지만 러닝타임이 너무 길어서인지 마지막에 집중력을 잃게 되고 신디소리는 들리는듯 마는듯 흐지부지 되고만다. 다음트랙은 이 앨범에서 가장 잘 만든곡이라 생각되는 'In days gone by'. 단순하지만 명료한 통기타 소리 위에 멜로디가 덧입혀지며 곡이 시작한다. 너무나 포근하여 듣는이로 하여금 정신을 놓게 만드는 멜로디이다. 멜로디가 이쯤되면 청자는 멜로디에 빠져서 가사가 들리지 않게된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래왔듯 김종완은 자신의 가사를 그리 쉽게 날아가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후반부의 째깍대는 시계소리를 알게모르게 강조함과 동시에 자신의 아름다운 목소리는 저편으로 감추려하지만 이는 감추기는 커녕 그 오히려 어느때보다도 귀에 박히게 하려는 김종완의 의도이다. 타이틀격인 '그리고 남겨진것들'. 전작 의 타이틀이었던 '기억을 걷는 시간'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라 할 수 있는 이 곡은 드럼소리와 동시에 김종완의 애잔한 보컬이 덧입혀짐으로써 가사에 집중하도록 돕는 구조이다. 그런 노력에 걸맞게 이곡은 앨범 중 가장 가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곡이다. 'Standing in the rain'은 여타 넬의 곡들과 비슷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아니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어디선가 들어본 곡같다. 조용히 읊조리다가 어느순간 활짝 멜로디가 활짝 열림과 동시에 보컬이 치고나오는 지극히 넬스러운 곡이다(마음을 잃다,Good Night등과 같은). 'Losing Control'은 잔잔한 통기타 소리가 반복된다. 졸린다. 몇개 안되는 기타 튕기는 소리를 그것도 같은 소리를 5분 동안이나 반복해서 듣는건 솔직히 진짜 별로다. 꼭 가사를 영어로 했어야하는지도 의문이고. 'Beautiful Stranger'는 그나마 이번 앨범에서 가장 실험적인 사운드를 보여주나 혁신적이지는 않다. 게다가 이 역시 분명 전작에서 들어본 느낌을 지울 수 없다. 'Promise Me'의 연장선상에 놓인듯한, 혹은 메이저 데뷔앨범인<Let It Rain>의 색을 입은듯한 'cliff parade'는 이 앨범 중 가장 rocking한 트랙이다. 마칭드럼과 현악기소리로 시작하는 이곡은 이전트랙들에서의 지루한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트랙이다. 1절이 끝날때까지만 해도 청자는 이 롹킹한 트랙에 마음을 빼앗긴다. 하지만 후반부에 가서는 계속해서 같은 가사, 멜로디, 사운드가 반복 되는 이곡에 지루함을 느낀다. 소음으로 변한다. 끝없이 반복되는 'let it crash'라는 외침과 시끄러운 기타소음에 놓인 청자는 그 시끌벅적한 사운드를 귀에 꽂아놓지만 속으로는 딴생각을 한다. 끊을 타이밍을 잃은것이다. 이 곡 역시 '너무' 길다는 것이다. 'Hopeless Valentine'역시 그저그렇다. 마지막 트랙인 'Slip Away'는 혹시나 하는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밋밋한 곡이다.
밴드는 신보를 낼 때 기존 스타일을 고수할것인가아니면 새로운 스타일로 전향할것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한다. 만약 전자를 택했을 경우 대중들은 '걔들 노래는 다 똑같아'라는 소릴 할 것이고, 후자를 택했을 경우 '변했다'라는 소릴 할 것이다. 참 기가 막힐 노릇이다. 이래도 불만 저래도 불만이면 그냥 김종완 잘하는대로 뻐큐나 날리면서 '넌 듣지 마 이새끼야'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을거다. 하지만 그건 갤러거들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밴드는 불교에서 말하는 '중도'를 잘 타야한다. 기존의 음악과 새로운 시도를 말 그대로 '적당히' 융합해야한다. 그 적당히의 정도는 밴드가 조절해야 할 과제이고. 솔직히 이들의 빠돌이를 자처하는 나로서는 이번 앨범이 맘에 든다고는 못하겠다. 그들이 군대에 가있는동안 나 역시 군대를 다녀왔고 이는 나나 그들에게나 여러면에서 많은 변화를 안겨주었을것이다. 2년전의 나였다면 몰라도 지금의 나는 당신들의 음악에 공감하기 어렵다. 마음껏 슬퍼하고 우울해하고 사랑에 찌질대던 그 시절은 당신들 말마따나 '기억의 저편'으로 흘러갔다. 당신들의 음악에 빠져 허우적대기엔 지금 내 인생이 너무 정신없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난 당신들 앨범이 나오면 반사적으로 레코드샵을 찾을것같다.
P.S. 보름 가까이 지속되던 금연이 이 앨범때문에 깨졌다. 담배를 피워물지 않고서는 못배기는 트랙이 몇 있다. 빌어먹을
트랙 리스트
1. The Ending
2. Go
3. In Days Gone By
4. 그리고, 남겨진 것들
5. Standing In The Rain
6. Loosing Control
7. Beautiful Stranger
8. Cliff Parade
9. Hopeless Valentine
10. Slip A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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