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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Strok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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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인가

 

민주사회의 지식인이라면 꼭 만나야 할 한 권의 책이 있다. 현대인의 필독서이자 이제는 고전이 된 프리드리히 A. 하이에크의 『노예의 길The Road to Serfdom』이다. 부제목인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진실’이 말해주듯이 이 책은 사회주의의 위험성을 근본부터 파헤치고, 나아가 민주주의의 타락을 막아 번영을 유지하기 위한 해법을 제시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민주주의 방식으로 사회주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다는 생각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설명한다. 사람들은 흔히 ‘평등한 사회’ ‘삶의 질적 보장’과 같은 사회주의적 구호를 좋아한다. 사회주의로 가는 길은 이처럼 선의善意로 포장되어 있다. 하지만 사회주의 실험은 궁극적으로 현실정치에서 전체주의로 귀결되곤 하였다. 의도가 좋다고 해서 반드시 결과가 좋은 것이 아니다. 경우에 따라 그 목적이 이상적일수록 결과는 더 처참해질 수도 있음을 역사는 보여준다.

 

저자가 이 책을 쓰던 1940년대 당시는 사회주의가 다양한 형태로 번성하던 시기였다. 그럴듯한 목표를 내세워 국민을 현혹하고 경제를 조정하고 사람들을 통제하려던 시도들은 결국 독일의 나치, 소련의 공산주의 같은 전체주의임이 분명히 드러났다. 사회주의가 전체주의로 가는 위험한 통로였음이 밝혀진 것이다. 이처럼 사회주의로 가는 길은 바로 자유의 길이 아닌 독재와 노예의 길이었다.

 

『노예의 길』은 1944년 3월 영국에서, 그리고 같은 해 9월 미국 시카고대학교 출판부에서 출판되었다. 이 책은 출판과 동시에 6개월 만에 3만 부가 팔려나갔고, 이후 여러 번의 재판을 통해 미국에서만 23만 부 이상이 팔렸다. 2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로 자리잡았다. 소련이 몰락하던 시기에는 소련 내 지식인들이 몰래 번역해 돌려보는 일까지 있을 정도로 파급력이 컸다.

 

사회주의는 노예의 길

 

『노예의 길』은 유럽에서 나치즘이 극성을 부리던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저술되었다. 전체주의가 세계를 휩쓸어버릴 것 같던 그때, 문명사회의 희망을 밝히는 한 권의 위대한 책이 탄생한 것이다. 이 책은 전체주의로 변질될 수 있는 사회주의의 위험성을 전 세계에 알려 민주사회가 타락하지 않도록 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21세기의 관점에서 보면 전체주의는 낯설기만 하다. 그런 나라를 찾기도 어렵다. 얼마 전만 해도 무아마르 카다피가 지배했던 리비아가 있었지만, 이제는 아프리카 몇몇 나라와 북한만 남았다. 이제는 그런 전체주의 국가와 독재자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이상해 보이는 시대이다.

 

하지만 지난 100년의 역사를 돌아보면 민주국가들이 쉽게 전체주의 국가로 타락한 예를 볼 수 있다. 미치광이 학살자로 불리는 히틀러는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등장했다. 이후 독일사회는 그럴듯하게 들리는 선동을 통해 사회 전체가 하나의 공통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통제된 사회가 되었고, 그 결과 국가 기본원칙을 훼손하면서까지 집단적으로 움직이는 사회로 변질되었다. 다시 말해 독일의 나치즘은 사회주의 사고방식으로 사람들을 현혹하고 집단화시킨 결과이며, 바로 전체주의 그 자체였다.

 

사회주의의 뿌리는 깊다. 유토피아는 인류가 오랜 기간 품고 있던 환상이었다. 철학자 플라톤은 이상국가를 꿈꾸며 위대한 철인이 나타나 정치를 해야 한다고 외쳤다. ‘철인군주가 통치하는 완벽한 이상국가’라는 꿈은 사람들을 현혹시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 이상사회는 독재자가 전횡하는 지옥이 되고 만다. 독재적 성향의 정치인일수록 현실을 유토피아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소리 높여 외치는데, 그것은 사탕발림일 뿐이다. 특히, 사회주의자들만큼 세상을 어지럽히고 타락시킨 경우도 찾기 어렵다. 결국 이상국가론에 이끌려 사회를 완벽한 세상으로 만들겠다는 유혹에 빠지다보면, 자신과 수많은 사람의 자유를 희생시키고, 모두를 노예의 길로 이끌게 된다.

 

민주사회를 지키는 일은 간단하지도 쉽지도 않다. 어느 순간 국민을 현혹하는 민중주의자가 나타나 사회를 전체주의로 끌고 갈지 아무도 모른다. 나치즘의 독일, 공산주의 소련 같은 나라는 아니었지만, 유럽의 선진국가도 정부의 경제개입이나 통제의 함정에 수시로 빠져들었고, 사회복지와 소득재분배 같은 사회주의 정책실험은 늘 경제시스템의 근간을 흔들었다.

 

그렇다면 이 책의 현대적 의미는 무엇일까? 밀턴 프리드먼은 이 책의 출간 50주년 기념판 서문(1994년)에서 “불행하게도, 집단주의에 대한 억제력은 정부의 성장을 억제하지는 못하였다. 오히려 정부의 성장을 다른 방향으로 돌리게 하였다. 정부가 직접 생산활동을 관리하는 일로부터 사적 기업활동을 간접적으로 규제하고, 특히 다른 사람에게 주기 위해 일부 사람들로부터 세금을 짜내는 것을 포함하여 소득이전정책을 시행하는 것으로 그 초점이 바뀌었다. 이 모든 것들은 평등과 빈곤의 퇴치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졌으나 실제에서는 특정 이해집단들에 대한 변덕스럽고 모순되는 잡탕 보조금에 지나지 않았다. 그 결과 국민소득 가운데 정부에 의해 지출되는 부분은 계속 증가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또 프리드먼은 “1944년 처음 발간되어 센세이션을 일으켰을 당시보다 현재의 미국에 더 잘 적용될 수 있는 핵심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쓰고 있다. 그의 지적은 지금 우리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온갖 사회주의 정책들이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를 타락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소중하게 지켜야 할 개인의 가치와 선택의 자유 원칙들은 훼손되고 있으며, 약자를 보호하자는 정치적 구호를 앞세워 경제통제 정책과 정부개입을 확대시키고 있다. 그 결과 정치적 이익을 쟁취하기 위한 계층 간 갈등의 골은 깊어지고 있다.

 

시대를 앞선 사상가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출생한 프리드리히 A. 하이에크는 비엔나대학교에서 법학과 정치경제학 두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루트비히 폰 미제스의 지도하에 연구를 수행했으며, 1929~1931년까지 비엔나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강의했다. 1931년 영국으로 옮겨 런던대학교 교수로 지내며 1938년 영국 시민권을 취득하였다.

 

그는 독일의 전체주의에 환멸을 느껴 영국으로 왔지만, 영국에서도 사회주의가 점차 확산되자 충격을 받는다. 영국에서 벌어지던 사회보장 논쟁이나 공기업화 추진은 이미 독일의 나치당이 정치를 장악하는 과정에서 이용했던 수단이었다. 전체주의의 뿌리가 사회주의이며, 사회주의 정책을 받아들이다보면 그 사회는 점차 전체주의로 빠져들 수 있음을 간파했던 하이에크는 영국과 서방세계가 독일처럼 타락해가는 것을 염려해 『노예의 길』을 집필하게 된다.

 

하이에크는 이 책의 서문(1943년 12월)을 통해 이 책이 정치서적임을 밝히면서, “다른 속뜻이 있는 아마추어와 가짜 만병통치약을 팔려는 돌팔이들이 이 문제에 대한 논의를 주도하고 있고, 이에 따른 위험수위가 너무 높아져 여론에 경고음을 울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며 사회주의자에 대한 포문을 열었다.

 

뉴욕타임스의 경제편집장이었던 헨리 해즐릿은 “하이에크가 우리 세대의 가장 중요한 책 가운데 하나를 썼다.”고 격찬했고, 전 세계 지식인들이 그를 주목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기에는 이미 세계의 흐름은 사회주의로 기울어 있었다. 독일과 일본의 패배로 전쟁은 막을 내렸지만, 자유진영 국가에서는 오히려 사회주의가 점차 확산되었다. 패전국을 민주국가로 관리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겨웠던 서방국가들은 오히려 자신들의 내부에 일어나는 사회주의를 저지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자율적 시장치유보다는 장기적 부작용을 동반하더라도 당장의 정부개입과 혜택을 원했고, 이러한 추세는 1930년 대공황 이후 197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전 세계가 케인스의 정부개입주의에 휩쓸린 상태에서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은 또 다른 싸움의 시작일 뿐이었다. 자유진영은 제2차 세계대전의 동맹국이었던 소련과 중국이라는 또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싸움, 그리고 서방국가 내부에서 자라는 사회주의 세력과의 싸움에 직면하게 된다. 영국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노동당의 집권으로 정부의 경제통제가 강화되었고, 미국에서도 정부개입주의는 확산되고 있었다.

 

하이에크의 주장이 현실정책에 반영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지만, 사회주의가 결국 패망할 수밖에 없다는 하이에크의 예언은 결국 현실화되었다. 국가 내부에서 사회주의를 누르고 자본주의 원칙을 되살리는 데 성공한 서방세계는 사회주의 국가들을 전쟁 없이 몰아내는 데도 성공했다.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을 눈으로 확인한 하이에크는 1992년 독일 프라이부르크에서 9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주의가 종말을 고한 것은 아니었다. 사회주의가 꽃 피운 전체주의 국가와의 싸움은 끝났을지 모르지만, 자본주의 국가 내에 터를 잡은 사회주의라는 내부의 적과의 싸움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제3의 길, 자본주의 4.0에서 보듯이, 전 세계적으로 사회주의를 적당히 가미한 유사 자본주의는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 자본주의 이외에 대안이 없다는 점은 분명해졌지만, 자본주의를 위협하는 사회주의의 변화는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을 바꾼 사상가, 하이에크

 

“세상을 바꾸는 것은 정치가 아니고 사상이다.” 하이에크의 말이다. 사상이야말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을 갖는다. 이런 점에서 그가 남긴 자유주의 사상은 우리 사회의 자산인 셈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회가 침체되고, 어떤 사회가 부유해질까? 문제는 방향에 있다. 올바른 방향의 사상을 선택하는 사회만이 발전을 지속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사회주의를 경계하고 자유주의를 지향하는 정치가 바로 참다운 정치라 할 수 있다.

 

하이에크는 미제스와 더불어 오스트리아학파를 대표한다. 그는 경쟁 과정을 소비자의 수요와 더 나은 생산방식을 발견해가는 절차이자, 누가 살아남을지 모르는 세상에서 정보결핍을 극복해가는 과정이라고 보았다. 자원의 효율적 배분 문제의 근본에는 늘 지식의 문제가 있다. 사람들이 완전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면 시장은 필요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 사람들은 그런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시장을 통해서만 해법 찾기가 가능하다. 시장이 바로 집단적으로 지식을 만들고 창조해가는 곳인 셈이다. 그런 지식창조가 가능한 체제가 바로 자유시장경제이다.

 

반면, 정부는 민간의 지식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 그래서 정부의 간섭과 개입을 중시하는 국가는 시장경제를 중시하는 국가와의 경쟁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지식을 과신해 모든 문제를 합리적으로 설계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만, 늘 사회주의 방식으로 계획을 세우고 실패하는 일을 반복하게 된다. 정부는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다. 시장 흉내를 낼 수 있지만 시장을 대체할 수 없는 한계를 갖고 있다. 심지어 정부는 그 어떤 재화의 가격 하나도 제대로 결정할 수 없다. 경쟁의 결과를 미리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하이에크는 1947년 스위스에서 루트비히 폰 미제스, 밀턴 프리드먼 같은 자유주의자 36명이 참여하는 하나의 컨퍼런스를 조직하였다. 이것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몽페를린 소사이어티Mont Pelerin Society이다. 전 세계 자유주의자들의 모임인 이 협회에는 노벨상 수상자인 게리 베커, 제임스 뷰캐넌, 로널드 코스 등이 주요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그는 『노예의 길』 외에도 기념비적인 책들을 남겼다. 『개인주의와 경제질서』(1949), 『자유헌정론』(1960)과 『치명적 자만』(1988)이 대표적이다. 1950년부터 1962년까지 미국 시카고대학에서 연구생활을 한 후 다시 유럽에 돌아온 하이에크는 『법, 입법 그리고 자유』(1973)를 집필했고, 1974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하였다.

 

하이에크는 세상을 바꾼 사상가이다. 그가 내놓은 사상과 정책은 당장의 인기를 얻지는 못했지만, 장기적으로 세상을 더 풍요롭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하이에크의 사상은 1970년대에 와서야 현실정치에서 채택되기 시작했다. 하이에크의 사상을 받아들인 영국의 대처 수상과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은 시대의 흐름을 바로 세운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다. 결국 하이에크의 사상이 20세기 후반을 다시 번영의 시기로 돌려놓았다.

 

하이에크의 해법은 중국에서도 빛났다. 등소평은 하이에크를 초청해 수천만 명이 굶어 죽은 사회주의 시스템을 어떻게 고쳐야 할지 경청했다. 하이에크가 내놓은 경제발전을 위한 처방은 간단하고 분명했다. 재산권 보호와 거래의 자유였다. 바로 정부가 소유했던 농지를 사유화하고 경작물의 사유화와 거래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를 받아들인 중국은 3년 만에 식량 자급을 달성하게 된다. 국가가 해준 것은 민간이 알아서 먹고살라고 내버려두고, 자기가 수확한 것은 자신이 갖도록 해준 것이 전부였다. 정부가 나서지 않고 내버려둔 것이 기아饑餓 해결의 열쇠였다.

 

우리나라와 북한은 과거 비슷한 경제수준에 있었다. 오히려 북한에는 일본 제국주의가 남긴 산업시설이 많았다. 하지만 67년이 지난 지금 대한민국은 산업화에 성공한 민주국가로, 북한은 최악의 전체주의 국가로 변했다. 그 차이는 근본적으로 자유주의를 받아들이는가에서 나왔다. 북한을 전체주의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처방을 하이에크는 이미 수십 년 전에 내놓은 것이다.

출처: http://m.kin.naver.com/mobile/open100/detail.nhn?d1id=4&dirId=409&docId=1432055&qb=64W47JiI7J2YIOq4uA==&enc=utf8§ion=kin&rank=2&search_sort=0&spq=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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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굿. 사놓고 천천히 읽고 있다. 너무 멋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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