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불안의 개념
나는 지금 내 상황이 불만족스럽다. 원하는 걸 이루지 못하고 있어서다. 난 늘 불안했다. 꾸역꾸역 홀로 서울에 올라와 혈혈단신 모든 걸 해냈는데 그럴수록 이 도시에 계속 붙어있을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그렇게 오고 싶어 했던 서울이기에 내쳐질까 두려웠다. 그래서 더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했다. 그런데 그렇게 쌓아오다보니, 쌓아놓으니 더 불안하다. 이렇게 쌓아둔 게 무너질까 겁나서다. 불안감을 없애려 노력했고 이뤄왔으나 불안감은 가시지 않았다. 아니, 더 불안해졌다. 성취는 또다른 불안의 시작이다. 성취는 언제나 불안을 동반한다. 나를 둘러싼 불안을 분석하고 싶어서 키에르케고르의 불안의 개념을 꺼내들었다. 근데 세 달 동안 첫장도 채 못 읽었다.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짜증나는데 글이 읽힐리 만무하다. 이 글은 읽을 수 없어서, 나를 정리하기 위해서, 스스로 키에르케고르가 되어보기 위해서 쓴다. 나를 둘러싼 슬픔을 직시하고 극복하려 한다. 불안을 읽을 게 아니라 불안을 써보자. 이 글 제목이 불안의 개념인 이유다. 내가 보는 불안은 뭘까. 사람들은 왜 불안해 할까?
모든 사람은 불안을 안고 살아간다. 좋아하는 사람을 차지하지 못할까, 연인이 곁을 떠나지는 않을까. 취업 못하면 어쩌지, 회사에서 잘리지 않을까. 돈을 벌고 싶다, 재산을 잃으면 어쩌지. 행복해지고 싶다, 행복이 사라지면 어쩌지. 뭔가를 원하는 사람도, 원한 걸 손에 넣은 사람도 모두 불안에 휩싸여있다. 성취는 언제나 불안을 동반한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항상 무언가를 갈구한다. 계속 얻어서 자신의 불완전성을 충족시키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채워도 완벽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속세를 떠나기도, 아예 포기해버리기도 한다. 부처는 모든 고통이 집착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집착을 버리고 잡다한 소유욕을 제거해서 진리를 얻기 위한 핵심만 남겨둔 채 인생을 살라면서 말이다. 무소유의 논리다. 그러나 종교인을 제외한 대부분의 범인(凡人)들은 그렇게 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완벽해질 수 없다고 해서 삶을 포기하거나 채우려는 생각을 버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사실 불안은 여기서 시작한다. 불완전한 나를 채우기 위해 노력하지만 채울 수 없을 때, 얻었지만 또 다른 걸 원할 때 불안을 느낀다. 방금 있었던 일을 하나 예로 들어보겠다. 흡연자인 나는 담배를 피우기 위해 도서관을 나섰다. 그런데 학교에 오면서 깜빡하고 라이터를 챙겨오지 않아 담배에 불을 붙이지 못했다. 담배는 스트레스 해소용 기호식품이지만 필 수 없으니 오히려 더 화가 났다. 하는 수 없이 옆 사람에게 라이터를 빌려 담배를 피우고 나서야 스트레스가 조금 줄었다. 난 원하는 불을 얻었고 흡연이라는 목적을 달성했다. 그렇다고 불안이 사라질까? 아니다. '다음엔 어떻게 피지?' '또 빌려야 하나?' '라이터 사러 편의점까지 가야 하나?' 등 또 다른 고민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담배를 피우지만 해소는커녕 이런저런 스트레스가 더 튀어나온다. 애초에 이를 해결하는 방법이 있다. 담배를 끊으면 된다. 부처가 집착의 대상을 원천적으로 소멸시켜야 한다고 말했듯이. 그러나 우리는 부처가 아니기에, 승려가 아니기에 속세에 집착을 버릴 수 없다. 계속 원할 수밖에 없고 갈구한다. 그래서 고통스럽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불안을 회피한다. 고통이나 불안을 경감하고 싶어 한다. 혼자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기에 혼자 살아갈 수 없고 혼자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내가 남에게 라이터를 빌린 것처럼 말이다. 불안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자신의 불안을 경감하기 위해 타인에게 마음을 털어놓고 문제를 일시적으로 해결한다. 불안을 덜기 위해 슬픔을 공감받는다. 친구들과 수다 떨고 술잔을 기울이며 서로 의지한다. 문제가 절대 완벽하게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스스로도 안다. 그런데도 계속 남한테 의지한다. 왜냐? 남과 문제를 공유하는 것 자체로 어느 정도 불안과 스트레스가 경감되니까. 남이 내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해줄 거라 기대하는 사람은 없다. 그래도 계속 이야기를 한다. 그럴수록 현실감은 무뎌진다. 문제해결법을 고민해야 할 시간에 상담이라는 정신의 아편에 취해버린다. 본인의 상황 인생 가치관 생각을 본인만큼 아는 사람은 없다. 따라서 그 문제를 가장 풀어낼 수 있는 건 본인뿐이다. 누구나 다 아는 얘기다. 고민을 털어놓는 사람도, 불안을 얘기하는 사람도 모르진 않는다. 그럼에도 누군가를 붙잡고 얘기하고 정신과에 들러 비싼 비용을 지불해가며 상담이란 걸 한다. 대화하다보면 응어리가 풀린다는 핑계로. 그러면서 불어나는 건 상담사의 지갑과 상대방의 스트레스 뿐이다.
정리해보자. 인간은 기본적으로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충족을 바란다. 하지만 결코 완벽한 충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유일한 해법은 원인을 아예 제거하는 것인데 그 끝에는 출가나 현실도피가 자리 잡고 있다. 결국 이 불완전한 인생을 계속 채워야 불안이 해소되기에 끊임없이 갈구한다. 하지만 해결될 수 없어서 대화와 소통이라는 차선책을 택한다. 불안의 원인은 욕심이다. 더 나은 삶을 살고자, 나은 인간이 되고자 하는 욕심 때문에 인간은 불안해한다.
2. 두려움의 개념
두려움은 불안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다. '원하는 걸 얻지 못하면 어쩌지?'하는 불안은 '원하는 걸 얻지 못한 채 다가올 미래'라는 두려움으로 이어진다. 실직의 불안은 취직하지 못한 채 비정기적인 소득으로 살아갈 앞날에 대한 두려움이다. 재벌집 아들은 취직 걱정이 없고 시험 끝난 수험생은 시험 걱정을 않는다. 현재 갖고 있던 불안이 해소돼서다. 대신 다른 미래에 대한 걱정은 여전하다. 즉 두려움은 예측 불가능성에 기인한다. 앞으로 뭐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두려워한다는 말이다. 죽음의 공포는 존재 자체가 이 세상에서 소멸되어 앞으로는 존재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경제체제에의 불안은 나라가 망해서 지금 같은 삶을 영위하지 못하는 데서 온다. 취업 사랑 돈 명예 행복 등 세상 대부분의 걱정은 결국 불확실한 미래 탓이다. 그렇기에 인생은 필연적으로 두려움을 동반한다. 두려움 없는 인생은 미래가 없거나 미래가 보장된 인생이다. 따라서 인간이 두려움을 갖는 건 당연한 이치다.
성취는 만족을 주지만 불안도 내포한다. 쌓아놓은 노력이 없으면 실패가 두렵지 않다. 쌓아둔 것 자체가 없었다면 무너짐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쌓으면 쌓을수록 높이 디딜 수 있고 더 높은 곳을 바라본다. 불안의 상대성은 여기서 나온다. 한 문제를 틀렸을 때 전교 일등은 한 개나 틀렸다고 절망하는 반면 전교 꼴등은 한 개 밖에 안 틀렸다고 좋아한다. 잡힐 듯 잡히지 않을 때 더 불안하다. 다다르기 위해 노력한 사람은 노력하지 않은 사람에 비해 훨씬 큰 좌절을 맛본다. 누군가 실패에 상처받지 않는다면 난 감히 그가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하겠다. 노력할수록 크게 상처받는다는 걸 알지만 그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만이 성취할 수 있다. 물론 실패시의 좌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아프다. 그래서 행복하려면 남의 도움이 아닌 자신의 노력이 필요한 게다.
무언가를 좋아할 때는 싫어할 때보다 훨씬 많은 경험이 필요하다. 쇼펜하우어가 말했듯 인간은 즐거움보다 슬픔을 훨씬 오래 기억한다. 승리의 즐거움보다 패배의 쓰라림을 훨씬 오래 기억한다. 합격의 기쁨보다 탈락의 슬픔이 몇 배는 더 뇌에 강력하게 틀어박힌다. 선생님께 칭찬받았던 순간은 금방 잊히지만 친구들 앞에서 조롱당했던 순간은 평생 기억한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후에는 행복했던 시간보다 못해준 것, 싸운 것이 더 많이 생각난다. 행복한 순간을 사진으로 남기는 이유는 찰나의 행복을 박제하기 위해서다. 행복은 휘발성이 너무 강해 붙잡아두지 않으면 금세 날아간다. 반면 불행은 너무도 오래 머무른다.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이 아니고야) 누구도 불행한 순간을 붙잡아두고 슬픔을 곱씹으려 하지 않는다. 연인과 싸우는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 사진을 찍는 정신 나간 인간은 없다. 따라서 대상에 좋은 기억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나쁜 기억을 부여할 때보다 수십, 수백 배나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행복하기 위해선 노력이 필요하다. 계속 뇌에 행복한 기억을 주입하고 의식적으로 행복하고자 해야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 가만히 앉아 행복하길 바라는 건 나무 아래 서서 사과가 떨어지길 기다리는 것과 같다. 반면 불행은 쉽게 다가오고 금방 녹아든다. 노력할 필요가 없다. 그 자리에 가만있으면 도태되고 나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이 발전해서다. 발전하는 타인을 보고 도태된 자신에 환멸을 느끼며 종국에는 절망한다. 그게 인간이다.
인간이 불안해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있어야 할 대상이 사라질 때다. 내가 주머니에 있어야 할 라이터가 없어졌을 때 불안해한 것과 같다. 현대인들은 매일 만지작거리는 스마트폰을 집에 두고 왔을 때 불안해한다. 모든 중독은 불안의 방지다. 익숙함은 권태도 주지만 동시에 불안을 내포하고 있다. 사람들은 대개 옆에 있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을 때 불안감에 휩싸인다. 아기들은 엄마가 없어지면 울음을 터뜨리고 연인들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말할 수 없는 슬픔에 빠진다. 전화를 하면 받아야 하는데 받지 않는다. 이별이 슬픈 이유는 이것이다. 대상이 애초에 거기 없었다면 사라졌을 때 불안할 이유도 없다. 후술하겠지만 타인의 죽음이 두려운 이유 역시 고인을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에서 온다. 내 곁에 있었던 적이 있기 때문에, 내가 그를 겪은 경험이 있기 때문에 사라지는 불안감을 두려워한다. 우리가 생판 남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히틀러가 한 사람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수십만의 죽음은 통계수치일 뿐이라고 한 건 이런 맥락이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사람이 죽었다고 슬퍼하지는 않는다. 나치가 그런 천인공노할 짓을 거리낌 없이 행할 수 있었던 이유다. 경험의 부재는 두려움과 슬픔을 제거한다.
한편 두려움은 타인, 사물, 대상이 지닌 것이기도 하다. 내가 A를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A가 내게 두려움을 안겨준다. 비오는 밤거리를 걸으며 떠오른 생각을 얘기해볼까 한다. 난 종종 비오는 밤거리를 걷는다. 비 냄새와 밤의 고요함, 한산함이 좋아서다. 고등학생 시절, 야간자습 후 터벅터벅 집에 오면서 많은 생각을 했고 꽤나 괜찮은 사색적인 결론을 얻었다. 전경으로 복무하던 때엔 출동이라는 명목 하에 바깥구경을 할 수 있었고 도시 치안을 유지한다는 묘한 자긍심도 느꼈다. 그런데 부모님께서는 제발 밤에 돌아다니지 말라고 하신다. 범죄의 위험 때문이다. 2년을 경찰서에서 보내며 알게 된 이런저런 사실 중 하나는 비오는 날에 범죄율이 치솟는다는 점이다. 습도와 불쾌지수가 높아지면 우발적인 범행으로 이어지고 길이 미끄러워서 뺑소니 등의 교통사고도 빈번하다. 성범죄 발생 건수도 높다. 이런 이유로 으슥한 밤거리를 무서워하는 사람도 많다. 심지어 어디선가 귀신이 튀어나올 것 같다는 친구도 있다. 같은 밤거리를 걸으며 누구는 행복을, 누구는 불안을 느낀다. 분명은 대상은 하나인데 감정은 여럿이다. 저마다 겪은 경험이 달라서다. 내가 비오는 밤을 좋아하는 이유는 어린 날의 사색과 젊은 날의 자긍심에 기반한다. 범죄를 당한 적 없다는 경험의 부재 역시 좋은 감정을 형성하는 데 한 축을 담당한다. 반면 비오는 날 나쁜 일을 당한 사람은 비만 왔다 하면 진절머리가 날 것이다. 심지어 직접 경험한 게 아닌, 간접경험도 두려움 형성에 한 몫 한다. 하정우 주연의 영화 추격자가 한창 인기를 끌 당시 우리 이웃집 아주머니는 저녁 6시만 되면 집에 돌아오셨다. 살인의 추억이 흥행 돌풍을 일으켰을 땐 사람들이 비오는 날 잘 걸어 다니지도 않았다고 한다. 반대로 난 좋은 경험과 감정들 때문에 비오는 밤의 산책을 좋아한다. 비슷한 환경을 마주했을 때 무의식에 내재된 감정들이 튀어나와 당시 가졌던 즐거움, 뿌듯함을 느끼게 해서다. 대상을 판별하는 기준 역시 경험이란 말이다.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것도 좋아하는 것도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서로 대상에 대한 경험이 달라서다. 따라서 사람마다 불안이나 두려움의 정도도 다르다.
3. 백치
상황이 이런데 요즘 세상이 재밌게 돌아간다. 철저한 주관적 감정인 불안, 불행을 객관화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행복하지 않은 자신, 불행한 자신을 남에게 대입하고 불행을 남의 책임으로 돌린다. 모두가 자기 잘못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모두 남의 탓이다. 내가 행복한 건 내 덕이지만 불행한 건 네 탓이다. 가난은 나라 탓, 싸움은 상대 탓, 범죄는 사회 탓이다. 온갖 투정이 천지사방을 울린다. 한때 막말과 독설이 '뼈 있는 조언'이라는 허울을 쓴 채 득세했다. 이승철, 강레오 같은 멘토들은 출연자들을 강하게 키워야 한다며 온갖 막말을 뱉어냈었다. 이젠 이 독설은 아예 '분노'로 탈바꿈했다. 한국자본주의를 쓴 청와대 모 양반이 우리 사회 대표적 분노유발자다. 서점가의 베스트셀러도 분노와 저항을 부추긴다. 세상은 발전했는데 인류의식은 원시 이래 단 한발자국도 진보하지 못했다. ‘투정->독설->분노’의 지옥이다. 헬조선은 스스로 만들어가는 게 아닌지. 이런 사람들은 천국에 가서도 ‘할 일이 없다’며 혁명을 일으킬 자들이다. 어디에도 헤븐은 없다. 어디도 천국은 없으니 주어진 현실에서 열심히 살아야 한다. 행복에는 노력이 필요하다. 투정하는 동안 묵묵히 공부하는 저만치 앞서가고 있다. 그런 사람들이 세상을 발전시켰고 인류의 삶을 진보시켰다. 반면 투정쟁이들은 언제나 투덜대기 바쁘다. 정말 최악의 족속들은 바로 이런 대중을 이용해먹는 속물들이다. '살기 힘들지 않아? 우리가 도와줄게'라며 온정의 손길을 내미는 척한다. 청년들의 표를 끌어들이고 유가족의 아픔을 빌어 정치권력을 획득해 기득권과 국가를 야금야금 갉아먹는다. 하지만 지옥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 정치와 법은 항상 아름다운 말로 수식되어 있다. 국회의원들은 도덕적 호소력이 매우 높은 얘기를 꺼내놓고 법을 제정한다. 수많은 법의 발의 의도를 훑어보면 대한민국은 천국이 됐어도 골백번은 더 됐어야 한다. 명분에 집착하여 끼워 맞추는 법이 많은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그리 아름답지 않아서 '아름다운' 법과 현실은 따로 논다. 도덕적으로 나쁜 성매매를 법으로 금지시키고 성매매가 근절됐는가? 아니다. 변태 업소가 난립하고 불법, 편법이 성행한다. 모든 사람이 휴대폰을 동일한 가격에 구매해야한다는 단통법은 페이백 관행을 낳았다. 난 출고가 957,000원짜리 LG G6를 138,500원에 샀다. 물론 불법이다. 하지만 요즘 대한민국 20대 치고, 인터넷 검색할 줄 아는 사람 치고 휴대폰을 제값 주고 사는 ‘호갱’은 없다. 모든 사람이 책을 동일한 가격에 살 수 있어야 한다던 도서정가제도 마찬가지다. 책값을 10% 이상 할인하지 못하게 못 박은 결과 서점들이 새 책을 중고책이라 속여 30~40% 이상 할인판매하는 촌극이 벌어졌다. 법대로라면 대부분의 동네책방은 철퇴를 맞고 벌금을 토해야 한다. 이런 저런 사례들을 모두 합쳐보면 대한민국에 범법자가 아닌 사람이 없을 지경이다. 현실에 기초하는 것. 이게 바로 법이 취해야 할 태도다. 위 내용들이 바로 불안의 발전과정이다. 불안하기에 다독이고 투정부리고 독설하고 분노한다. 각 매체는 끊임없이 삶의 불의를 확대, 재생산 한다. 정치인들은 군불을 떼고 언론은 부채질한다. 정치인들은 그들을 교묘히 이용하고 힘을 획득해서 듣기 좋은 법을 떡하니 만든다. 당연히 현실과 일치하지 않아 삐걱대니 또 다른 범죄자를 양산하고 법이 또 다른 법을 낳고 규제가 규제를 낳아서 산업과 경제를 마비시킨다.또 다시 짜증나서 투정, 독설, 분노의 악순환이다. 가장 큰 문제는 이것이 열심히 사는 사람 발목까지 잡힌다는 것. '공부해서 성공하면 뭐해? 쟤들이 땡깡부리면 정치인들이 내꺼 다 빼앗아줄텐데'라는 식이다. 이미 이런 마인드가 한국에 팽배해있다.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벌다가 적당히 죽자는 생각이다. 공무원 열풍은 비단 직업 안정성 때문만은 아니다. 분노의 회피, 평등제일주의가 낳은 시대의 단면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독 평등을 좋아하고 경쟁을 싫어한다. 그런데 또 남의 경쟁을 구경하는 건 좋아한다. 나의 경쟁은 회피하고 싶지만 남의 경쟁은 즐긴다. 얼마 전 프로듀스 101이라는 방송프로그램이 흥행 돌풍을 일으켰다. 여러 연예기획사 소속 101명의 아이돌 가수 연습생이 수 개월 동안 노래, 춤, 재능 등을 겨루는 프로그램이다. 시청자는 매주 직접 자신이 지지하는 연습생에게 투표하고 선택 받지 못한 하위 50%는 방출된다. 그렇게 총 11회의 방송 후 살아남아 가장 많은 표를 얻은 열 한 명이 한 팀이 되어 새로운 아이돌 그룹으로 데뷔한다. 정말 잔인할 정도로 경쟁적이다. 첫날부터 실력에 따라 A부터 F등급까지 나뉘어 A등급은 무대 한가운데, B와 C등급은 양쪽, D등급은 뒤쪽, F등급은 아예 무대 아래 바닥에서 춤을 췄다. 난 경쟁을 기피하고 평등을 좋아하는 국민들이 왜 이 프로그램에 그렇게 열광했는지 의문이었다. 단순히 남의 싸움을 구경하는 게 재밌기 때문만은 아니다. 결국 내가 내린 결론은 대리만족이다. 시청자들은 타인과 경쟁할 만큼 능력을 갖추지 못한 자신을 대신해줄 누군가가 필요했고, 그게 바로 101명의 연습생들이었다. 욕심은 많은데 능력은 없을 때 발현되는 심리다. 방송가의 오디션 프로그램 열풍은 이런 맥락에서 탄생했다. 하지만 대리만족만 하다보면 정작 내가 도태된다. ‘네가 못 사는 건 네 탓이다’라는 말을 우리는 할 수 있어야 하는 게 아닌지. 언제까지 대리만족만 할 것인가. 언제까지 남한테 분노만 할 것인가. 우리 분노하지 말자. 즐겁게 살고 서로를 사랑하고 행복하자. 남을 아프게 하면 그 칼은 반드시 내게 돌아온다. 우리 모두는 우주이자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는 그런 존재니까. '나 좀 행복하게 해주세요'가 아니라 '나는 행복할 거다'를 외치자. 이 얘길 하고 싶어서 저 장황한 소리를 떠들었다.
4. 갈등의 씨앗
사실 내 주장이야말로 너무도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말일 수 있다. '서로 사랑해야 세상은 평화롭습니다'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계속 갈등을 빚는다. 다 알면서 싸운다. 대체 왜? 지능이 떨어지는 것도 아닌데 왜 알면서 잘못된 행동을 일삼을까. 답은 모두가 같은 생각을 가지지 않아서다. 싸우는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하다. 생각의 불일치 탓이다. 사람은 생각보다 간사하고 생각보다 상상력이 풍부하다.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는다.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펴면서 자기 멋대로 생각한다. 그럴수록 나름대로 근거와 논리적인 오해가 차근차근 쌓인다. 당연히 상대방은 그런 생각을 하는 줄 꿈에도 모른다. 그래서 '대체 왜 그래? 내가 뭐 잘못한 거 있어?'라는 질문과 '그것도 몰라서 묻냐?'라는 답변을 주고받는다. 둘 다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나중에는 '대체 갑자기 얘 왜 이러지?' vs '그걸 모를 만큼 멍청한가? 모르는 척 하는 거겠지? 그걸 내 입으로 말하긴 좀 민망해!'로 결론난다. 상대에게 아인슈타인 급의 사고력과 프로이트 급의 통찰력을 바란다. 사실 스스로 잘못됐다는 걸 안다. 상대가 프로이트이길 바라는 것도 아니다. 근데 이기적인 인간이기에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고 자기가 만든 세계에 너무 빠지다보니 저런 어처구니없는 결론에 이르고 관계가 틀어진다. 분명 사실은 단순한데 해석하는 사람이 달라서 분쟁이 발생한다. 타인을 쉽게 신뢰할 수 없어서다. 하물며 자기 자신이 누군지도 정확히 모르는 게 인간이다. 타인에 대한 불안은 불신에서 생긴다. 상호소통은 이래서 중요하다. 서로의 불안을 덜어주기 위해, 쓸데없는 상상의 싹을 제거하기 위해, 자라나기 전에 제거하는 게 대화고 소통이다. 그래야 갈등이 최소화된다. 문제는 누구도 자기가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자신은 매우 복잡한 사람이지만 상대는 단순하다고 정의를 내리는 사람도 있다. 상대가 얼마나 똑똑하든 상관없다. 그 위대한 철학자, 학자들도 서로 박터지게 싸워대지 않았는가. 뉴턴과 라이프니츠, 마르크스와 아담스미스, 로크와 데카르트 등의 위인들도 자신이 옳고 상대가 그르다며 으르렁댔다.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똑똑하며 그 누구도 이 복잡한 마음을 알 수 없다는 착각에 빠져 산다(물론 나도 마찬가지다). 사회 쟁점은 보통 이런 식으로 터진다. 똑같은 사안을 두고 우파 언론은 A, 좌파 언론은 B로 보도한다. 자유 성장 국가를 지향하면 보수, 평등 분배 개인을 지향하면 진보 등 서로가 추구하는 가치가 달라서다. 이견이라는 씨앗은 대화로 발아하여 갈등이라는 싹을 틔운다.
자, 정리하자. 사람들은 저마다 생각이 다르다. 추구하는 가치도 다르고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도 다르다. 자기와 다른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갈등이 시작된다.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중요한 게 있다. 이런 식의 생각을 갖게 되면 자칫 '모든 건 상대적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틀린 의견은 없다'로 흐를 수 있다는 것. 심지어 범죄자들이나 반사회적 성향까지 '이해'와 '다양성'의 범주로 포용하자는 논리로 연장될 수 있다. '다를 뿐 틀리지 않았다'라는 말은 종종 '틀린 것'을 '다른 것'으로 오해하게 한다. '식인 문화는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거다' '할례는 아프리카 고유의 문화이며 우리 시각으로 바라봐선 안 된다' '소아성애자는 취향이 다를 뿐이다' 같은 범죄를 다양성이니 뭐니 하면서 이해의 범주에 포함시키려는 정신나간 작자들이 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상대의 입장이 결여되어있기에 틀린 주장이다. 식인을 당하는 사람, 할례를 당하는 사람, 성욕의 대상이 되는 아이 입장에서 바라보지 않고 '전통'이나 '취향'이라는 허울로 씌우면 그건 자유가 아니라 방종이다. 이런 기괴한 인간들은 종종 우리나라 정치권에도 출몰난다. 성별, 장애, 병력, 나이, 출신 국가, 출신민족, 인종, 피부색, 언어, 출신지역, 용모 등에 따라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만들자는 차별금지법이 그 예다. 여기까진 좋다. 하지만 일부 급진주의자들은 '정치 성향 및 사상'을 끼워 넣었다. 이 법이 통과되면 서울 한복판에서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만세를 불러도 처벌할 수 없다. 오히려 그들을 비난하는 사람들을 '차별금지법 위반'으로 집어넣을 수 있다.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자는 말은 되게 그럴 듯하게 들린다. 모든 인간은 존중받아야 한다는 만고불변의 진리 같은 것이 우리 머릿속에 단단하게 자리 잡고 있으니까. 사실 그 속뜻은 ‘우리 서로를 존중하자. 물론 내가 맞고 네가 틀리지만’일 게다.
5. ...
지금까지 (타자로부터 파생되는) 불안과 두려움, 갈등을 얘기했다. 이제 그 정점을 만나볼 차례다. 위 모든 게 종합된 것, 모든 불안 두려움 공포의 근원, 아니 애초에 위 모든 걸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다시는 존재를 느낄 수 없게 하는 것. '이것'은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걸 앗아간다. '이것'은 모든 걸 일순간에 무력화한다. '이것'은 타인에게 소중한 것을 앗아간다. '이것'은 존재를 소멸시킨다. ‘이것’은 바로 죽음이다.
죽음은 자신의 불안, 두려움, 공포와 타인의 그것을 모두 담고 있다. 나의 죽음은 내 생각의 단절이자, 타인에 대한 나의 단절, 나에 대한 타인의 단절이다. 즉 나의 죽음은 타인의 나에 대한 생각의 죽음, 타인의 죽음은 나의 타인에 대한 생각의 죽음이다. 우선 타인의 죽음이 두려운 이유는 부재와 상실감 탓이다. '그와 함께 이 음식을 먹고 싶다' '이거 그 사람이 좋아하는 책인데 선물하고 싶다'. 하지만 같이 밥을 먹을 수도, 선물을 할수도, 대화를 나눌 수도 없다. 더 이상 곁에 있을 수 없다는 불안감이 그를 취하고 싶어 하는 불완전한 우리 존재에게 두려움을 안겨주고 슬픔으로 이끈다. 고향집이 그리운 이유는 집이라는 건물 자체가 아닌 그곳이 불러일으키는 이미지, 향수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고인이 아닌 고인의 분위기, 목소리, 체취, 촉감 등을 그리워한다. 두려움과 공포에 있어 스스로의 죽음은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다. 이 생의 종료일 뿐이다. 문제는 남겨진 사람이다. 남은 사람이 아니라 '남겨진' 사람. 불교도임에도 윤회사상을 믿지 않는 나는 역설적이게도 죽는 게 그다지 무섭지 않다. 내가 무서운 건 나의 죽음 뒤 슬퍼할 가족과 상실감을 느낄 친구들이다. 나는 내 육신의 생물학적 사망 후에 감정이나 스스로에 대한 그리움을 느낄 수 없다. 그런데도 사람은 타인의 죽음보다 스스로의 죽음을 훨씬 두려워 한다. 냉정하게 얘기해서 내 죽음이 내게 무슨 슬픔, 공포, 두려움을 준단 말인가? 이는 예측과 상상력에 기인한다. 모든 걸 앗아간다는 공포, 있어야 할 물건이 없어질 때 느끼는 불안, 사랑하는 사람이 곁을 떠났을 때 파고드는 비통함 등이 한꺼번에 몰아칠 것이라는 나의 예측과 상상이 스스로의 죽음을 두렵게 만든다. 그 정도가 너무 어마어마하기에 짐작만으로 손발이 떨리고 눈물이 나는 것이다. 하지만 사후세계가 없다고 가정한다면 죽은 뒤 불안 슬픔 비통 역시 느끼지 못할 터이다. 죽음에 대한 위 감정은 어차피 못 겪는다. 경험해본적도 없고 경험해볼 수도 없지만 모든 걸 앗아갈 것이라는 예지능력 혹은 지레짐작이 인간에게 죽음의 공포를 심어준다. 따라서 사후세계를 믿는 사람만이 죽음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위 감정을 고스란히 느낄 테니 말이다. 영혼과 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이 죽음을 훨씬 두려워해야 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종교인들은 타인의 죽음을 하느님 곁으로 갔으니 좋은 것이라 묘사하고 무신론자들은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지만 두려워한다.
모든 인간은 불안, 두려움, 공포를 회피하려 한다. 하지만 이를 향해 제 발로 기어들어가는 경우가 있다. 세 번째 죽음, 바로 자살이다. 남에게서 오는 두려움은 기본적으로 회피나 방지의 방법으로 차단할 수 있다. 하지만 나에 대한 나의 해(害)는 막기 어렵다. 뒤르켐은 자살을 개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문제로 봤다. 삶을 갈구하는 인간이 스스로 그 삶을 포기하는 건 개인적 문제라기보다는 삶을 영위할 수 없게 만든 사회 문제라는 것이다. 난 개인 문제와 사회 문제 양쪽이 혼합된 결과라고 본다. 2년을 경찰서에서 보내며 깨달은 사실이 있다. 정말 자살하려는 사람은 아무 말도, 쪽지도 안 남기고 조용히 산속에 가서 목을 매단다는 것. 정말 죽기 싫은 사람만이 여기저기 자살하겠다고 광고한다. 실은 죽고 싶은 게 아니고 죽고 싶을 만큼 힘들다는 걸 타인이 알아줬으면 좋겠다는 뜻이다. 자살예고는 남이 아닌 나 자신에 대한 두려움에서 파생된다. 정말로 죽을 자신이 없다는 소리다. 죽음을 위장하기 위해서는 타인을 끌어 오는 것이다. 정작 정말 죽음에 가까운 자살은 온전한 자신과 마주한다. 인간은 불완전한 자신을 충족할 수 없을 때, 끝없는 시련에 앞길이 막막할 때, 도저히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문제와 맞닥뜨릴 때 모든 걸 놓아버리고 스스로 생을 포기한다. 글 서두에서 얘기한 현실도피다. 다만 부처 같은 위인들은 끊임 없는 수행으로 번뇌의 고리를 끊지만 속인들은 목숨을 끊는다. 자살자들을 옹호 혹은 비난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고단한 인생을 이겨내느냐 포기하느냐 차이일 뿐이다. 그 차이에서 삶과 죽음이 결정된다. 그게 자살의 본질이다.
6. 인간 말종이 되는 법
아이러니하게도 무신론자가 유독 많은 우리나라는 사람의 죽음에 큰 알러지 반응을 일으킨다. 세월호 사건 때도 백남기 농민의 사망때도 가수 신해철의 유고때도 항상 진실을 규명하라고 난리였다. 강남역에서 여성이 살해당했을 때, 20대 남성이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 수리 중 사망했을 당시에는 사람들은 사건을 잊지 말자며 포스트잇을 붙이고 집회를 열었다. 죽음을 붙잡아둔다. 절대 잊지 않겠노라 다짐하며 슬픔을 계속 끌고 간다. 고인의 죽음은 안타까워 마땅하지만 이건 과하다. 행복해지긴 어렵지만 불행은 전파가 빠르다. 대체 언제까지 그럴는지 의문이다. 슬픔을 이용해 세를 불리거나 지지기반을 확보하려는 행태는 토가 나올 지경이다. 여야 대표와 관료들은 몰려가 추모를 가장한 홍보를 해댄다. 비단 정치세력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도 마찬가지다. 평소에 있지도 않던 선한 마음, 동정, 이타심을 강제로 끄집어내 남에게 슬픔을 강요하는 모양새다. 사건 사고는 365일 끊이지 않고 있어왔는데 요 근래 갑자기 생겨난 추모 문화 때문에 더 부각돼 보인다. 그를 지켜보는 사람들, 국민들은 집단 우울증과 광기로 나아간다. 세월호 사고 때와 비슷한 양상이다. 감성중독이다. '나는 남의 비극에 이만큼 공감할 줄 아는 사람이다'라며 따뜻한 가슴을 가진 척, 착한 사람인 척한다. 언제부터 자신이 그런 이타적이었는지 묻고 싶다. 추모를 가장한 ‘SNS 자랑용 인증샷’일 뿐인 것을. 거기에 대고 '빨리 추스르자. 산 사람은 살아야 할 거 아니냐'라고 말하는 순간 희대의 인간 말종이 된다. 대번에 너희 가족이 죽어도 그런 소리 할 거냐는 공격이 날아든다. 자유론을 저술한 밀은 정부권력이 아닌 여론에 의한 자유탄압을 경계했다. 현 상황이 그렇다. 공감을 강요하는 자들이 타인의 생각은 거리낌 없이 비난한다. 그들의 추모에는 자유도, 진실성도 없다. '당신 가족이 저런일을 당했다고 생각해봐라' 따위의 감성팔이는 사고회로를 마비시켜 이성적인 판단을 흐트린다. 지뢰를 심은 북한군도, 어린 육체를 유린한 조두순도 ‘내 가족 프레임’에 들어가면 얼마든지 용서할 수 있다. 세상만사 피붙이로 치환할 수 있다면 법은 왜 있고 행정은 왜 집행되는 것인가. 우리는 이성과 감성을 조절하고 판단해야한다. 더 무서운 것은 그것이 가져올 파장이다. 뭐든 과하면 나쁘지만 동정은 과하면 파멸이다. 끝없이 사회를 우울에 빠뜨리고 그 칼날을 기득권으로 들이민다. 특별법을 제정하라고 울부짖으며 국회를 마비시키는 건 예사다. 모든 걸 구조적 문제로 치환하여 마치 대한민국이란 나라 자체가 잘못됐다는 식으로 몰고 가기도 한다. 그리고 마무리는 항상 세 글자다. 헬조선. 우리는 미디어에 휘둘리지 않는 현실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인간 말종’에 가까워져야 한다.
7. 나가며
종종 '내가 그런 삶을 산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낯선 과거를 맞닥뜨린다. 남자들은 군 전역날 마치 긴 꿈을 꾼 것만 같다고 얘기한다. 인생의 길이가 실감나는 순간이다. 인생은 생각보다 짧고 생각보다 길다. 그 속에서의 선택은 온전히 나의 몫이다. 삶도 죽음도 행복도 불행도 모든 것은 상대적 개념이다. 각자가 추구하는 목표, 이상이 다르듯 행복의 기준은 저마다 다르다. 우리는 인생을 문제해결의 연속으로 본 칼포퍼처럼 행복을 논하기 전에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자기 문제를 얼만큼 탐구했는지, 인생을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가 행복론에 선행되어야 한다. 다행히도 난 아직 사는 게 즐겁다. 아침에 눈 뜰 때마다 기대와 행복에 가득 찬다. 매일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하며 주변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애쓴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평생. 나의 불안은 행복을 거세할 수 없다. 그게 이 글의 결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