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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by TheStrok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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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까지 접한 학자들 중 가장 위대하다. 내 생각이랑 어쩜 이렇게 똑같을 수가 있을까. 니체 얘기다. 정말 멋지다. 자, 가자.

 우선 '짜라투스트라(영어로 조로아스터)'는 고대 종교인이자 학자야. 니체가 그의 입을 빌려 세상을 이야기 한 책이 바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고. 차라투스트라는 선악의 대립과 투쟁이 역사를 만든다고 생각했어. 이러한 이분법은 서양 세계관에 많은 영향을 끼쳐.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의 선과 악으로 대표되는 이분법적 세계관을 아주 강하게 부정해. 그는 차라투스트라가 세상을 선과 악의 투쟁의 장이라고 본 최초의 인물이며 선악의 대립이라는 도덕 법칙을 최초로 만들어 낸 사람이라고 봤어. 때문에 그것에 오류가 있다는 걸 인식할 수 있는 최초의 인간이라고 생각했지. 그 문제를 가장 많이 고민하고 경험한 사람은 다름아닌 그 문제를 최초로 다룬 사람일테니까. 더 중요한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가 제시하는 인간상이 바로 자기 자신을 극복하는 존재라는 점이야. 인간은 끊임 없이 자기 자신을 극복해야하는 존재라는 게 니체의 주장. 따라서 니체가 이분법적 사고를 바탕으로 한 도덕법칙을 극복해야 한다고 여겼다면, 이를 가장 먼저 극복해야 할, 극복할 수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차라투스트라인 것. 이후에 나올 차라투스트라는 모두 니체와 동일하다고 보면 될 거야.

 "신은 죽었다"
 인간은 자신들의 불완전성과 결점을 혐오했어. 나약하고 힘 없고 변덕스러운 자신을 부정하며 살아갔지. 모순덩어리인 자기 자신과 삶을 견딜 수 없었던 인간은 완전한 존재와 완전한 세계를 바랐어. 그런 완벽한 세계를 동경하던 인간이 만들어낸 게 신과 천국이라는 관념이야. 신은 인간의 나약함으로 만들어진 허상일 뿐이지. 니체 "우리의 삶, 그리고 그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겐 아무런 죄가 없다. 인간은 자신이 발을 딛고 선 대지를 부정하고 증오하면서 눈을 하늘로만 향했다. 사실 하늘에 무엇이 있겠는가? 인간이 하늘에 대해 무엇을 알겠는가? 인간은 대지 위에서 가질 수 없었던 것들, 꿈에서는 보았던 것들을 온통 하늘에 그려 넣었고 그것이 하늘에 실재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삶의 의미를 자기 자신에게서 찾지 못하는 것은 그것을 찾으려는 노력과 용기가 없기 때문이며, 인간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 해도 그것이 곧 인간의 삶이 의미 없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 삶에 충만한 의미를 새겨 넣어야 한다"
 신은 인간을 사랑했고 불쌍히 여겼어. 동시에 자신이 불쌍히 여긴 그 인간들에 의해 죽음을 맞았어. 사람들에 대한 연민의 정 때문에 신은 죽은거지. 애초에 삶은 아름답지만은 않아. 고통도 추함도 모두 삶의 일부고 그것을 회피한다면 우리 삶을 회피하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신은 연민의 대상이 되는 인간들이 삶의 주인으로 사는 길을 방해하고 결국 그들의 삶에 대한 의지를 떨어뜨렸어. 차라투스트라 "모든 것을 목격한 바 있는 눈으로 사람들의 모든 깊은 속내와 바탕, 치욕과 추함을 남김 없이 보고 말았으니, 그의 연민은 수치심을 알지 못해서 나의 추악한 구석구석 까지 파고 든 것이다. 호기심이 많고 연민이 너무 깊었던 주제 넘은 자는 죽어 마땅하다" 자신이 연민하고 동정했던 나약한 인간들에 의해 신은 살해당하고 만거야. 차라투스트라는 신을 완전히 죽이기 위해서는 '웃음'이 필요하다고 말해(웃음에 대해서는 뒤에 더 자세하게 설명할거니 일단 넘어가줘). 삶을 긍정하고 가치 있게 생각하는 자에겐 신이 필요 없으니까.
 신을 죽인 두번째 살해자는 교회와 사제들이야. 차라투스트라 왈 "저들(사제)은 자신을 거부하고 괴롭힌 존재를 신이라 불렀다. 실로 저들이 하는 경배 속에는 영웅적인 많은 것들이 깃들어 있다. 그리고 그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 말고는 달리 사랑할 줄 몰랐다. 저들이 말하는 구세주의 영혼은 갈라진 틈새 투성이다. 저들은 틈새 하나하나에 저들의 망상을, 저들이 신이라고 부르는 대용품을 채워넣었던 것이다". 기독교와 사제, 교회는 본래 예수 그리스도가 전한 가르침을 왜곡하고 오히려 예수가 그토록 비판했던 가치들로 무장하고 있었어. 돈과 명예, 권력으로 말야. 이에 니체는 교회를 예수의 무덤이라고 표현하지.
 니체가 생각하는 신과 사제들은 다음과 같아.
첫째, 사제들과 교회가 '인간의 죄->그에 대한 벌'이라는 구조를 강조했기 때문에 신과 인간의 거리는 멀어졌다. 예수는 인간의 죄가 벌로 이어진다는 말을 한 적이 없거든.
둘째, 예수는 신앙을 강조한 게 아니고 차별하지 않는 사랑을 가르쳤을 뿐이다. 
셋째, 예수가 말하는 구원이란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통해 실현된다. 
넷째, 천국이란 저 피안의 세계에 있는 게 아니라 사랑이 깃든 평화로운 마음 상태를 이르는 것이고 그 실천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다섯째, 마음의 천국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구원받을 것이며 누구나 다 하나님의 자식이다. 예수야말로 실천적인 삶을 통해 신과 만날 수 있다고 주장한 최초의 인물이다. 그러나 자신의 권력과 교회를 위협한다고 생각한 율법학자들 손에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힌다. 그 이후의 교회도 별반 다르지 않다. 교회와 사제들은 삶에 대한 사랑과 천국의 실천을 강조한 예수 본래의 가르침이 아니라 유일신과 예수, 불멸에 대한 믿음, 신앙을 통한 구원, 부활과 심판이라는 종말론적 교리만 가르쳐 왔다.
=> 결국 신은 자신에 대한 연민을 견디지 못한 추악한 인간들과 현실을 부정하고 비현실적인 세계를 동경한 사제들에 의해 죽음을 맞았어. 이들은 왜곡된 신의 관념을 만들어냈고 자신이 만든 신을 자신의 손으로 죽이는 지경에 이르고 만 거야.

 서양 문명은 항상 삶의 현장을 부정하고 피안의 세계에 모든 가치와 의미를 뒀어. 고대 플라톤은 우리 세계는 허상이고 진정한 세계(이데아)는 저 너머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봤어. 기독교 중심의 중세는 헌실세계를 죄악으로 물들이고 깎아내렸지. 우리가 진정 찾아야하는 세계는 천국이라면서 말야. 근대도 마찬가지야. 칸트는 인간이 가진 인식의 한계 때문에 인식 너머의 참 모습을 알 수 없다고 했어. 이렇게 삶을 혐오하는 것이야말로 서양 문명의 병이라고 니체는 생각했어. 그가 살던 19세기는 과학의 발전이 정점을 찍을 때 였고 인간의 이성이 신에 대한 믿음을 넘어서던 시기야. 기독교는 처량하게 힘을 잃어갔고 과학은 득세하기 시작하지. 하지만 니체는 이런 과학과 이성에 대한 맹신 역시 신앙과 별 다를바 없다고 봤어. 과학자와 철학자는 여전히 완벽한 것을 꿈꿨고, 있는 그대로의 삶을 부정했으니까. 그들의 신앙은 자본이나 국가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을 뿐이야.
 니체는 말해 "신의 죽음은 인간에게 새로운 삶을 가져다 줄 것이다. 이제 신은 죽었고 '저 세계'에 대한 신앙도 사라졌다. 우리 스스로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아 나서야 한다. 우리는 이제 대지 위에서 '웃을 줄 알아야 한다. 대지라는 우리의 삶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웃음 지으며 긍정할 수 있어야 한다". 니체는 우리가 새롭게 태어날 시간이 왔다고 말해. 그렇게 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인간상, '위버멘쉬(Ubermenschen)'가 되자고 주장해. 니체 철학의 지향점이지. 뒤에 자세하게 나오니 일단은 이렇게만 알아두자.
 인간은 신과 같은 저 피안의 세계에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대지 위의 삶을 부정하고 혐오하게 됐어. 하지만 니체가 생각하기에 가장 결백한 삶은 대지 위에서 이루어질 수 있고, 이를 입증하기 위해 '힘에의 의지'라는 개념을 도입해. '힘에의 의지'는 종종 '권력에의 의지' 등으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왜곡해석될 수도 있어서 나는 원문에 제일 가까운 힘에의 의지로 적을거야. 니체 철학의 근간인 '힘에의 의지'는 '더 많은 힘을 얻길 원하고 항상 주인이 되고자 하며 더욱 강해지고자 하는 의지'를 의미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이러한 힘에의 의지로 움직이는 동적인 상태야. 그러나 서양 문명은 앞서 말한 현실과 이상이라는 뿌리 깊은 병폐를 갖고 있어서 힘에의 의지를 실현하기 어려워. 형이상학적 이분법이라는 구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지. 형이상학적 이분법이란 세계를 형이상학적(감걱으로 인지되는 세계 너머에 존재하는 무언가)으로 바라보고 '선과 악, 약과 강 등'의 이분법(둘로 나누어) 본다는 뜻이야. 이는 고대 플라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서양 세계관의 뿌리 깊은 의식이야. 플라톤은 진리는 육체적 감각이 아니라 이성에 의해 파악될 수 있다고 말해. 감각이 아닌 이성으로 파악되는 것만이 실제이며 그 외에는 거짓이라고 주장하지. 왜? 우리가 감각으로 경험하는 세상은 항상 변하기 때문에 어떤 대상을 콕 집어 '이건 이거다!'라고 말할 수 없으니까. 변하는 상태에 있는 모든 것에 '생성'이라 이름 붙이고 믿을 수 없는거라 여겼어. 서양 문명은 세계를 변하지 않는 영원한 '존재'와 변화 속 무수한 사물인 '생성'으로 나누어 본거야. 전자는 찬양받았고 후자는 쓸모없는 걸로 여겨졌지. 하지만 니체는 '모든 것은 되어간다. 영원한 사실이란 없다. 절대적인 진리라는 것이 없는 것처럼‘이라고 주장해. 그에게 절대적이고 영원한 것이 있다면 모든 것이 변화하는 '생성의 세계'뿐이야. 여기서 차라투스트라는 말하지 "또 다른 세계, 비인간화 된, 비인간적인 그 세계는 사람들에게 감춰져 있다. 그리고 존재는 인간적인 방식으로만 사람에게 말을 건넨다. 정녕코 존재를 증명하고 입을 열게 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 형제들이여 말하라. 모든 사물 가운데 가장 불가사의한 것이 가장 명백하게 증명되고 있지 않은가?" 고대 서양 철학의 형이상학적 이분법이 있지도 않을 걸 있는 것 마냥 사기치고 있다는 뜻이야. 그럼 대체 형이상학적 이분법은 왜 생겨난 걸까? 답은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이야. 니체 왈 “인간은 자신의 불행과 고통의 원인이 변화하는 세계라고 생각하고 '변화'와 '행복'을 상반된 개념으로 여겼다. 그 결과 인간은 형이상학적인 세계, 즉 변화 너머의 참된 존재의 세계를 구성해냈고 그 세계야 말로 인간의 고통에 답을 줄 수 있는 진리의 세계라고 믿게 됐다" 형이상학적 이분법을 정리하자면 생성(변화의 세계)은 모순 투성이며 인간의 인식을 속이기도 해. 그래서 인간은 생성의 세계에서 불확신만을 가지지. 하지만 인간은 행복을 바라기에 생성과 반대되는 세계, 즉 '존재(신이나 천국)'를 상상해냈어. 니체는 이런 형이상학적 이분법이 인간의 무능력 탓이라고 생각해. 형이상학적 이분법으로 세계를 바라본다고 고통이 사라지진 않지. 허상 뿐인 세계와 내가 일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존재의 세계는 우리의 고통에 여러 가지 답을 줄 뿐이야. 이에 짜라투스트라는 "저편의 '또 다른 세계'는 고통과 무능력, 고통에 시달리는 자가 꾸며낸 덧 없는 행복의 망상이다"라고 말해. 존재라는 것도 결국 고통을 회피하고 견디기 위해 우리 이성이 교묘히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에 실재하지 않는 가상이라는 말이야.
 그렇다면 니체가 지지하는 생성의 세계(실제 세계)는 뭘까. 그는 '존재'란 변하는 것이고, 그것이 변하는 이유는 '살아있기 때문'이라고 얘기해. 살아있다는 건 숨 쉬고 있는 뜻이고 무언가를 계속해서 바라고 뭔가에 힘을 작용시키고 있다는 거야. 존재는 변하는 것이지 자가동일성을 유지하는 게 아니야. "변화야 말로 존재에 대한 근본적 확실성이다"라고 니체는 말해.
 차라투스트라는 니체의 생각을 이렇게 표현해 "나는 생명체를 발견할 때마다 힘에의 의지도 함께 발견했다. 오직 생명이 있는 곳. 그 곳에만 의지가 있다. 이는 생명에 대한 의지가 아니라 힘에의 의지다". 니체는 '존재'가 항상 힘에의 의지를 작동시킨다고 주장해. 존재하는 모든 것은 힘에의 의지로 움직이는 동적인 상태지. 이 힘에의 의지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 의지에 대항하는 반대 의지가 있어야 해. 뉴턴의 작용 반작용 법칙과 같은 것. 힘을 가하는 곳에는 반드시 반작용 하는 다른 의지가 있고 이 의지들 간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쪽이 어떠한 구체적인 현상을 만들어 내는 거야. 두 힘에의 의지는 더 많은 힘을 원하고 더 강해지고자 하는 본성을 바탕으로 충돌해. 대결에서 승리한 힘에의 의지는 또 다른 힘에의 의지와 대결할 거야. 대결은 절대 끝날 수 없어. 그래서 만물은 끊임 없는 변화를 거듭하지. 대결과 충돌이 끝난다면 그 사람의 삶 역시 끝난 거나 마찬가지야. 모든 힘에의 의지는 계속해서 자기의 본성(주인이 되고자 하는, 더욱 강해지고자 하는, 더 많은 힘을 얻고자 하는)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어.
 사실 니체의 '의지'라는 개념은 쇼펜하우어한테 영향을 받은 거야.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의지란 우리의 행동 움직임 등과 같이 겉으로 드러난 것 너머에 있는 실체를 의미해. 형이상학적 이분법이지. 단지 본질적인 존재를 의지라고 설명했을 뿐이야. 니체 역시 힘에의 의지만이 실체라고 주장했어. 하지만 쇼펜하우어가 말한 실체로서의 의지는 우리의 행동, 사물의 작용 힘과는 독립적으로 우리 내면에 존재 해. 반면 니체의 '힘에의 의지'는 항상 존재하는 의지를 뜻하고 우리 행동 사물의 작용과 함께 일어나는 것으로, 이 세계 너머에 따로 존재하지 않아. 쇼펜하우어는 삶이 고통이라고 얘기해. 의지라는 실체가 우리로 하여금 헛된 욕망을 갖게 하고 그 욕망은 결코 완벽히 충족될 수 없어서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히기 때문이야. 돈을 벌수록 더 벌고 싶고 예뻐지면 더 예뻐지고 싶은 그런 인간의 끝없는 욕망이 우릴 고통스럽게 한다는 거야.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는 ‘의지’는 욕망의 원천이야. 의지란 영원한 실체이고 진리이기 때문에 그것을 없애기란 불가능하며, 끝없는 욕망이 낳는 고통 속에서 살 수 밖에 없어. 부처 역시 그 욕망과 의지를 아예 없애버리는 건 불가능하다고 봤지.
 니체는 쇼펜하우어 역시 변형된 형이상학적 이분법으로 세계를 해석해서 삶을 부정하는 사람이라 생각했어. 하지만 니체는 삶을 긍정하고 싶었어. 말하자면 쇼펜하우어가 "삶은 고통 그 자체"라고 했다면 니체는 "고통도 삶의 일부니 이겨내야지"라는 거야. 쇼펜하우어로부터 일정 개념만 쏙 빼와서 자기 철학에 대입시킨거지.
 자, 정리해보자. 니체는 형이상학적 이분법에 병든 서양 문명을 고치려 했어. 초월적인 세계에 치우쳐있던 삶의 의미와 가치를 대지로 돌려놓으려 한 거야. 그는 저편의 세계에 따로 있는 영원불변의 존재를 부정하고, 살아 숨쉬며 항상 변화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존재라고 주장했어. 그리고 변화하는 존재의 본성을 설명하며 힘에의 의지를 도입했어. 더 많이 더 강하게, 주인이 되고자 하는 본성을 가진 '힘에의 의지'들 간의 끝없는 경쟁과 싸움이 우리 삶 자체이며 그것은 피해야할 고통이 아니라 긍정해야 할 대상이라는 말이야. 니체는 끊임 없이 투쟁하고 정복하며 자신을 더욱 강한 존재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라고 말해. 그것이 힘에의 의지 본성에 충실한 삶이고 가장 고귀한 삶이니까.

 니체가 말하는 고귀한 삶이란 무엇일까. 뭐 당연히 돈 많고 힘 세고,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을 의미하는 게 아니겠지. 니체가 말하는 ‘고귀한 삶을 갈아가는 사람’은 바로 귀족을 뜻해. 니체는 고귀한 인물들이 인류를 향상시키고 문화를 만들어왔다고 말해. 세습된 귀족이 아니라 오디세우스, 아킬레스 같은 '자기 힘으로 집단의 우두머리가 된 사람(바실리우스)들 말야. 용기를 가지고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고 정복했으며 자신을 더욱 강한 존재로 만든 진정한 귀족들이지. 니체가 보기에 노예들은 귀족에게 패한 자들일 뿐이야. 그는 "사회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위계와 가치 차이를 믿어왔고, 어떤 의미에서 노예제도를 필요로 했다"고 말해. 이런 말 때문에 계급제를 옹호하고 노예제를 찬성하는 사람으로 오해받기도 해. 그러나 여기서 위계는 사회적으로 주어진 사농공상이나 카스트제도 같은 것들이 아냐. 일대일로 투쟁해서 나타나는 승자와 패자 사이의 위계질서를 의미하지. 만약 패자들이 자신의 힘에의 의지를 충실히 따랐다면 그는 계속 투쟁하는 상태거나 승부가 확실히 나서 죽고 말았어야 해. 살아있으면서 싸우지 않고 있다면 자신의 힘에의 의지를 어긴 채 비굴하게 항복한자일수 밖에 없어.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비굴하게 항복한 사람들이 바로 노예들이야. 니체는 귀족은 고귀한 용기를 통해 힘에의 의지에 충실했지만 노예는 힘에의 의지와 용기를 내버렸기 때문에 노예가 귀족에게 지배받는 거라고 생각했어.
 한편 지금은 용기가 찬양받던 시대가 가고 절제 관용 용서 등이 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어. 그러면서 서구문명이 병들었다고 니체는 생각해. 절제는 힘에의 의지를 억제하고 관용은 상대방의 힘에의 의지를 모욕하는 거야. 서구 문명은 힘에의 의지를 충실히 실현하던 문화에서 힘에의 의지를 억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어. 귀족의 덕이 아닌 노예의 덕이 칭송 받고 있는 상황이지. 약자들에 대한 동정과 연민(적선 복지 기부)은 힘에의 의지(노동을 통한 가치창출)를 거스르는 노예의 도덕이야. 그리고 이를 부추긴 게 기독교(허구헛날 무슨 어린양이니 구원받을 존재니 떠들잖아)야. 그렇다고 해서 니체를 강자 옹호, 전쟁광 등으로 오해해선 안돼. 니체는 삶이 냉혹하다고 말해. 어떤 문명이든 그 시작은 전쟁과 정복, 살해로 점철되어 있음을 인정해야 해. 플라톤적 기독교의 도덕은 이런 현실을 은밀히 덮어버리고 그냥 마냥 아름답고 이상적인 것들만 말해왔어. 세상을 도덕이라는 장식으로 포장하는 건 폭력보다 나쁜거야. 도덕과 아름다운 말 뒤에는 필연적으로 거짓이 섞여 있으며 더 치밀하고 무자비한 억압 폭력이 내재되어 있으니까. 폭력 정복 착취는 인간의 삶에서 피할수 없는 요소야. 모든 사물은 '더 많이 더 강하게, 내가 주인이 되려는' 힘에의 의지를 갖고 있어. 니체는 그런 투쟁 상태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면 비겁하게 가면 뒤에 숨지 말고 용기 있게 맞서라고 주장해. 그런 사람이 항상 새로운 시대와 문화를 만들었고 인류를 향상 진보시켜 왔으니까.

 인식에 관하여
 근대 서양철학의 주된 논의는 ‘사물에 대한 보편적인 앎을 어떻게 얻는가’였어. 데카르트 같은 합리론자들은 이성이, 베이컨 같은 경험론자들은 경험이 세계에 대한 정확한 앎을 보장한다고 말했어. 이러한 인식에 대한 니체의 생각은 '관점주의'야. 관점주의는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지식은 없으며 세계를 바라보는 인식자의 관점에 따라 다양한 지식이 만들어진다. 이 때 인식자에게 이익이 되는 실용적인 측면이 반영될 수 밖에 없다’라는 입장이야. 사과를 예로 들어 설명해볼게. 사과를 그리고 있는 화가 입장에서 사과는 피사체일 뿐이야. 과수원 농가의 노동자에게 사과는 상품이야. 마트의 소비자들에게는 맛있게 먹을 음식이지. 이렇듯 인식의 주체는 힘에의 의지를 본성으로 하는 존재로서 힘에의 의지에 따라 특정한 관점을 가져. 이를 '해석'이라 부르지. 해석은 항상 관점과 목적을 가지고 사물을 이해하므로 주관적일 수밖에 없어. 니체는 해석이라는 개념을 통해 수많은 철학자들이 믿었던 객관적 지식과 앎을 부정했어. '이것은 무엇이다'가 아니라 '이것은 나에게 무엇이다'라는 말이야. 즉 해석이란 대상 안에 있는 어떤 것을 발견하는 행위가 아니라 대상에 적극적으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작업이라고 볼 수 있어. 따라서 해석은 반드시 틀릴 수밖에 없어. 대상에 부여하는 가치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고 세상 모든 사람은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으니까. 니체는 모든 존재가 생성이라는 변화상태에 있다고 설명해. 우리가 어떤 대상을 해석하려면 변화상태에 있는 대상에 일정한 형식을 부여하고 한정시키며 범주화할 수 밖에 없지. 사물을 인식하고 해석하는 과정에서 사물의 다른 측면은 부정되고 무시된다는 거야.
 사실 이는 전통적인 인식론(플라톤, 칸트 등)이랑 크게 다르지 않아. 차이가 있다면 그동안의 철학자들은 한계를 부정적인 걸로 파악하고 어딘가에 변치 않는 실체가 있다고 생각한 반면 니체는 해석의 필연적 오류를 과감하게 받아들이고 오히려 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는 거지. 왜? 해석의 오류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창조활동이니까. 지식은 삶의 수단이며 삶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이야. 이에 차라투스트라는 "너희는 너희의 감각을 끝까지 사유해야 할 것이다. 너희는 세계라고 불리는 것, 그것도 너희에 의해 창조되어야 한다. 이 세계가 너희의 이성 이미지 의지 사랑 안에서 형성되어야 한다. 진정 너희가 행복을 누리도록, 사물의 이치를 터득하고 있는 자들이여!"라고 말해. 차라투스트라는 사물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이론적인 욕구나 절대적인 진리의 추구 도덕적인 의무감을 가질 게 아니라 해석된 지식을 통해 자신을 어떻게 고양시킬 것인지, 힘을 어떻게 강화하고 어떻게 많은 걸 지배하는 삶의 주인이 될지 생각해보라고 말해. 니체에게 중요한 건 삶 그 자체야. 해석이란 인간의 자유로운 창조행위여야 해. 가장 큰 걸림돌은 기존의 해석에 만족하는 태도야. 힘에의 의지가 한 번 작용하면 다시 본성으로 돌아와 더 많은 힘을 원하듯 진리를 향한 의지도 다시 자신에게 돌아와 기존의 해석된 지식에 불만족하고 다시 해석해야 해. “끊임 없이 해석하고 창조하라, 진리는 무수히 많고 다양하다”. 가장 중요한 건 우리의 삶이야. 삶과 연결되지 않는 의미와 가치는 아무 쓸모 없어. 결국 니체의 관점주의는 인간의 존재와 삶을 긍정하는 데 아주 유용한 도구가 되었지.
 니체는 지식의 상대성이 우리 존재의 특성인 힘에의 의지에서 비롯된다고 말해. 지식이 우리 존재에 앞선다는 게 아니라 존재가 지식에 앞선다는 거야. 그동안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지식 아래 인간의 삶은 충족되어 왔어. 과학에 종속된 시대 역시 마찬가지야. 이제 우리는 자신에 대해 스스로 해석하고 판단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어. 수많은 지식의 하인이 됐고 틀에 갇혀버렸어. 하지만 니체는 얘기하지. '정해진 진리는 없어!!'라고. 중요한 건 적극적이고 새로운 해석, 그것이 나의 존재와 삶을 사랑하는 태도야. 이는 지칠 줄 모르고 계속 되어야해. 세계에 대한 해석도 끝없이 계속 되어야 하고. 정해진 진리 따윈 없으니까. 세계는 무한한 의미와 가치의 가능성이 모여 있는 곳이야.

 오랫동안 육체는 천박한 것으로 여겨졌고 정신은 찬양받아왔어. 식욕과 성욕은 저급한 것으로 취급받아 왔고 공부와 정신수양은 고고한 행위로 여겨졌지. 플라톤은 이성은 용기와 욕망을 잘 다루라고 하면서 욕망을 억제하라고 했고, 데크르트는 인간이 믿을 수 있는 실체는 오직 정신과 이성 뿐이라고 말했어. 기독교 성자들은 여기에 더해 신체에 '죄'라는 개념을 도입했어. 프로테스탄트들은 온갖 금욕적인 생활을 장려했고 심할 경우 자기 몸에 채찍질을 하기도 했어. 중세교회 역시 회개하라, 금욕해라 뭐 해라 등등 뭘 하지 말라고 그렇게 떠들어댔어. 동양은 약간 달라. 동양은 약간 달라. 일단 정신을 강조하긴 했지만 신체도 배려했어. 불교는 정신적 해탈 못지 않게 안식과 청결, 위생도 중시했지. 우리나라 선비들은 오로지 학문에만 정진하는 걸 진리로 여겼고 승려들은 그 욕망을 넘어서기도 했어. 
 니체는 이런 ‘정신 짱짱맨, 육체 개새끼’의 프레임을 극도로 혐오했어. 그는 인간을 신체와 정신으로 나누는 것 자체가 잘못 됐다고 말해. 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의 생각을 실천하려면 죽는 수밖에 없어. 여기서 그 유명한 “산입으로 죽음을 강요하지 말라”라는 명언이 탄생하지. 차라투스트라는 "나는 전적으로 신체일 뿐 그 밖의 아무것도 아니며, 영혼이란 것도 신체 속에 있는 그 어떤 것에 붙인 말에 불과하다. 신체는 커다란 이성이다. 형제여, 니가 정신이라고 부르는 그 작은 이성 또한 너의 신체의 도구다. 이를테면 너의 커다란 이성의 작은 도구이자 놀잇감에 불과하다"고 말해. 순수하게 이성만을 사용하는 것 같은 행위도 사실 수많은 신체적 감정과 의지가 함께하지. 신체적인 작용 없이 의지가 전혀 작용하지 않는 순수한 사유가 가능할까? 불가능하다고 봐. 니체가 말하는 신체(커다란 이성)이란 데카르트가 말한 육체와 정신의 이분법을 넘어선 이성 신체 의지가 함께 작용하는 통합적인 신체를 뜻해. 여기서 의지는 곧 힘에의 의지지. 우리 신체 역시 힘에의 의지에 종속되어 있어. 무엇을 단순히 인식하는 게 아니라 힘에의 의지에 따라 '해석'하지. 그 해석에 사용되는 능력이 바로 이성이야. 니체는 힘에의 의지가 작용하는 '신체'를 ‘큰 이성’이라 불러. 신체는 자신의 목적에 맞는 관점을 설정하고 '이성'이라 부르는 '작은 이성'에게 관점에 따라 해석하도록 명령하는 '큰 이성'이야. 당연히 신체 역시 힘에의 의지가 작용하면서 항상 변화해. 전술했듯 우리 신체는 여러 힘에의 의지들이 투쟁하는 싸움터니까. 수많은 의지와 정서가 매순간 우리 신체 안에서 서로 힘을 겨루고 싸워가며 신체의 주인이 되려고 해. 차라투스트라 왈 "보라, 너의 덕 하나 하나가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얼마나 열심인지를 그들은 너의 정신을 그들의 전령으로 삼을 생각에서 너의 정신 전부를 원한다". 고정된 자아가 행위를 일으킨다는 건 착각이야. 어떤 행동 뒤에 그것을 일으킨 원인으로서의 행위자가 존재한다는 생각은 잘못된 거야. 자아란 고작 힘들의 싸움이 만들어낸 결과물일 뿐이야. 현재의 자아는 또 다른 힘들 간의 전쟁에 의해 변화할 것이며, 또 다른 자아가 형성되기 위해 극복되어야할 대상에 지나지 않아. 다양한 힘들이 전쟁과 평화를 반복하는 동안 신체는 계속해서 또다른 자아를 형성해나갈거야.
 니체는 우리가 육체적 존재도, 정신적 존재도 아니라고 말해. 우리는 살과 피를 지닌 채 무언가를 욕망하고 더 큰 힘을 얻기 위해 이성을 사용해. 모든 작용이 일어나는 곳이 바로 우리 신체야. 만약 자아가 고정되어 또 다른 자아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그 신체는 죽은 것이나 다름 없어. “지금 네 자신이 가진 그 보잘 것 없는 자아를 내버려두지 말고 싸움터로 내보내라, 네 안에서 끝없이 전쟁을 벌이고 그렇게 계속 새롭고 또 다른 너를 만들어나가라”

 니체는 모든 건 변화하며 고정된 '존재'의 세계는 없다고 했어.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생성의 세계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니체는 19세기 유럽문명을 삼킨 ‘이상’ ‘세계부정’ ‘피안 세계 동경’ 등의 질병을 치료하려 했어. 그러기 위해 '영원회귀사상'을 꺼내들지. 니체는 "현 존재의 모습은 아무런 의미나 목표를 갖지 않는다. 그러나 현 존재의 이 모습은 無로 종결되지 않고 불가피하게 다시 반복된다. 영원회귀. 이것이 허무주의의 가장 극단적인 형식이다"라고 말해. 모든 것은 허무로 끝나지 않고 오히려 그 허무가 영원히 반복된다는 거야. 영원회귀사상은 이 세계에 대해 ‘세계와 그 세계 속의 모든 사물들은 계속 반복해서 존재한다’라고 말해. 차라투스트라는 "존재의 바퀴는 영원히 돌고 돈다. 존재의 해(年)는 영원히 흐른다. 매 순간 존재는 시작된다. 모든 '여기'를 중심으로 '저기'라는 공이 굴러간다. 중심은 어디에나 있다. 모든 것은 가고 다시 되돌아온다. 존재의 바퀴는 영원히 돌고 돈다. 매순간 존재는 시작된다"라고 말해. 여기서 존재란 생성을 의미해. 모든 것이 변화하고 되어가고 있는 상태, 생성의 상태에 놓인 게 이 세계야. 존재의 바퀴는 돌고 돈다=힘에의 의지들이 바퀴는 돌고 돈다. 생성의 상태, 즉 힘에의 의지들의 힘겨루기 상태가 영원히 반복되는 게 바로 영원회귀사상이야. 간단히 말하면 이 세계는 수많은 힘에의 의지들이 쉴새없이 서로 싸우고 경쟁하며 모든 것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계속 변화해서 또 다른 것으로 나아간다는 말이야. 니체 왈 "생성에 존재의 성격을 각인한다. 모든 것이 회귀한다는 것은 생성의 세계가 존재의 세계에 극도로 접근 하는 것이다". 영원회귀를 생각할 때 고정된 무엇을 떠올리고 그것이 영원히 반복된다고 생각해선 안 돼. 결국 존재하는 것은 '계속해서 변화하는 상태'뿐이야. 예를 들면 준호(A)는 내일이 돼도 준호(A)가 아니라 준호1(A1), 준호2(A2), 준호3(A3), 준호4(A4) .... 준호n(An) 처럼 계속 변화하는 생성만이 존재한다는 거야. 니체는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생성과 힘에의 의지뿐이라고 했으며 이 둘만 영원히 되돌아온다고 말해.
 여기서 잠깐, 영원회귀사상은 잘못하면 극단적인 허무주의를 불러올 수 있어. ‘어차피 변할텐데 뭐하러 완성하냐?’ ‘어차피 죽을 거 왜 사냐?’라는 식으로 말이지. 진정한 앎을 깨달을 수도 없어. 삶의 목적을 잃으니까. 이렇게 삶에서 의미를 못 찾는 걸 니힐리즘(허무주의)라고 해. 니체는 고정된 '나'는 없고 그저 타인과 관계 맺으며 변해가는 생성의 영원만 있을 뿐이라고 하지. 실제로 차라투스트라조차도 영원회귀사상 앞에서 무력해졌을 만큼 위험한 사상이지. 그럼 삶을 부정해야 할까? 당연히 아니지. 니체는 "삶을 긍정하기 위해 영원회귀사상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냥 대책 없이 좋아하고 기뻐하라는 게 아니라 오히려 끔찍할지라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라"라고 말해. 그는 생성의 세계가 계속 변화하고 그로 인해 삶이 영원히 반복될 지라도 그런 삶을 그대로 인정하라고 말해. 덧없는 삶의 매순간들에 적극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며 살라고 하지. 매 순간 자신에게 물음을 던지며 살아가야 해. 지금 이 순간 겪고 있는 찰나의 삶 속에서 그러한 삶이 수없이 계속 반복되기를 원할 만큼 삶의 매순간을 사랑해야해.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람을 영원히 반복해서 사랑하기를 원할 만큼 그를 사랑하라는 얘기지. '매 순간을 긍정하며 매 순간의 영원회귀를 바랄만큼 최선을 다하라!!!' 니체에게 매 순간은 의미 있고 가치 있어.
 물론 말이 쉽지만 사실 영원회귀사상을 견디고 삶을 긍정하는 것은 매우 어려워. 허무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커다란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거든. 용기와 결단은 아무리 부정적인 삶이라도 받아들이고 매순간 영원회귀를 바랄만큼 삶을 사랑하고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면서 살아가는 자세와 비슷해. 니체는 삶을 긍정하기 위해 자신의 힘에의 의지를 최고조로 상승시켜야 한다고 말해. 혐오스럽고 덧없는 삶 전체를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전환시킬 정도로 말야.
 끊임 없이 삶의 모든 순간을 긍정하고 삶의 의미를 새롭게 창조하는 사람. 그렇게 끝없이 자기 자신을 극복해가는 사람. 그래서 지금까지 누구도 지어본 적이 없는 웃음을 지을 줄 아는 사람. 이렇게 영원회귀사상을 허무주의에서 삶에 대한 사랑으로 바꾸는 사람. 그런 사람을 니체는 '위버멘쉬'라 불러. 다시 나오지만, 니체 철학의 지향점이야. 이따 자세하게 나오니 한번 더 생략.

 니체 철학은 기존의 모든 가치를 뒤집는다고 볼 수 있어. 니체는 신 이성 정신 등 서구문명의 근간을 뒤집으려 했지. 그리고 그는 서양문명을 좀 더 확실하게 조지기 위해 ‘도덕’에 까지 손을 대. 그가 볼 때 서양의 전통 도덕은 그릇된 인간관과 세계관에 바탕을 뒀고 인간으로 하여금 삶을 부정하게 하고 허무주의에 빠지게 만들었어. 지금까지 도덕은 그 자체가 '선'을 의미했고 보편적인 가치로 받아들여졌지. 시대와 장소를 뛰어넘어 '절대적인 것'으로 여겨진 게 바로 도덕이야. 하지만 니체는 보편적인 기준을 토대로한 도덕은 없다고 말해. 도덕은 상대적이라는 것이라는 말이야.
 니체 왈 "민족의 이름 위에는 저마다의 가치를 기록한 서판이 걸려 있다. 보라, 그것은 저마다의 민족이 극복해낸 바를 말하고 있으니...선과 악, 실로 그것은 저들이 어느 누구로부터 받아들인 것도, 스스로 찾아낸 것도 아니며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아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먼저 사물들에 가치를 부여해 왔다. 먼저 사물들에 그 의미를, 일종의 인간적 의미를 부여했던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선이란 각 민족이 사물에 부여한 저마다의 가치다. 사람들은 선의 가치가 삶을 고양시키고 위대하게 만든다고 믿어왔다. 그렇게 선과 악의 기준이 만들어지고 도덕이 형성됐다”고 말해. 니체는 선과 악, 도덕은 힘에의 의지가 사람들의 삶을 더욱 강하게 하기 위해, 번영을 유지하기 위해 만든거라고 봤어. 이 힘에의 의지는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지. 따라서 불변하는 선과 악 역시 존재하지 않아. 모든 것은 상대적일 뿐이야. 예를 들어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각각 자유와 절제를 최고의 덕으로 여겼지. 아테네는 해상무역과 상업이 발달해 있었고 스파르타는 내륙에 위치했어. 사실 스파르타 국민들 중 진성 스파르타 사람은 소수였고 대부분 스파르타 핏줄이 아닌 노예들이었어. 진성 스파르타 사람들은 다수의 노예를 컨트롤 하기 위해 절제 인내 질서를 강조했던거지. 선은 상대적이야. 니체는 "도덕 현상이란 존재하지 않고 단지 현상들에 대한 도덕적 해석만이 존재한다"고 말했어. 삶 이전에 존재하는 도덕은 없어. 단지 우리 삶과 힘에의 의지가 세계를 해석한 도덕적 해석이 있을 뿐이야.
 선악의 구분에는 형이상학적 이분법이 배어있어. 세계를 존재와 생성으로 나누어 보고 우리의 현실인 생성의 세계를 깎아내리고 모든 가치를 허구의 세계에 두었지. 망상을 추앙하고 현실을 악으로 평가했어. 니체는 전술한대로 다 개소리라고 하지. 현실세계를 그대로 인정할 용기가 없고 이 세계를 오물이라고 폄훼하는 그들이야말로 대지를 오염시키는 대지의 피부병이라고 말해. 니체는 절대적인 전통 도덕이 우리 삶을 어떻게 비방해왔고, 인간이 어떻게 삶을 부정하게 만들었는지 폭로해. 그리고 우리가 경멸하고 저주했던 걸 다시 살펴보는 '모든 가치의 재평가'를 시작해. 차라투스트라 "이 세계에서 가장 저주받아온 세가지는 쾌락, 이기심, 지배욕이다. 그것들을 저울에 달아보겠다". 이들의 가치가 재평가 받을 때 절대적인 도덕은 무너질테니까.
 첫째 그렇게 천대받던 쾌락이 정말 그렇게 나쁜걸까? 니체는 인간을 정신적 존재가 아니라 육체와 정신이 함께하는 커다란 하나의 신체로 인식 해. 육체가 누리는 감각적 쾌락을 부정한다면 인간 존재 전부를 부정하는 거야. 금욕은 곧 자학이야. 자학은 스스로를 긍정하지 못하게 하고 결국 허무주의에 빠져들게 만들어. "감각적 쾌락은 자유로운자들에게는 천진난만하고 자유로운 것이며, 지상낙원에서 누리는 행복이자 현재에 바치는 미칠듯한 고마움이다" 무엇보다 신체자체인 인간에게 육체를 벗어나라는 절대적 도덕의 명령은 말도 안 되는 헛소리지. 둘째 이기심. 기존의 도덕은 자기애를 버리고 남을 위한 헌신만 고귀하게 여겼어. 니체가 보기에 이기심과 이타심은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어. 자기를 사랑하는 관점에서 출발하지 않는 행위는 없어. 이타적인 행위도 결국 큰 틀에서 보면 이기적인 행위야. 내가 누군가를 돕는 이타행위도 결국 내가 뿌듯함 등의 만족을 위한 이기적 행위지. 이기적인 건 절대 나쁜 게 아니야. 우리가 힘에의 의지를 따라야 하는 존재라면 철저히 자기중심적으로 살아야 해. 자기중심적인 이기심이야 말로 자기애의 기본일테니까.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하기 때문에 삶을 더 풍성하고 의미 있게 만들려 하며, 세상과 투쟁하면서 더 많은 가치를 창조하려는 사람들의 이기심은 매우 위대한 거야. 셋째, 지배욕. 이건 이기심과 같은 맥락이야. 기존 절대도덕에서는 지배자를 악, 피지배자를 선으로 여겼지. 하지만 니체에게 지배욕이란 더 많은 것을 얻고자 하는 '힘에의 의지'에 충실한 자연스러운 마음이야. 아, 강자의 지배라고 해서 '파시즘'같은 걸 떠올리면 안 돼. 인간은 누구나 더 많은 걸 원해. 힘에의 의지를 실현하려고 다투고 경쟁하지. 니체는 힘에의 의지들이 강자가 되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것이 고귀하다고 말하는 거야. 맹목적인 지배와 복종은 힘에의 의지들이 더 이상 경쟁하지 않고 포기한 상태니까 나쁜 거야. 약자는 강자에게 끊임 없이 덤비고 이겨내려 노력해야해.
 니체는 기존의 절대적인 도덕을 퇴폐적 염세적이라고 생각하고 이를 '데카당스 도덕'이라 불러. 그리고 이를 없애고 새로운 도덕을 세우자고 제안하지. 바로 '주인도덕'과 '노예도덕'이 그것이야. 전자는 자기 가치를 긍정하고 스스로 가치를 창조하는자, 후자는 자기를 인정 못해서 다른 존재에게 의존하며 가치 창조를 못하는 자야. 중요한 건 우리가 한 때 주인 도덕을 갖고 열심히 노력해서 목표를 달성했을 때 거기 만족하고 가만 있는다면 이는 노예도덕으로 바뀐다는 거야. 절대 왕 귀족 노예 같은 계급적 의미가 아니야. 왕과 권력자라 해도 자리에 안주하는 순간 그들은 더이상 강자가 아니야. 반대로 피지배계층이라 해도 굴복하지 않고 싸운다면 그들은 더이상 약자가 아니지. 이렇게 니체는 선과 악을 넘어 삶의 주인이 되라고 요구해. 삶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삶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해. 자신을 긍정하고 자신의 가치를 창조할 때 우리는 삶을 사랑할 수 있어. 그런 사람에게 선과 악은 그저 삶을 넓히고 풍성하게 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해. 결코 핵심으로 자리잡을 수 없지.

 니체는 자신의 삶을 고양시킬 줄 아는, 다시 말해 높이 날 줄 아는 사람이 자신과 자신의 삶을 사랑한다고 생각해. 그리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지 "언젠가 사람들에게 나는 법을 가르치는 자는 모든 경계석을 옮겨놓고 말 것이다. 모든 경계석이 하늘로 날아가고 그는 이 대지에 '가벼운 것'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세계를 베풀어 줄 것이다" 갑자기 뜬금 없이 왜 난다는 소리를 하냐고 하겠지만 사실 이것도 니체 사상의 핵심 중 하나야. 천천히 알아보자. 우선 ‘가벼운 것이라는 이름으로 세례한다’는 말은 이 세상을 무겁게 받아들이면 안 된다는 뜻이야. 세상을 무겁게 받아들이는 사람을 '중력의 영'이라고 부르는데 맨날 투덜대고 온갖 규율과 도덕으로 우리를 내리누르는 사람을 말하지. 나는 법을 가르치려는 니체와 차라투스트라에게는 불구대천의 적이야. 니체는 ‘나는 그것이 창조한 모든 것을 뛰어 넘고자 한다’고 말해. 차라투스트라가 가르치려 한 비행술은 삶에 대한 사랑, 자신에 대한 긍정의 한 방식이야. 좀 더 높이 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할 때 이는 현재의 선입견 관심 도덕 같은 틀을 깨고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라는 뜻이야. 중력의 영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존재가 되라는 의미지. 현재에 만족하면 발전은 없어. 편안한 일상에 자리잡은 중력의 영은 달콤한 말로 우리를 끌어내리려고 해. 이를 이기기는 쉽지 않아. 그리고 차라투스트라가 가르치는 비행술은 많이 생각하고 고민해서 터득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오직 ‘춤과 웃음’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어. 즐겁고 유쾌한 비행술만이 중력의 영을 이길 수 있지.
 비행술에는 몇 가지 방법이 있어. 비행술의 첫 번째 원칙. '자신의 삶을 사랑하라'. 이건 무작정 기존의 편협한 세계를 떠나라는 말이 아니야. 삶을 부정하고 복수나 원한의 감정을 갖고 대하지 말것이며 중력의 영을 떨쳐내야해. 삶을 사랑하는 사람은 기존의 삶에서 벗어나 날아오를 때 어떠한 원한과 복수의 감정도 남기지 않고 훌훌 털어버릴 수 있어. 우리는 즐겁게 비상해야해. 니체 왈 "가벼워지기를 바라고 새가 되기를 바라는 자는 먼저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의 발 아래서 강제와 목적, 죄과라는 것이 마치 비처럼 자욱한 김을 내뿜을 때, 밝은 눈을 하고 먼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며 해맑게 미소짓는 법을 배웠다". 비행술의 두번째 원칙. 심각해지지 말 것. 우리는 웃고 춤추며 즐거워하는 행동을 경박하다고 여기곤 해. 좀 더 진지해지길 바라는 게 이 세상이니까. 하지만 니체는 이를 불쾌하다고 얘기할 거야. 니체는 "대다수 인간의 지성은 잘못 움직이고 둔중하고 음울하며 삐걱거리는 기계다. 이 기계를 움직이기 위해 열심히 사고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 그들은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한다'고 말한다. 이 사랑스런 '인간 동물'은 생각하는 것을 음울한 상태에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웃음과 즐거움이 있는 곳에서의 사고를 무익하다고 말한다. 이는 '즐거운 지식'에 대한 심각한 동물들의 편견이다"라고 말해. 기계는 경직되고 생명력 없는 철학자를 비유한 거야. 과연 우리가 고작 얼굴에 짙은 고민을 드리우기 위해 사는 걸까? 그런 삶은 우리를 위축시키고 의지를 감소시켜. 무엇보다 솔직하지 못하다는 게 제일 문제야.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들과 최대한 즐겁고 유쾌한 시간을 가져야 해. 사랑은 상대방의 얼굴에 고민의 주름을 만드는 게 아니라 기쁜 표정을 새겨 넣는 것이니까. 차라투스트라는 심각한 얼굴로 자유와 사랑을 말하는 사람을 믿지 않아. 그의 춤과 웃음은 바로 삶을 긍정하는 사람이 가진 몸짓이야. 비행술은 자신을 극복해나가는 기술이자 삶을 유쾌하게 긍정하는 모습이야. 그 핵심 원리가 바로 춤과 웃음이지.

 자, 그럼 드디어 아까부터 그렇게 생략해왔던 니체 사상의 핵심,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인간상 '위버멘쉬'를 만나보자. 그리고 되어보자. 사실 비행술은 위버멘쉬가 되기 위한 운동 원리야. 또한 변신술의 다른 표현이지. 변신술과 비행술을 통해 위버멘쉬를 이룰 수 있어. 비행술은 살펴봤고 이번엔 변신술에 대해 알아보자. 변신술에는 세 단계가 있어. ‘낙타-사자-아기’가 그것이지. 낙타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고통스럽게 만들면서 이를 받아들이고 견뎌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노예정신을 지닌 자들이야. 삶을 더 높은 차원으로 고양시키지 못하는 놈들이지. 반면 사자는 그 명령을 거부하고 남의 말을 죽어도 듣지 않는 동물이야. 즉 자유를 향한 열망을 가진 동물이지. 자신의 모든 주인을 물리친 사자는 황금용으로 변신한 신과 맞닥뜨리는데, 그에게도 굴복하지 않아. 누구의 명령도 따르지 않고 오직 자신의 욕망을 신뢰하겠다는 거지. 신과 함께하며 안락하기 보다는 기꺼이 고독과 굶주림을 선택해. 언뜻 듣기에 사자는 괜찮은 것 같지만 가장 중요한 ‘삶을 긍정하는 태도’가 빠져 있어 완벽하지 않아. 그런 삶을 사는 사자는 유쾌하고 즐겁지 않을 테니까. 아무리 용한테 개긴다고 해도 용을 이길 순 없지. 자 그래서 마지막으로 완전체로 제시한 게 바로 어린아이야. ‘어린아이의 정신’이 필요하다는 거지. 차라투스트라는 "어린아이는 천진난만이요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스스로의 힘으로 굴러가는 수레바퀴이고 최초의 운동이자 신성한 긍정이다"라고 말해. 니체가 주목한 건 아이의 욕망에 충실하고 도덕적 선과 악을 넘어선 비도덕적인 특성이야. 아이가 가진 '웃음'역시 매우 중요하지. 만약 사자에게 용이 부정의 대상이요 적이었다면 아이에게는 그저 웃음거리이자 놀림감에 불과해. 사실 낙타 사자 아기라는 진화단계는 사실 좀 어처구니 없이 들릴 수도 있어. 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우리에게 이 비유와 우화를 통해 긍정을 얘기하고 있는 거야. 춤과 웃음. 그리고 변신의 마지막 단계인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함은 삶에 대한 긍정의 얼굴들이야. 변신술과 비행술을 통해 긍정하는 자가 되어야함을 우리에게 가르칠 때 그는 이미 위버멘시에 대한 가르침을 시작하고 있어.
 지금까지 니체가 말한 걸 정리해보자. '신의 죽음'은 낡은 도덕, 형이상학적 세계관, 신앙, 가치 등처럼 우리 삶을 부정하고 지배해왔던 모든 것들에 대한 사망선고야. 니체는 신의 죽음에서 새로운 존재의 탄생을 희망해. 그가 바로 ‘위버멘쉬’야. 니체는 "나는 너희에게 위버멘쉬를 가르치노라. 사람은 극복되어야할 무엇이다"라고 말해. Ubermensch는 독일언데 Uber(over)+mensch(man)으로, 즉 인간을 넘어섬, 극복함 이라는 뜻이야. 신이나 슈퍼맨 초능력자 그딴걸로 오해하면 안돼. 다윈의 진화론 같은 생물학적 진화를 얘기하는 것도 아냐. 위버멘쉬는 '인간적인 것'을 넘어서라는 뜻이야. 인간적이라는 건 더 이상 자신의 힘에의 의지에 충실하지 않는다는 거야. 차라투스트라 왈 "위버멘쉬는 대지를 위미한다. 나의 형제들이여, 내가 그들에게 명하노니 대지에 충실하라. 그리고 그들에게 대지를 초월한 희망에 대해 말하는 자들은 믿지 말라! 그들이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행하든 그들은 독을 타는 자들이다" 위버멘쉬는 곧 대지에서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이야. 대지의 삶에 충실하기 위해, 대지의 본성인 힘에의 의지에 충실하기 위해 인간은 '인간적인 것'을 극복해야 해. 힘에의 의지는 항상 더 많은 것을 원하고 강해지고자 하기 때문에 힘에의 의지를 추구하는 인간의 신체는 현재의 자신을 끊임 없이 극복해나가야 해. 대지에 충실하다는 건 곧 끊임 없이 자신을 극복해 간다는 말이야. 이런 위버멘쉬와 정반대의 인간이 1. 창조 신 별 같은 걸 찬양하고 동경하는 인간 2. 이웃사랑 형제애 동정 관용 등을 중시하는 인간(이는 개인의 힘을 약화시키고 남한테 의존하게 만드니까) 3. 편안함과 안락함을 중시하는 인간 4. 평등을 추구하는 인간(평등이란 약자가 강자에게 갖는 복수심에서 생겨났어)이라고 말해. 그는 인간은 본질적으로 불평등하다고 하지. 위 네 부류의 인간들은 무기력하고 옹졸한 현 상황을 바꾸기 보다는 우물 안 개구리처럼 더 높이 갈 시도도 생각도 안 해. 그냥 만족하고 말 뿐이야. 스스로 경멸할 수 없기에 자신의 문제점을 고민하고 반성할 수도 없어. 그저 자기만족에 빠진 채 수많은 군중 속에 자신을 숨기고 싶어 해. 그런 무리 속에서는 개인의 개성이 말살되고 의미와 가치를 창조해내기 보다는 집단을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집단적 가치나 강한 지도자를 숭배 해. 이런 면에서 니체는 파시즘을 극도로 혐오했어. 하지만 나치에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다고 오해 받고 있지. 동생 썅년 때문이야. 니체가 병걸려서 죽기 직전까지 그를 전시장에 데려가서 전시하면서 돈벌이로 사용했고, 죽은 뒤에는 니체 사상을 지 좆대로 해석해서 히틀러한테 갖다 바치는 등 온갖 개짓거리를 다 했어. 히틀러와 나치는 인종적 편견에 휩싸였던 것일 뿐 좀 더 높은 정신을 가지기 위해 투쟁한 게 아니야. 니체는 우리 모두에게 각자의 힘에의 의지에 충실할 것을 요구했지 특정 이념에 개성을 뺏겨 순종하라고 하지 않았어. 오히려 집단주의에 대항하여 ‘거리의 파토스’를 가지라고 요구해. 거리의 파토스란 집단과 대중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자기만의 개성적인 자아를 만들어내는 태도야. => 위버멘쉬는 인간적인 것들로 부터 멀리 벗어나 직접 삶의 목표를 설정하고 모든 것의 의미와 가치를 스스로 평가하며 창조해내는 자야. 진정한 의미의 자기극복에는 반드시 몰락이 전제되어야 해. 오늘의 내가 새로워지려면 어제의 나를 버려야 하니까. 자신을 극복하고자 하는 자는 항상 기꺼이 몰락하고자 하는 용기를 가져야 해. '자유정신'을 가지는 사람이지! 근데 위버멘쉬는 아직 한 번도 실현된 적 없어. 니체 자신도, 차라투스트라도 위버멘쉬가 아니라고 생각했어. 물론 이 책 마지막에 차라투스트라는 위버멘쉬의 궁극적 변화를 예감하긴 해. 즉 어린아이에 대한 예감이지. 차라투스트라는 "나의 고통과 연민이 무슨 상관인가! 나는 행복을 열망하고 있는가? 나는 나의 작품을 열망하고 있을 뿐이다. 좋다! 사자는 왔으며 내 아이들도 가까이에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성숙해졌다. 나의 때가 온 것이다"라고 말해. 근데 그렇다고 얘가 위버멘쉬가 됐다고는 얘기 안해. 차라투스트라 마저도 모범 답안이 아니야(얘 잘못 숭배하다가 조로아스터교 같은게 생겼지). 우리 삶만이 유일한 진리야. 니체는 우리 삶을 해방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자신의 사상, 철학을 피력해냈어. 그의 철학은 ‘Amor Fati’로 대표되는데 이건 운명애, 자기 자신의 운명인 삶 그 자체를 사랑하라는 뜻이지. 근대가 만들어낸 합리성 과학 도덕주의 윤리 합의 가치 등은 모두 또 다른 신에 불과 해. 근데...... 신은 죽었어!

자, 이렇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끝이 났어. 니체의 이야기에 따르면 우린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정리해보자.
 1. 각자 스스로 기꺼이 몰락하면서 자기 자신을 극복해 나갈 것
 2. 그리하여 끊임 없이 변화하는 대지의 삶에 충실할 것
 3. 힘에의 의지, 그 자체가 될 것
 4. 편협한 이성을 넘어 육체와 정신을 더 높은 단계로 고양시키는 신체를 가질 것
 5. 절대적 도덕, 즉 선과 악을 넘어서는 가치를 스스로 평가할 것
 6. 자기 극복의 과정을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놀이하듯 즐길 것
 7. 결국 이 모든 차라투스트라의 충고는 '삶에 대한 사랑'임을 명심할 것!
-From 모든 사람을 위한, 그러면서도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

니체 "만약 네가 하고 싶은 모든 것에 있어서 네가 무한히 그것을 하길 원하는지 자문한다면, 그것은 네게 있어 가장 확고한 무게중심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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