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철학의 끝판왕 플라톤이다. 화이트 헤드는 '모든 서양 철학은 플라톤에 주석을 다는 것에 불과하다'고 했다. 좀 과감히 말하면 B.C 3세기 이후 서양 철학은 플라톤에 대한 찬성과 반대, 이 둘 뿐이다.
『국가』는 600페이지짜리 책 열권이 모여 완성된다. 한 세 권 정도면 어떻게 꾸역꾸역 읽어볼텐데 열권이라니 도저히 엄두가 안 난다. 그래서 걍 짧은 요약본부터 보기로 했다. 근데 내용이 개판임. 초반엔 봐줄만 했는데 갈수록 설명이 부실하다. 특히 플라톤 철학의 핵심인 '이데아' 파트에서는 옮긴이 스스로도 지가 뭔 얘길하는지 모르는 듯한 기분. 알고 보니 철학 전공자도 아닌 고등학교 과학교사였다. 환장하네... 그래도 전체적인 줄기 파악은 됐다. 부족한 면은 인터넷 찾고 원전 보면서 채워나갔다. 별로 어렵진 않은데 가끔 이해가 안되는 파트(저 밑에 ‘선분의 비유’)가 있다. 근데 전체적으로 무난무난하다. 읽다가 재미없는 사람은 다 제끼고 ‘타락한 국가와 혼’ 파트로 넘어가셈.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국가』는 '국가는 어때야 하는가, 그와 비슷한 인간은 어떤 인간인가'를 논한 책이다. 한마디로 ‘플라톤이 꿈꾸는 국가’다. 사실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좀 어이없을 정도로 계급주의, 전체주의적이고 폐쇄적이며 이상적이다. 민주주의를 무지 싫어하고 핏줄과 혈통에 따른 철저한 계급사회를 추구한다.
초반엔 더럽게 재미없다. 그래도 좀만 참고 읽다보면 플라톤의 통찰력에 지릴 것이다. 2000년 전 사람이 얘기한대로 이 세상이 흘러왔다. 지금의 세상은 그의 주장처럼 굴러간다. 특히 지금 우리나라가 딱 플라톤이 말한 민주정체에서 참주정체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놓인 듯하다.
그가 꿈꾸는 국가는 설득력이 있을까? 판단은 당신 몫이다. 자 가보자.
1. 여기는 기원전 5세기, 고대 그리스 아테네. 소크라테스는 여러 사람과 '올바름'이 무엇인가를 두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여기서 올바름이란 흔히 말하는 '정의'다. 저스티스! 마이클 샌댈의 '정의란 무엇인가'할 때 그 정의. 후술하겠지만 정의는 플라톤 철학에서 지혜 용기 절제의 완전한 조화를 이르는 말이다. 이 책의 핵심.
소크라테스: 어르신, 노년의 삶은 어떤가요?
케팔로스: 우리 노인들은 모였다 하면 젊은 시절의 즐거움을 아쉬워합니다. 한때는 잘 살았지만 지금은 제대로 살고 있지 않다고들 하죠. 어떤 노인들은 친척의 불손한 태도에 탄식하고 자신의 불행이 나이 탓이라고도 해요. 그래도 노인이 되어 욕망이 가라앉으니 평화롭고 자유롭다고도 하네요. 늙었다고 불평하는 사람은 대부분 나이 자체보다는 생활 습관이나 성격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소크라테스: 음... 성격도 중요하지만 오히려 재산이 더 중요한 때가 많지 않을까요. 재산이 많아서 좋은 점은 뭔가요?
케팔로스: 죄 지은 사람은 밤에 잠도 못자고 불안감에 덜덜 떨지만 죄 없는 사람은 즐겁게 살죠. 마찬가지로 재산이 많으면 돈을 벌기 위해 남을 속일 필요도 없고 빚을 지지 않아도 되며, 그 빚을 못 갚을 걱정을 안해도 되죠. 재물은 인간이 개체로서 생존하기 위해서도 그렇지만 인격체로 자존심을 지키고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도 꼭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가난한 사람을 비인간적으로 대하는 건 옳지 못해요.
소크라테스: '올바름'의 의미가 '정직함'과 '빚을 갚는 것'이라 볼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이 정신이 멀쩡했을 때 친구에게 무기를 맡겼다가 미친 상태로 돌아와 돌려달라고 하는 경우를 봅시다. 이럴 땐 그에게 무기를 돌려주면 안 되고 정직하게 말해서도 안 되지 않을까요?
케팔로스: 음..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군요.
소크라테스: 진실이 항상 올바르지만은 않다는 얘깁니다. 즉 올바름이 무엇이냐에 대한 답 중에서 '진실을 말하고 받은 것을 갚는 것'이라는 대답은 제외됐습니다.
폴레마르코스: 저도 한마디 하죠. 각자에게 갚을 것을 갚는 것, 각자에게 합당한 것을 주는 것이 바로 올바름입니다.
소크라테스: 그게 무슨 말인가요?
폴레마르코스: 친구에겐 좋은 것을, 적에게는 나쁜 것을 주는 게 당연하다는 뜻입니다.
소크라테스: 그치만 사람의 눈은 그리 정확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종종 친구를 오해하곤 하죠. 친구와 적을 제대로 구별 못하는 일도 얼마든지 생길 수 있고요. 그가 내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줄도 모르잖아요. 아닌가요?
폴레마르코스: 뭐, 인간이 신처럼 완벽할 순 없으니까요.. 그러면 친구를 '겉과 속이 일치하는 사람'으로 바꾸죠. 정말로 좋은 친구에게는 이익을, 정말로 나쁜 적에게는 해로움을 주는 게 올바름입니다. 나에게 나쁜 짓을 하는 사람에겐 당연히 대가를 돌려줘야 하죠. 불의에 가차 없이 응징해야 세상의 바로 서지 않을까요.
소크라테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명색이 '올바른 사람'이 어떻게 남을 해롭게 하나요? 친구든 적이든 누군가를 해치는 일은 그 어떤 경우에도 올바르지 않습니다.
폴레마르코스: 음... 선생님 말이 맞네요.
트라시마코스: 아오 !! 소크라테스 선생님, 말장난 좀 그만 하시죠! 남한테 질문만 하지 말고 올바름이 뭔지 니가 직접 얘기해보세요! 아까부터 계속 질문은 회피하고 앉았네. 올바름은 바로 강자(통치자)의 이익입니다. 지배자들은 자기 이익을 위해 법을 제정하고 피지배자에게 그것이 옳은 것이라 말하며 이를 어기는 사람을 범법자로 여겨 벌을 내립니다. 그러니 법을 만든 지배자의 이익이 곧 올바름이죠. 어때요?
소크라테스: 음.. 그럼 피지배자는 지배자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하나요?
트라시마코스: 그렇습니다.
소크라테스: 그런데 지배자들이 법을 제정할 때도 실수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실수하니까요. 생각했던 것과 정반대의 결과를 자초할 수도 있어요.
트라시마코스: 뭐 인간이니까요.
소크라테스: 만약 지배자가 실수로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법을 만들면 당신 말이랑 정반대가 되는 거죠. 즉 올바름이 항상 강자의 이익이라고 볼 순 없어요.
트라시마코스: 인간은 실수를 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전문가라면 실수하지 않죠. 실수한다면 그는 진정한 지배자가 아닙니다. 엄밀히 따지면 실수했던 적이 있는 사람은 지배자가 될 수 없었겠죠. 즉 지배자는 실수하지 않고, 자신을 위한 최선을 만들고 피지배자들은 이를 따라야 합니다. 따라서 강자의 이익이 곧 올바름입니다.
소크라테스: 그럼 제가 지배자 얘기를 해보죠. 의사와 선장을 예로 들겠습니다. 의사는 돈벌이 뿐 아니라 환자의 건강, 즉 나의 이익과 상대의 이익을 모두 추구합니다. 선장은 자신 뿐 아니라 선원의 목숨도 함께 고려하여 항해 준비를 하고 안전 운항을 하죠. 엄밀한 의미에서 지배자는 자기 이익 뿐 아니라 지배받는 쪽도 생각합니다. 백성이 잘 살아야 나라가 잘 살고, 나라가 잘 살아야 지배자도 잘 사니까요.
트라시마코스: 그건 너무 순진한 생각 아닙니까? 국가에 세금을 낼 때 정직하게 납세하는 사람, 편법으로 탈세하는 사람이 있죠. 전자는 후자에 비해 손해를 보는 게 현실입니다. 올바름이란 결국 지배자의 이익이고 그에 복종하는 피지배자는 피해만 볼 뿐입니다. 부정의 상태에서 부정한 사람은 행복하지만 정의로운 사람은 비참합니다. 불의가 대규모로 저질러지는 경우에는 불의가 정의보다 강하고 자유로우며 힘이 셉니다. 따라서 올바름은 곧 강자의 이익이죠. 힘은 진리이고 진리는 곧 올바름입니다. 올바름이란 가치는 강자의 이익을 포장하는 데 이용될 뿐입니다. 지금은 올바른 사람이 불이익을 당하는 세상입니다. 따라서 올바름은 인생에 결코 도움이 안되고 취할 게 못됩니다.
소크라테스: 질문 하나 하죠. '올바르지 못함'이 나쁜 것이고 창피한 것이라는 데는 동의하시나요?
트라시마코스: 아뇨. 올바르지 못한 것은 곧 이익이며 훌륭함, 지혜입니다.
소크라테스: 그렇다면 나도 더 이상 할 말이 없네요. 올바름과 올바르지 못함, 둘 중 어느 것이 더 강력한지는 결과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올바름이 있어야만 개인과 집단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죠. 이는 생활태도, 삶의 신조와 직결되므로 결코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올바름은 영혼이 관장하죠. 혼이 훌륭할 때 올바른 사람으로서 훌륭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행복하고 행복은 곧 이득입니다. 결국 올바름이 올바르지 못함보다 이익이며, 올바른 사람이 올바르지 못한 사람보다 행복하겠지요.
이렇게 다들 올바름에 대해 토론을 이어나갔다. 그럼 이 올바름이란 게 왜 그리 중요한 걸까. 이번엔 소크라테스의 제자이자 플라톤의 형들인 글라우콘 얘기를 들어보자.
글라우콘: 사람들은 올바르지 못한 일을 이익이 있는 좋은 일로, 올바른 일을 손해를 보는 나쁜 일로 봅니다. 사람들에게 마음대로 행동할 자유를 주면 올바른 사람 역시 욕심과 이익 때문에 올바르지 못한 행동을 하죠. 결국 모든 인간은 자기 욕심과 이익 때문에 올바르지 못한 방향으로 흐릅니다. 예를 들어 원하는 물건을 모두 가질 수 있고 사람을 마음대로 죽여도 처벌받지 않는 능력을 주는 '기게스의 반지(반지의 제왕 모티브)'를 갖는다고 생각해보시죠. 과연 남의 것에 손대지 않는 양심적인 사람이 있을까요? 뒤탈 없이 나쁜 짓을 저지르고 이익을 얻을 수 있다면 누구나 다 그럴겁니다. 즉 올바른 행동은 개인적으로 좋은 것이 아니기에 자발적으로가 아닌 어쩔 수 없이 실천할 뿐입니다. 올바름은 분명 인간이 추구해야 할 가치지만 그 자체로 좋다고 확신할 수 없습니다. 올바름이 그 자체로서 좋은 것임을 입증해보시죠.
그리하여 소크라테스는 올바름 자체를 찾기 위한 긴 여정을 시작했다. 그 이야기가 적혀있는 게 바로 플라톤의 『국가』다.
소크라테스: 이렇게 생각해봅시다. 가까이 있는 A라는 글씨와 멀리 있는 A라는 글씨가 같은 글씨인지 판별하는 겁니다. 올바름은 개인의 책임도, 국가 전체의 책임도 있습니다. 그리고 개인의 올바름 보다는 국가 전체의 올바름이 더 규모가 크니 알기 쉽습니다. 즉 큰 규모의 올바름(국가, 법률)부터 시작한 후 작은 규모의 올바름(개인)을 검토해봅시다. 그러자면 맨처음, 국가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부터 알아봐야 겠지요.
자,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여기서부터 소크라테스 1인칭. 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처럼 이 책에서 소크라테스=플라톤이다.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서술한 것.
2. 국가는 태초에 어떻게 탄생했는가. 누군가 갑자기 '국가여 여기 있으라!'해서 생긴 건 아닐게다. 국가는 인간의 필요에 의해 탄생했다. 인간은 자족할 수 없지만 필요한 게 너무 많다. 따라서 서로의 필요를 위해 협력할 수밖에 없었다. 태초에 인간은 세 가지가 필요했다. 첫번째는 먹을 음식, 두번째는 마음 편히 생활할 공간, 세번째는 몸을 보호할 옷이다. 즉 의식주 세 가지가 인간의 협력, 생존의 최우선 목표였다. 하지만 이 셋만 가지고 인간답게 살 수는 없다. 신발 그릇 무기 등 각종 집기도 필요하다. 이 모든 것을 개인 혼자 스스로 만들려면 하루하루 힘겹게 살다 생을 마칠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저마다 특히 잘하는 재주나 기술 한가지쯤은 있다. 목수는 나무를 잘 다루고 건축가는 집을 잘 짓는다. 그래서 각자는 그것을 직업으로 택한다. 그 생산물을 교환하는 사람들이 모여 국가를 이룬다. 그렇다 해도 나라 내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예를 들어 쌀은 많지만 고기가 적은 나라, 고기가 많지만 쌀은 적은 나라. 그들은 서로 물품을 교류하게 됐고 이것은 무역과 수출입을 낳았다. 여기서 무역 거래를 맡는 무역상, 물건을 실어나를 운송수단 등이 탄생했다. 국가 안에서 물건을 사고 팔기 위해 화폐가 만들어지고 장사꾼도 나온다. 튼튼한 몸으로 돈 받고 일하는 노동자도 생긴다. 이렇게 국가에 여러 직업군이 등장하고 국가규모는 점점 커진다. 생존에 필수적인 것 뿐 아니라 여가나 취미 등 삶을 윤택하게 하는 직업도 생긴다. 이쯤 되면 자기 나라의 영토나 재산만으로는 부족해진다. 그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답은 전쟁이다. 전쟁을 하자면 모든 국민이 무기를 들고 싸울 수 있다. 하지만 싸움을 아주 잘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고, 그들은 군인이 되어 국민을 대신해 싸운다. 나라에서는 각자가 타고난 소질에 맞게 한 가지 일만 한다. 그리고 이 전쟁이야말로 국가에 가장 중요한 일이다. 전사가 나라를 지키지 못하면 국민 모두는 죽거나 팔려가 국가는 해체되니까.
나는 국가를 구성하는 계급을 크게 둘로 나누었다. 생산을 담당하는 시민계급, 나라를 지키는 수호계급이다. 국가의 수호자는 가장 중요한 일을 맡기 때문에 나라를 지키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그에 필요한 기술을 갖춰야 한다. 수호자는 개와 같다. 감각이 뛰어나고 적을 쫓기 위해 날렵하며, 싸우기 위해 힘이 강하며 거칠고 용감해야 한다. 하지만 아무에게나 거칠면 안 된다. 개든 수호자든 적에게는 거칠어야 하지만 친근한 사람에게는 온순해야 한다. 온순과 격정을 동시에 갖춰야 한다. 좋은 개는 영리해서 주인에겐 친근하지만 낯선 이에게는 사납다. 마찬가지로 수호자가 될 사람은 천성적으로 격정적인 기질과 함께 지혜를 사랑해야 한다. 날쌔고 힘이 세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 수호계급은 다시 통치계급과 통치계급을 지키는 수호계급으로 나뉜다(시민계급 수호계급 통치계급. 지금의 국민 군인 정치인). 수호계급의 교육은 매우 중요하다. 우수한 자질을 갖고 태어나도 적절한 교육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수호자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가지면 안 된다. 만약 작가나 시인이 죽음에 대한 공포를 키운다면 수호자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 국가는 죽음을 찬양하거나 지옥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면 안된다. 죽음은 크나큰 명예요, 영광스러운 선물이다. 또한 작가들이 수호자(전사)를 나약하게 묘사하면 보통 사람들은 그들을 별로 대단치 않게 여겨 자신의 부족함을 반성하지 않을 것이다. 작가들은 권성징악의 스토리를 집필하여 '정의가 지켜져야 이롭다'라고 이야기해야 한다. 한마디로 국가는 작가를 검열해야 한다. 청년들은 수호자에 복종하고 도덕적으로 문란하지 않아야 한다.
체육은 몸보다는 정신을 단련하기 위한 교육이다. 식생활과 생활습관을 길들이는 것도 중요하다. 이런 식으로 음악(고대 그리스는 음악에 문학이 포함되어 있었음), 체육 교육을 마친 17세 18세 청년들은 20세까지 지휘관의 지도 아래 병사들을 돕고 위험을 극복하는 능력을 기른다. 국가는 20세가 된 수호자 집단에서 통치자가 될 사람을 가려낸다. 수호자 집단에서 일부는 통치자가, 일부는 통치 받는 자가 된다. 다시 말해 철학교육을 더 받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분류된다. 통치자는 연소자보다는 연장자가 적합하다. 통치자는 자질이나 능력 면에서도 가장 훌륭한 사람이어야 한다. 국가에 이로운 일에 열의를 다하고 평생 그렇게 살 사람이 필요하다. 그 생각이 일생동안 확고하고 어떤 유혹이나 강압에도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이 모든 시험을 통과한 소수의 사람을 통치자로 임명한다. 그들에게는 명예는 물론 무덤, 기념물에도 최대의 특전을 줘야 한다. 아쉽게 탈락한 사람은 통치자를 보조하고 협력하는 사람이 된다. 이들 역시 넓은 의미에서는 수호계급에 속하기에 수호자(전사)라고 부른다.
통치자는 국가적 차원의 거짓말을 만들어 모두가 믿게 해야 한다. (일종의 박혁거세 신화 처럼) 수호자들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땅속에서 만들어져 양육됐고 대지의 어머니에 의해 지상으로 보내졌다는 식이다. 그래야 국민들이 외세가 침략하면 어머니를 지키듯 나라를 지킨다. 전사들은 시민들을 형제처럼 대해야 한다.
신은 사람을 만들 때 계급에 따라 다른 재료를 사용했다. 통치자는 금, 보조자는 은, 일반시민은 쇠와 구리로 만들어졌다. 출신성분은 속일 수 없어서 사람은 자기와 닮은 꼴의 자식을 낳는다. 그러나 때로는 금의 부모에게서 은의 자식이, 구리의 부모에게서 금의 자식이 태어나기도 한다. 이럴 경우엔 자식이 지닌 성분에 맞게 살도록 해야 한다. 금의 부모에서 태어난 구리 자식은 일반 시민으로, 구리 부모에서 태어난 금과 은의 자식은 통치자로 살게 해줘야 한다. 쇠나 구리 성분 자식이 커서 국가를 다스리면 멸망한다는 신의 계시 때문이다. 이런 거짓말들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각자 타고난 성향에 맞는 일을 해야 하니까. 각자 맡은 일에 종사함으로써 국가 전체는 하나의 몸처럼 유기적으로 움직인다.
*이상 플라톤의 사상은 한마디로 '엘리트주의'다. 각자가 추구하는 바에 따라 계급이 정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물질적 욕망을 추구하면 시민계급, 권력과 싸움을 좋아하면 수호계급, 지혜와 이성을 중시하면 통치계급. 이런 계급구도가 유지되려면 계급에 맞는 교육이 이루어져야 하고 통치계급을 위해서 특별한 엘리트 교육을 해야 한다. 요즘 같으면 동의할 사람이 거의 없겠지만 사실 이런 사상은 인류를 매우 오래 지배했다. 중세 유럽, 봉건제, 노예제, 심지어 동양의 유교사상과 일맥상통하기도 한다. 여기서 주목할 건 아이를 키울 때 부모가 잘 관찰하여 아이 본성에 맞는 일을 하게 해야 한다는 점이다. 플라톤은 부모 욕심이 아닌 자식의 소질에 맞는 능력을 개발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수호자들은 통치자의 지도 아래 국가를 이끌어간다. 그들은 주둔지를 정하고 제사를 올리며 막사를 꾸린다. 일반시민보다 훨씬 강한 수호자들은 마음만 먹으면 시민을 제압할 수 있다. 그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으려면 통치자들이 수호자를 감시하고 교육해야한다. 다음은 재산문제다. 수호계급(수호자+통치자)은 사유재산을 가지면 안 된다. 자기 집이나 땅은 물론 생필품도 시민들로부터 공급받아 사용한다. 이는 수호자들이 개인적 욕망을 참고 시민을 지켜주는 대가다. 그 대가를 풍족하게 받을 수는 없다. 따라서 수호자들은 공동생활을 해야한다. 다음으로 나라에서는 수호계급을 세뇌시켜야 한다. 자신의 영혼에는 신이 내린 금과 은이 들어있기 때문에 이 세상의 금과 은은 전혀 필요 없다는 식으로 말이다. 일반 시민의 돈은 속물스럽지만 수호계급은 돈은 순수하므로 시민들과 섞여선 안 된다. 수호계급은 금과 은을 다뤄서도, 그 잔으로 술을 마셔도, 몸에 걸쳐도 안 된다. 개인적인 여행도, 선물도, 물건 구매도 금지된다. 이외에도 해서는 안 될 일이 매우 많다. 수호자가 땅이나 집을 가지면 집 주인, 농부가 되고 시민의 협력자가 아닌 적대적 주인으로 변한다. 그렇게 되면 계급 간 갈등이 발생하고 외부 적보다는 내부 사람들끼리 치고받고 싸울 것이다. 그러는 동안 수호계급과 시민계급은 파멸에 이른다. 이런 비극을 막기 위해서는 규칙이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이 모든 규범이 지켜지도록 법을 제정하고 엄격히 준수해야 한다(그래서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다'라며 독배를 마신 듯)
3. 국가는 어느 한 집단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이 아닌 전체가 행복하기 위해 만들어진 게 바로 국가다. 나보다는 우리가 우선이다. 전체계급의 행복을 위해 수호계급은 희생을 감수한다. 따라서 국가는 수호자들이 자신의 사명을 가슴 깊이 인식하도록 설득해야 한다. 국가 전체가 번성하고 기반이 잡히면 각 집단은 성향에 맞는 행복을 누린다. 국민이 늘어나면 국가 규모도 커지고 타국에 비해 부강해진다. 물론 나라가 무조건 크다고 좋은 건 아니다. 지나치게 크면 오래 유지하기 어렵다. 통치자의 힘이 퍼져 나갈만한,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단일 국가가 좋다.
수호계급의 결혼과 출산 역시 공동행위가 되어야 한다. 혼인도 처음부터 끝까지 국가가 맡는다. 수호자들에게는 나만의 배우자, 나만의 자식이 있으면 안 된다. 그렇다고 '처와 자식의 공유'를 얘기하는 게 아니다. 사사로운 욕망, 이익, 가족이기주의를 경계해야 한다는 뜻이다. 공동체 이익보다 자기 가족의 이익을 우선시하면 안 된다. 이렇게 국가가 출발하면 건전한 양육, 교육으로 훌륭한 수호자가 자라고 출산결과도 좋다. 수호계급 핏줄은 지켜져야 한다. 그들끼리, 그들만의 리그를 훨씬 공고히 하고 모든 게 기존 질서대로 유지되어야 한다. 그들은 법률 없이도 올바른 생활 태도를 하도록 교육받는다. 이제 우리 국가가 만들어졌으니 전술한 문제의 답을 찾아보자. 올바름과 올바르지 못함은 무엇이고 이 둘은 어떻게 다른가, 행복하고자 하는 사람은 둘 중 어느 것을 지녀야 할까.
①국가차원의 올바름
올바른 국가는 지혜 용기 절제, 올바름을 갖춰야 한다. 지혜를 갖는 건 분별력을 갖췄다는 뜻이다. 지혜는 철학적 사색에서 나오고 분별력은 지식에서 나온다 . 여기서 지식은 국가의 특정부분에 관한 지식이 아닌 국가 전체에 관한 철학적 지식이다. 철학적 지식은 통치계급의 전유물이다. 국가가 지혜로울 수 있는 이유는 통치계급의 지식 덕이다. 국가를 신체로 보면 통치자는 머리 부분이다. 용기는 두려움 속에서도 생각과 판단이 흔들리지 않는 감정이다. 교육을 통해 두려운 것, 두려워해선 안 되는 것의 개념을 마음속에 새긴다. 그 어떤 쾌락 욕망 공포가 닥쳐도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국가는 전사를 선발해 교육하고 단련시켜야 한다. 용기의 전사계급은 신체 중 가슴에 해당한다. 마지막 절제. 절제는 음악으로 치면 화성(하모니)이다. 인간 혼이 나쁜 것을 참고 좋은 것을 행할 때 우리는 절제한다고 말한다. 국가에도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있는데, 전자가 후자의 욕구를 제압하는 상태가 바로 절제다. 나아가 통치자와 피통치자의 통치의견이 일치할 경우 양쪽 모두 절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용기나 지혜는 국가의 한 집단만 가져도 되지만 절제는 모든 계급이 함께 지녀야 한다. 목소리가 다른 사람들이 화음을 이루어 합창하는 것처럼 말이다. 절제는 특히 생산계급에게 필수적이다. 생산계급은 배와 팔다리에 해당한다. 위의 지혜 용기 절제라는 세 요소가 결합하면 올바른 국가가 될까?? 아니다. 아직 한 단계가 남았다. 바로 계급 이동 불가다. 각 계급은 자기 일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 생산계급끼리는 일을 바꿔도 국가전체에 큰 지장이 없지만 계급 간 업무변경은 큰 문제를 야기한다. 장사꾼이 전사계급으로 가거나 전사계급이 통치계급으로 가면 자신 뿐 아니라 나라 전체를 망치게 된다. 정해진 법을 어기는 자는 나라를 망친다.
②인간의 올바름
인간의 구조는 국가구조와 같다. 인간의 영혼은 크게 이성 욕구 격정으로 구성된다. 인간은 배우고(이성) 발끈하고(격정) 쾌락을 갈망(욕구)한다. 격정은 욕구와 한편이 되기도, 이성과 한편이 되기도 하여 사람의 영혼 내에서 줄타기를 한다. 우린 늘 이런 갈등 속에서 살아간다. 태어날 때는 격정으로 가득 차 있지만 성장하면서 이성을 지닌다. 국가는 이런 개인과 같은 구조다. 지혜 절제 용기의 결합, 영혼의 각 부분이 제 역할에 맞는 일을 해야 올바른 개인이 된다.
국가가 통치자 수호자 시민이라는 세 계급으로 구분되듯 영혼의 각 부분들에도 위계질서가 있다. 그 중 최고는 단연 이성이다. 이성은 영혼의 통치자고 격정은 수호자처럼 이성을 보조한다. 이성과 격정을 제대로 키우는 건 교육이다. 음악, 체육을 적절히 혼합하면 이성과 격정이 조화를 이룬다. 이성과 격정은 제 일을 교육 받은 후 욕구를 다스린다. 통치자와 수호자가 시민을 이끄는 것처럼 말이다. 통치자보다는 수호자가 많고, 수호자보다 시민이 많듯 욕구는 영혼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인간은 매 순간 욕구를 느끼고 끊임없이 충족한다. 성장할수록 욕구의 종류도 늘고 욕망도 커진다. 따라서 이성과 격정이 협심하여 욕구(명예나 자아존중감 같은 고상한 건 뺀 욕구)를 감시해야 한다. 말 두필과 마부로 예를 들자. 이성은 마부, 격정과 욕구는 말이다. 격정이라는 말은 혈통이 좋아 영리하고 욕구라는 말은 혈통이 나빠 멍청하다. 이성이라는 마부의 지시로 말이 달린다면 격정 말은 마부(이성)의 명령에 따라 앞만 보고 달리지만 욕구 말은 욕망에 따라 한눈을 팔며 달린다. 격정 말은 욕구 말이 옆길로 새지 않게 이끄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성에는 영혼 전체를 보는 눈이 있어서 전체를 위한 이익을 분별한다. 따라서 이성은 지식과 지혜의 근원이다. 격정은 이성의 지시를 따르며 늘 용감하기에 용기의 근원이다. 욕구 역시 이성이 지배해야한다는 데 동의하고 화목과 조화를 꾀하므로 절제의 덕을 갖는다. 인간 영혼의 질적 차이는 바로 이성 욕구 격정, 이 세 부분의 상호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이들이 조화롭게 이루어진 사람이 바로 올바른 사람이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국민이 저마다 정해진 자기 일에 열중하는 국가가 올바른 국가다. 그럼 이 올바름의 반대상황은 뭘까. 바로 세 부분의 혼란으로 인한 내분이다. 부분끼리 서로 참견하고 간섭함으로써 질서를 잃고 나쁜 상태로 떨어지는 것이다. 나쁜 국가와 영혼에는 총 네 가지 유형이 존재한다. 나쁜 것을 말하기 전에 우선 좋은 것부터 알아보자.
4. 가장 통치가 잘 되는 국가는 ‘친구들의 것은 공동의 것’이라는 속담이 최대한 실현되는 국가다. 그 세 단계를 파도에 비유해보자.
첫 번째 파도. 여성수호자의 역할과 교육. 국가를 경영함에 있어 여자만 할 수 있는 일과 남자만 할 수 있는 일은 따로 없다. 오히려 여러 성향이 양쪽 성에 비슷하게 흩어져 모든 일에 남녀가 관여해야 한다. 여자도 남자와 더불어 통치계급과 수호계급에 종사할 수 있다. 능력이나 성향 면에서 자질이 있는 자라면 누구든. 그렇게 선발된 사람은 남자와 마찬가지로 음악과 체육 교육을 받는다. 남녀수호자 모두 공동으로 국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두 번째 파도는 결혼 출산 양육에 관한 것이다. 일단 고정관념부터 버리자. 수호계급의 남녀는 식사 교육 양육을 모두 함께한다. 그들이 낳은 아이는 전체의 아이고 누가 자기 자식인지 누가 부모인지 알 수도 없다. 이 훌륭한 국가에서는 결혼 출산 육아에 ‘공’ 개념이 적용된다. 인간은 누구나, 심지어 어린아이나 동물 역시 이성과의 신체접촉을 원한다. 하물며 다 큰 성인 남녀는 말해 무엇하랴. 단 성인의 경우 성관계를 통해 임신과 출산이라는 중대한 결과를 낳는다. 출산률은 국가적 차원의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 우수한 유전자의 아이가 많이 태어나야 나라에 이득이다. 나아가 단순히 양 뿐 아니라 질도 신경써야 한다. 가장 뛰어난 남녀가 어울렸을 때 가장 뛰어난 자식이 태어난다. 최상급의 수호자를 만들기 위해 국가는 수호자들의 성관계에도 관여해야 한다. 최선의 남녀들끼리 이어주고 그들의 아이를 잘 양육하는 것이다. 반면 별 볼일 없는 남녀는 그들끼리 관계를 맺되 아이는 잘 양육할 필요가 없다. 이는 통치자 말고는 아무도 모르게 행해져야 한다. 또한 통치자는 축제와 행사를 통해 신랑신부의 인연을 맺게 하고, 질병과 전쟁 등을 고려해 인구수를 일정하게 유지해야 한다. 최상급의 수호계급이 나라를 운영할 때 가장 올바른 나라가 탄생한다. 남녀는 자유롭게 상대를 고를 수 없다. 국가 주도의 추첨을 통해서만 상대를 배정받는다. 이 추첨에서 끼리끼리 어울리도록 통치자들이 조작해야 한다. 전쟁 등의 분야에서 뛰어난 성과를 보인 이에게는 상을 주고, 이성과 어울릴 기회도 많이 줘야 한다. 그래야 뛰어난 사람에게서 많은 아이를 얻을 수 있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들은 부모 손을 떠나 보호관리구역으로 옮겨져 자란다. 변변치 못한 이들의 아이 역시 따로 분리한다. 이는 모두 순수혈통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사실 이렇게 되면 아이가 성장했을 때 성인과 소년,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모호해진다. 누가 자기 부모인지, 자식인지 모르니까. 이때는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아이들을 ‘자식들’, 그들의 부모들을 ‘부모님들’이라 부르면 된다. 자식도 많고 부모도 많은 넓은 의미의 가족인 것이다. 25세부터 50세 사이가 가장 건강한 시기이므로 인간은 이때만 자식을 만들어야 한다. 출산은 국가를 위한 봉사다.
세 번째 파도. 우선 국가구성에 있어 최선과 최악부터 살펴보자. 최선은 국가의 단결이고 최악은 국가의 분열이다. 국가의 생각을 모두가 따르는, 국가가 하나의 몸과 같아야 ‘최대 선’이라 할 수 있다. 그래야 구성원 서로를 남으로 여기지 않고 구분하지 않아 즐거움과 고통을 함께할 수 있다. 수호자들은 가족이 없기에 그것이 가능하고 그럼으로써 수호자들간 분쟁 없이 시민과 융화할 수 있다. 수호계급은 희생을 많이 하기 때문에 평범한 시민과는 차원이 다른 상과 명예를 지원받는다.
그렇다면 현실적으로 이런 나라가 가능할까. 이것이 바로 세 번째 파도다. 사실 이런 국가의 실현가능성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훌륭한 국가의 본보기를 만들었다는 자체에 의미를 두라. 현실의 국가가 지금까지의 논의에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그 방법을 발견해나가면 충분하다.
나쁜 것이 완전히 사라진 국가와 인류는 없다. 철인이 군주가 되거나 지배자들이 참된 지혜를 사랑하지 않는 한. 철인(철학자)이 통치하는 방법 외 어떤 방책으로도 좋은 국가를 만들 수 없다. 철학과 정치권력이 통치자 한 사람으로 결합되는 게 바로 최고의 국가를 만드는 방법이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사람들에게 철학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줘야 한다. 지혜를 사랑하고 배움을 끊임없이 추구하고 학문을 탐구하는 자가 바로 철학자다. 여기서의 지혜란 단순히 놀이, 기술 등이 아닌 ‘진리’를 일컫는다. 지혜를 사랑하는 자는 곧 진리를 좋아하는 자다. 구경이나 듣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것의 아름다움 자체가 아닌 빛깔 모양 소리를 즐길 뿐이다. 개개의 아름다움에 그치지 않고 아름다움 자체를 즐기는 사람이야말로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 즉 철학자다. ‘아름다움 자체’란 아름다움의 본질, 바로 아름다움의 ‘이데아’다. 이데아는 눈(감각기관)으로 볼 수 없다. 오로지 지성을 통해서만 인식된다. (치즈김밥, 참치김밥, 삼각김밥처럼 수많은 김밥이 존재하지만 ‘김밥’이라는 단어를 떠올렸을 때 갖는 김밥에 대한 하나의 인식이 있다는 말. 즉 누군가 ‘김밥’ 자체를 인식했다면 그는 김밥의 이데아를 지성으로 본 것이다. 삼각김밥을 보고 맛있겠다며 침을 흘리는 건 하나의 ‘의견’을 가졌을 뿐 김밥 자체의 인식에는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의견에 그치는 사람과 인식에 도달하는 사람은 차이가 있다. 후자는 존재의 참모습을 파악하는 사람이므로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 곧 철학자다. 반면 전자는 의견만 사랑한 나머지 지혜에 이르지 못하고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을 닮은’ 사람이 된다.
5. 통치자의 자질과 좋음의 이데아
지도자와 수호자는 날카로운 시각으로 법률과 풍속을 지킨다. 다른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난 현상만 볼 때 지도자와 수호자는 해결방법을 찾는다. 많은 것을 경험한 사람은 그런 능력을 지녔다. 그러니 그들이 수호자가 되어야 한다. 철학자는 현상을 뛰어넘어 존재의 본질, 참모습을 탐구해야 한다. 철학자는 거짓을 싫어하고 진리를 좋아하며 저속하지도 허풍치지도 비겁하지도 않다. 배움을 즐기고 고매하고 정중하고 기억력도 좋다. 하지만 사람들은 철학자를 쓸모없는 사람으로 여긴다. 이는 철학자의 잘못이 아니라 철학자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사회의 잘못이다. 철학을 배 조종에 비유해보자. 배에는 선장과 선원이 있다. 오만한 선원들은 아무나 배를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해 서로 키를 잡으려고 다툰다. 결국 싸움에서 이겨 키를 잡은 사람은 조종술을 익힌 사람이 아닌 힘세고 남의 환심을 산 사람이다. 오히려 진짜 조종술을 배운 사람은 쓸모없는 사람으로 여겨진다. 그런 배는 제대로 바다를 항해할 수 없다. 왜 조종술을 지닌 사람이 제대로 된 대접을 못 받을까. 사람들은 왜 조종술을 하찮은 것으로 여길까. 다시 말해 이 그리스 사람들은 왜 철학과 철학자를 무시할까. 그리스에서 철학자들은 일도 안하고 노닥거리는 게으름뱅이 취급을 받는다. 철학적 자질을 지닌 사람은 이런 현실 때문에 타락했다. 현실에 좌절하여 철학을 떠나고 나라에는 나쁜 환경, 나쁜 교육이 반복되는 악순환이 일어난다. 그러면 나쁜 자질을 갖춘 자들이 철학자 행세를 하고 나라는 나락으로 떨어진다.
국가는 오직 철학의 즐거움으로 사는 사람을 데려와 교육시키고 걸러내서 지도자로 앉혀야 한다. 우선 민첩, 당당, 조용, 안정적인 성격을 모두 갖춘 자를 데려와 애국심을 시험하고 학문을 공부시켜 ‘가장 최고의 학문’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인지 알아본다. 최고의 학문, 최고의 배움은 바로 ‘좋음의 이데아(참모습)’다. 문제는 우리가 이 이데아를 충분히 알지 못한다는 것. 이데아를 외면하면 다른 걸 아무리 잘 알아도 소용없다. 가장 중요한, 최고의 배움은 좋음의 이데아다. 이를 세 비유로 설명하겠다.
① 태양의 비유
좋음(선, 善)은 지식과 진리의 근원이자 최고의 이상이다. 우리는 눈으로 사물을 바라본다. 하지만 사물과 눈이 있어도 그 사물이 우리 눈에 들어오진 않는다. 컴컴한 방에서는 아무 것도 볼 수 없다. 빛이 있어야 한다. 즉 ‘보는 감각’과 ‘보이는 힘’은 빛으로 연결된다. 이 빛은 달에서도, 별에서도 얻을 수 있지만 태양에서 가장 크게 얻을 수 있다. 태양은 눈이 아니지만 시각을 제공한다. 태양이 보는 것을 가능케 하듯 좋은 이데아는 인식을 가능케 한다. 좋음의 이데아는 인식이나 진리보다 한결 훌륭하다. 인식과 진리는 좋음을 닮았을 뿐 좋음 자체가 아니다. 태양이 생명을 만들듯 좋음은 지식을 만든다. 좋음은 행복을 위해 이성이 추구해야 하는 최종목표다.
② 선분의 비유
세상은 앎의 대상, 앎의 단계에 따라 두 영역으로 나뉜다. 이 세계를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로 구분해보자. 눈에 보이는 세상은 다시 영상(그림자)과 그 영상이 닮아보이는 우리 주위의 생물, 사물로 나뉜다. 영상(그림자)에 있는 것들은 상상(짐작)으로 알 수 있고 생물과 사물은 신념과 믿음으로 알 수 있다. 다음으로 보이지 않는 세계, 즉 지성으로 아는 세계는 인식의 영역이다. 이 역시 도형, 숫자부분과 본질(이데아)부분으로 나뉜다. 도형과 숫자부분은 추론적 사고로 알 수 있고 이데아 부분은 직관과 사유로 알 수 있다. 눈에 보이는 세상과 지성으로 아는 세상 중 후자, 그 중에서도 직관과 비유로만 알 수 있는 ‘이데아의 영역’이 바로 ‘최고의 앎’이다.(사실 이거 이해 안됨. 더 공부하고 수정하겠음)
③ 동굴의 비유
이런 상황을 가정해보자. 어느 산속 동굴 입구에 모닥불이 피워져있다. 동굴 안에는 죄수들이 기둥에 손발이 묶인 채 동굴 안쪽을 보고 서있다. 죄수들과 모닥불 사이에는 허리 높이의 벽이 하나 있다. 몇몇 사람들이 인물 상(像)과 동물 상을 벽 위로 든 채 모닥불과 벽 사이를 지나다닌다. 어떤 이는 소리를 내기도, 어떤 이는 조용히 지나가기도 한다. 마치 인형극처럼 말이다. 참으로 기묘한 상황이다. 사실 우리는 기둥에 묶인 죄수들과 같은 처지다. 온몸이 기둥에 묶여 몸을 움직일 수 없기에 자기 맞은 편 동굴 벽에 비치는 그림자만 보는 것이다. 죄수들은 자기가 보는 것들(인물상이나 동물상의 그림자)을 실물로 착각한다. 누군가 토끼 모양 조각을 든 채 소리를 지르면 죄수들은 토끼 그림자가 그런 소리를 내는 줄 알 것이다. 여기서 만약 한 죄수가 풀려나 자유인이 됐다고 가정하자. 오랜 세월 동굴에서 지낸 그는 굴 밖으로 나와도 눈이 부셔서 횃불은 물론 토끼 조각상도 제대로 식별할 수 없다. 누군가 그에게 지금까지 본 토끼, 그림자 등이 모두 엉터리라는 사실을 알려주면 그는 매우 혼란스러울 것이다. 지금까지 믿어 온 모든 게 거짓일테니까. 그는 계속 사실을 부정하고 그림자를 진짜라 믿는다. 나아가 누군가 그를 동굴 밖으로 끌어내면 햇빛을 보는 순간 너무 눈이 부셔 고통을 겪고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볼 수 없을 것이다. 그에게 시간을 주고 기다려야 한다. 그림자->상->실물을 차례차례 느끼고, 별빛 달빛 하늘 등을 보며 눈을 빛에 적응시킨다. 그 다음에 비로소 해를 볼 수 있다. 동굴이나 다른 곳에 비치는 태양이 아닌 태양 자체의 모습. 그는 자연에 생명력을 가져다주고 계절, 세월, 보이는 모든 영역을 다스리며, 동굴의 죄수들이 본 ‘모든 것의 원인’이 바로 태양임을 깨닫는다. 태양은 모든 것의 근원이다. 그리고 자신의 이런 깨달음에 기뻐하는 한편 동굴에 남은 동료죄수들을 불쌍히 여긴다. 만약 그가 다시 동굴로 붙잡혀 들어간다면 눈은 다시 어두워진다. 어둠에 익숙해지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기에 동료 죄수들만큼 어둠 속에서 잘 볼 수도 없다. 그가 자신이 본 바깥세상과 진실을 동료들에게 얘기하면 미친놈 취급을 받을 게 뻔하다. 헛소리나 하고 눈까지 멀어온 그를 보면서 동료들은 풀려나겠다는 생각을 접는다. 오히려 이들은 자유를 얻어도 동굴 밖으로 나가기는커녕 반발하거나 자살하려 할지도 모른다.
여기서 동굴 감옥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세상을, 모닥불은 태양의 힘을 의미한다. 잠시나마 자유를 맛본 죄수는 ‘지성으로 알 수 있는 영역’에 올랐던 것이다. 태양은 인식의 영역에서 보이는 ‘좋음의 이데아’를 상징한다. 좋음의 이데아는 진리와 지성의 근원이다.(태양=좋음의 이데아=진리와 지성의 근원). 동굴 속 죄수들은 철학을 모르는 대부분의 사람을 상징한다. 그림자를 실재라 믿고 태양이라는 참된 이데아를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현실세계를 참된 이데아로 착각한다. 이처럼 철학은 사람들을 깨우치게 하고 참된 인식으로 인도한다. 통치자는 동굴 안의 현실세계가 아닌 동굴 밖 실재(實在)세계를 볼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즉 좋음의 이데아를 볼 줄 알아야 한다. 이 인식에 도달하려면 나라에서 직접 아이들을 가르쳐야 한다. 일단 예비교육 단계에서 수학 기하학 천문학 화성학을 가르친다. 이들은 철학을 위한 서곡으로, 감각의 세계에서 예지의 세계로 영혼을 인도한다. 가장 먼저 수학은 모든 것에 공통으로 적용되는 변치 않는 규칙이다. 현실에서 써먹기 위해 수학을 배우는 게 아니다. 수학을 배우는 과정에서 인간의 정신능력이 길러진다. 그래서 가장 먼저 배워야 하는 학문이다. 수학은 지성만을 사용해 실재로 향하는 학문이자, 우리 영혼을 진리와 빛으로 이끈다. 기하학 역시 사유를 전환시키고 좋음의 이데아를 볼 수 있게 한다. 천문학은 하늘 위 사물 운동을 통해 질서와 조화를 가르친다. 천체의 조화를 배운 후에는 청각을 통한 소리의 조화를 느껴야 한다. 그것이 화성학이다. 이런 예비 과정을 마친 후에는 다시 우수한 사람을 걸러 본격적으로 철학교육을 실시한다. 특히 변증법(변증술)을 집중교육한다. 변증법은 통치자 자격조건의 최종관문, 최종학문이다.
변증법의 원래 의미는 대화술, 문답법이다. 상대편 주장의 오류를 지적하고 그를 증명하면서 내 주장의 올바름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의지가 약하고 성숙하지 못한 젊은이들에게는 적합하지 않다. 따라서 30세가 된 사람들 중에서도 선발된 이들만 훈련받아야 한다. 변증법 교육은 5년이 걸린다. 이후에는 다시 15년 동안 시험, 전쟁 지휘, 관직을 겪는다. 이제 50세가 되어 임무를 잘 수행했는지, 학술 측면에서 우수한지 평가한다. 거기서 인정을 받으면 드디어 마지막 관문이 남았다. 좋음을 이데아를 보게 하고 이를 본보기 삼아 나라를 통치하는 것이다. 그들은 철학(변증법)을 주요과제로 국정을 살펴야 한다. 그렇게 나라를 통치한 후에는 자기와 같은 사람을 다시 양성해놓고 여생을 편히 보내면 된다. ‘행복의 섬’을 향해 떠나는 것이다. 국가는 이들의 기념비를 세우고 의식을 행하고 수호신으로 모신다. 위는 남녀 모두에게 해당하는 내용이다. 이런 제도와 국가를 실현하기는 매우 어렵지만 결코 불가능하지 않다.
이상국가를 빨리 이루기 위해서는 국가가 국민 교육 전체를 관리해야 한다. 10세 20세 30세, 세 단계로 나누어 통제, 지도하는 게 가장 좋다. 오늘날 아테네의 교육은 가정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유아에서 7세까지는 부모가, 7세부터 16세까지는 사교육이, 고등교육에서의 수사학, 철학 역시 비형식적인 방법으로 행해진다. 이제 더 이상 이런 사교육 제도는 안 된다. 완전한 공교육이 필요하다. 10살까지는 가정에서 놀이, 신화 공부를 시키지만 이후에는 부모에게서 격리되어 시골로 보내져 양육돼야 한다. 세파에 찌든 부모로부터 부정적인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함이다. 아이들은 각자 타고난 소질과 잠재력을 발휘해야 한다. 공부는 강제로 시켜봤자 머리에 남지도 않는다. 차라리 각자 성향에 맞게 교육하는 게 옳다. 20세가 되면 성인이 돼 할 일을 경험시키고 30세에는 위 교육 방식대로 선발과 교육을 시행한다. 통치자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이처럼 참된 자질을 지닌 자가 철인이 되고, 통치자가 되기 위해선 40년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
6. 타락한 국가와 타락한 혼
국가는 총 다섯 가지 정체(정치체제)로 나뉜다. 이 중 완벽한 국가는 철인정체 하나뿐이다. 나머지 넷-명예정체 과두정체 민주정체 참주정체-은 모두 결함이 있다. 먼저 명예정체는 스파르타식 국가다. 과두정체는 부자가 지배하는 국가, 민주정체는 과두정체에서 이어지는 정체, 참주정체는 오늘날 그리스 같은 독재정부다. 재밌게도 이와 똑같은 유형의 인간들이 있다. 이번 장에서는 국가체제, 그와 같은 인간을 함께 다루려 한다.
①명예정체: 명예정체는 철인정체의 몰락에서 시작한다. 세상에 영원한 것이 없듯 최선의 국가도 영원할 순 없다. 철인정체는 통치자와 보조자의 내분으로 멸망한다. 통치계급에서 ‘나쁜 시기’에 태어나는 아이들이 통치자가 되면 교육에 힘쓰지 않아 수호자 역할을 잘 하지 못한다. 그렇게 금 은 성향 사람들은 철인정체 쪽으로 구리 쇠 성향의 사람들은 재물을 추구하는 쪽으로 나뉘어 격렬히 다툰다. 싸움이 어느 정도 정리된 후에는 서로 땅과 집을 나눠 갖고 시민을 노예로 삼는다. 통치계급은 노예를 감시하고 전쟁에만 힘을 쏟게 되어 결국 국가는 무너진다.
명예정체는 철인정체와 과두정체의 중간단계이기 때문에 양쪽의 특성을 모두 갖는다. 통치자를 존중하고 공동생활을 한다는 점에서는 철인정체를, 전쟁을 좋아하고 격정적이며 재물을 숭배 낭비하고 인색하다는 점에서는 과두정체를 닮았다. 이들은 격정적이기 때문에 승리와 명예에 대한 사랑이 뚜렷하다. 노예에게는 가혹하지만 자유민들에게는 친절하고 통치자들에게는 순종적이다. 또한 통치를 좋아하고 명예를 사랑한다. 하지만 재물에 욕심을 갖기에 통치자로서는 부적합하다. 이 정치체제와 비슷한 인간은 다음과 같다. 예를 들어 완벽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아들이 있다고 보자. 만약 그가 나쁜 환경에서 자란다면 아버지로부터 받은 이성 뿐 아니라 주변 영향으로 욕구와 격정도 함께 지닌다. 천성이 훌륭해도 나쁜 이들과 어울리며 영혼을 격정에 넘기고 결국 명예를 중시하는 청년이 되는 것이다.
②과두정체: 재물을 가장 중시하는 나라다. 명예정체는 역설적으로 그들의 풍족함 탓에 무너진다. 국민들은 서로 경쟁하며 돈을 벌고 그럴수록 훌륭함은 줄어든다. 부자들은 귀한 대접을 받지만 훌륭한 사람은 멸시 당한다. 승리와 명예를 중시하던 명예정체가 돈과 돈벌이를 우선시하는 과두정체로 변하는 순간이다. 법을 만들 때도 재산이 기준이 되고 가난한 자는 관직에 참여할 수 없다. 항해술이 아닌 재산을 기준으로 선발된 선장이 이끄는 배는 바다를 제대로 항해할 수 없다.
국가에는 부자만 있는 게 아니다. 돈은 재투자를 가능케하여 더 큰 돈을 벌게 해준다. 반면 가난한 사람은 계속 가난해진다. 빈익빈 부익부다. 이렇게 되면 빈자와 부자는 서로 반목하고 갈등을 빚는다. 게다가 사회가 돈을 너무 중시한 나머지 거지, 사기꾼, 도둑 등의 질 나쁜 이들도 모습을 드러낸다. 모두 교육과 양육이 부족한 탓이다.
명예정체적인 부모 아래서 자란 자식은 처음엔 부모처럼 명예롭게 살 것이다. 하지만 부모가 억울한 처벌을 받고 처형, 추방당하거나 재산을 몰수당하면 잔뜩 겁을 먹는다. 자식은 가난과 두려움에 시달린 나머지 명예를 잊고 돈벌이에 열중한다. 이성과 격정이 욕구에 굴복하고, 명예가 아닌 재물을 좇는 나라와 인간이 탄생하는 것이다.
③민주정체: 나의 스승 소크라테스는 민주정체를 ‘나쁜 것으로 가득한, 화합하지 못하는 정체’라고 표현했다. 민주정체는 과두정체의 몰락으로 찾아온다. 과두정체 하에서는 모두가 재물을 좇고 재산을 낭비해도 국가가 상관하지 않는다. 오히려 시민의 재산을 담보로 돈놀이를 한다. 그럴수록 통치자는 부유해지고 높이 올라간다. 국가가 무절제를 막긴 커녕 부추기니 멀쩡한 사람도 가난해질 수밖에 없다. 빈자는 자기 것을 빼앗은 이를 증오하며 혁명을 기다린다. 돈벌이를 일삼는 사람은 빈자에게 관심도 없다. 통치자는 사치를 일삼는다. 나라에 내분이 생기는 건 당연한 수순. 그렇게 부자와 빈자는 서로 대결하는데, 부유한 사람보다 가난한 사람이 훨씬 많기에 빈자가 승리하게 된다. 그 후 빈자는 부자를 모두 내쫓고 시민들에게 관직을 평등하게 배정한다.
이렇게 탄생한 민주정체의 문제는 바로 ‘무제한의 자유’다. 자기 마음대로 행동할 자유가 있으니 별의 별 사람이 다 나타난다. 통치자의 자질을 가진 사람은 반드시 통치자 역할을 하지 않아도 된다. 강제나 규범이 없기에 피지배를 원치 않으면 통치 받지 않아도 된다. 전쟁에 반드시 참여할 필요도 없다. 통치자가 훌륭함이나 지혜를 갖추지 않았어도 대중에게만 잘 보이면 좋은 지도자로 평가받는다. 이런 나라는 무정부상태와 다를 바 없다. 결코 평등할 수 없는 이 세상, 그리고 사람들을 모두 평등하게 대하는 괴상한 나라다. 전술했듯 인간은 전혀 동등하지 않다. 각자 타고난 능력에 차이가 있다. 튀어난 자는 통치해야하고 멍청한 자는 지배받아야 한다. 민주정체에서는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 대중의 인기를 많이 얻은 사람이 지도자가 된다. 지도자를 선택할 객관적 지표도 없이 말이다. 행정에 문외한임에도, 심지어 특정 집단이나 특정지역 출신이라고 당선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자기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우매한 대중들에 의해 유죄판결 받고 독배를 받은 것도 민주주의 혐오에 한 몫)
다시 또 인간. 여기 교육 받지 못한 인색한 젊은이가 있다. 만약 누군가 그에게 자기 명령을 따르기만 하면 뭐든 주겠다고 제안하면? 그 어떤 쾌락이든 주겠다고 하면 어떨까. 아마 젊은이 내면에 자리 잡고 있던 과두적 특성이 자유와 민주를 향할 것이다. 이때 과두정체가 우세해지면 욕구들이 사라지면 질서를 되찾지만 금세 다른 욕구들이 자라나 영혼을 잠식할 것이다. 그를 점령한 욕구는 그를 자유방임과 방종으로 이끈다. 오만 무례를 교양으로, 무정부상태를 자유로, 낭비를 도량으로, 무치를 용기로 착각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변한 사람은 즉각의 욕구를 채우는 데 급급하다. 어느 날은 술은 진탕 먹고, 어느 날은 운동에 열중하고, 어느 날은 게으름 피우고, 어느 날은 갑자기 철학에 빠지고, 어느 날은 갑자기 정치하겠다고 뛰어들고, 전쟁이 재밌어 보이면 따라가고, 부자가 부러우면 돈벌이에 매달릴 것이다. 그의 삶에는 계획도 질서도 없다. 그러면서 스스로는 매우 행복하고 자유로운 인간이라며 흡족해할 것이다.
④참주정체: 위와 같이 민주정체는 자유에 대한 끝없는 갈망으로 무너진다. 국민은 통치자가 자유를 주지 않으면 마음대로 몰아내고 통치자에게 순종하는 사람을 자발적 노예라 비난한다. 독재자의 앞잡이다, 쓸개 빠진 놈이다 뭐다 하면서 말이다. 자유가 극에 달한 나라는 통치자나 피통치자나 별 구분이 없다. 극도의 자유는 가정과 동물에게까지 스며들어 나라 전체에 무질서를 가져온다. 자식이 부모를 어려워하지 않고 학생은 선생을 무시하며 젊은이는 노인에게 무례하다. 심지어 노예가 주인에게 당당히 자유를 요구하기도 하고 짐승들까지 인간에게 덤벼든다. 온 세상에 자유가 넘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그 어떤 법률도 지켜지지 않고 누군가에게 복종하지도 않는다. 이런 극단적 민주정체는 참주정체를 불러온다. 민주가 지나치면 또 다른 독재가 온다. 이 때 민주정체에는 크게 세 부류의 계급이 생긴다. 첫째, 강력하고 용감한 통치자. 이들은 사람들 앞에서 연설을 하고 국무를 돌본다. 그의 추종자들은 주변에서 열심히 맞장구친다. 통치자는 수벌처럼 다른 벌들을 거느린다. 두 번째 계급은 돈벌이에만 관심 갖는 부자들. 이들은 수벌에게 꿀을 제공한다. 세 번째 계급은 손수 일을 해 먹고사는 민중이다. 이들은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재산도 별로 없다. 하지만 숫자가 제일 많기에 강력한 힘을 지닌다.
민주정체에서 세 계급은 갈등, 분열한다. 먼저 수벌(통치자)들은 부자의 꿀을 미끼로 민중을 자기편으로 만들어 부자를 공격한다(통치자가 민중에게: 니들이 이렇게 가난하고 힘든 건 전부 저 부자들의 욕심 때문이다. 임금 올려달라고 파업해! 내가 밀어줄게!) 그러면 부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자기들끼리 똘똘 뭉친다. 그리하여 부자와 민중사이에 전쟁이 발발한다. 통치자들은 민중에게 부자의 재산을 나눠줄 것처럼 구슬려서 민중의 세력을 등에 업고 스스로 민중의 지도자를 자처한다. 마침내 사태가 악화돼 내란이 일어나면 슬슬 민중의 지도자가 아닌 참주(독재자)로 변모한다. 처음엔 만나는 사람마다 미소도 대하고 온갖 선정을 베풀며 빚도 탕감해주고 땅도 나눠주면서 착한 척한다. 하지만 나중엔 자기 지위 보전만을 궁리한다. 대표적인 방법은 외부와 전쟁을 일으켜 지도자의 필요성을 계속 각인시키는 것이다. 민중들의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스스로 영웅이 되기 위해서다. 또한 세금을 높여 민중이 생계에만 신경쓰게 만들어 반역은 생각도 못하게 만든다. 그러나 결국 억압된 민중의 미움을 살 수밖에 없다. 안위에 위협을 느낀 지도자는 호위대를 늘리고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민중을 착취한다. 이것이 바로 참주정체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과두정체적 인간으로 거슬러 올라가 다시한번 정리해보자. 민주정체적 인간은 돈벌이에만 신경 쓰는 과두정체적 부모 손에서 자랐다. 그는 사치스럽고 방자하다. 부모의 인색함에 대한 미움 탓이다. 그래도 자기를 타락시킨 주변 사람들보다는 낫다. 이제 이성과 욕구 사이를 줄타기 하다가 중간쯤에 자리 잡는다. 그리고는 돈에도 쾌락에도 빠지지 않는 민주적인 사람이 된다. 삶이 부자유스럽지도, 불법적이지도 않으니까. 그가 성인이 되어 자식을 가지면 그 자식은 부모와 같은 상황을 겪는다. 부모는 절제를 권하고 타인은 방종을 권한다. 아이는 무제한의 즐거움을 맛보고 꽃 향료 술 욕망으로 어우러진 방탕한 생활에 빠진다. 이런 참주정체적 인간은 욕구가 혼을 지배하므로 거의 미친 상태나 다름없다. 끊임없이 욕구를 채우기 위해 재산을 탕진한다. 나아가 부모 재산에 손을 대고 약탈이나 폭행도 불사한다. 그걸로도 모자라 남의 재산을 훔치거나 신전에 들어가 물건을 훔치고 살인을 저지른다. 그의 주변엔 아첨꾼이 가득하지만 원하는 걸 얻은 후에는 모두 곁을 떠난다. 결국 누구와도 친구가 되지 못한다. 참된 우정도, 자유도 없다. 믿을 수 없는 최악의 인간이다. 이런 사람들은 나이가 들수록 횡포가 심해진다. 오래도록 참주노릇을 한 사람이 가장 비참하지 않겠는가. 결론적으로 이상국가와 폭군의 국가는 극과극이다. 철학자가 통치하는 철인정체는 가장 행복한 국가지만 참주정체는 가장 비참한 국가다.
참주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졌기에 행복해보일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 매우 비참하다. 만약 어떤 신이 부자와 노예 50명을 사막 한복판에 떨어뜨리면 어떻게 될까. 아마 부자는 그 노예들로부터 몹쓸 짓을 당할까 두려워 노예들에게 아부하고 마음에도 없는 약속을 할 것이다. 여기에 신이 단죄자를 추가로 떨어뜨리면 부자의 상황은 더욱 악화된다. 이것이 바로 온갖 욕구와 공포로 가득한 참주의 실상이다. 감옥에 갇히는 것과 같다. 함부로 돌아다니지도 못하고 쉽사리 욕구를 채우지도 못하며 평생 공포에 떤다. 공공의 폭군은 자신도 지배하지 못하면서 타인을 지배한다. 병든 육신을 이끌고 격투하며 일생을 보내는 꼴이다. 그렇다고 물러나지도 못한다. 한마디로 총체적 난국.
7. 마음속의 이상국가.
이제 최종판결이다. 이야기의 맨 처음으로 돌아가자. 올바른 사람과 올바르지 못한 사람. 이 얘기 하다가 여기까지 왔다. 저 두 사람 중 누가 더 행복할까. 지금까지 이야기에 근거해 판정하면 된다. 가장 올바른 사람(최선자 정체적 인간)은 가장 행복하고 가장 올바르지 못한 사람(참주정체적 인간)은 가장 불행하다. 그 사이의 세 단계-명예 과두 민주-인간의 순서로 행복하다. (행복도: 최선자 정체적 인간>명예정체적 인간>과두정체적 인간>민주정체적 인간>참주정체적 인간)
인간에게는 누구나 영혼이 있다. 앞서 말한대로 영혼은 이성 격정 욕구로 나뉜다. 이성은 배움과 지혜를, 격정은 승리와 명예를, 욕구는 수많은 욕망을 사랑한다. 이 세 부분 중 어느 게 득세하느냐에 따라 지식의 애호자, 명예의 애호자, 돈의 애호자로 나뉜다. 세 사람 중 누가 제일 즐거울까. 아마 추구하는 가치에 따라 다를 것이다. 따라서 어떤 즐거움이 가장 좋고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지 판별하려면 기준이 있어야 한다. 그 기준은 경험, 식견(슬기), 추리(이성적 논의)다. 지식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 기준을 두루 섭렵할 수 있다. 명예와 돈의 애호자는 분별력이나 이성적 논의의 경험이 없다. 지적인 즐거움이야말로 단연 최고이며, 명예의 즐거움, 돈의 즐거움이 뒤를 따른다. 참주의 삶은 지적 즐거움에서 가장 멀다. 즉 의로운 자는 부정한 자보다 행복하다.
즐거움 자체에 대해 더 깊이 파보자. 배고픔과 목마름은 육체의 결핍이다. 이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음식과 물이 필요하다. 무지와 어리석음은 정신의 결핍이다. 이는 지식을 섭취해 충족된다. 육체보다는 정신을 채우는 것들이 보다 불변하고 순수하며 진리와 관련 깊다. 이익이나 승리를 추구해도 지식과 이성을 함께 좇는다면 진실한 쾌락을 얻는다. 마찬가지로 철학이 정신을 지배하면 각 부분이 조화를 이뤄 최상의 즐거움을 맛본다. 철인은 이런 삶에 가장 가깝다. 반면 참주는 가장 멀기에 가장 불행하다.
철인은 참주보다 무려 729배 행복하다. A(철인의 쾌락), B(과두정치적 쾌락), C(참주적 쾌락). A:B=1:3, B:C=1:3. A:B=B:C 따라서 A:C=1:9. A=9x9x99(CxCxC)=729. 즉 하나의 A(철인적 쾌락)는 729개의 C(참주적 쾌락)와 같다.
올바른 행동과 올바르지 못한 행동은 각각 어떤 힘을 가질까. 종이 위에 각각의 영혼을 그린다고 생각해보자. 이성 격정 욕구를 그림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이성은 사람 얼굴, 격정은 사자 얼굴, 욕구는 머리 여럿 달린 괴물이다. 그림들의 크기는 괴물 사자 사람 순이다. 욕구가 가장 크고 이성이 가장 작기 때문이다. 이 그림들을 하나로 묶고 인간 모습으로 테두리 씌운다. 인간 모습에 괴물형상, 사자형상, 사람형상이 엉켜있는 것이다.
내가 그린 그림들은 다음과 같다. 1번은 키마이라(키메라)로 사자 대가리에 염소 몸통, 용의 꼬리를 가졌고 입에서 불을 뿜는다. 2번은 스쿠르라. 여자 얼굴과 가슴을 가졌고 등에는 여러 뱀이 자란다. 3번은 케르베로스로 지옥문을 지키는 괴물 개다. 꼬리는 뱀, 목둘레에는 뱀대가리가 달려있다. 지옥 앞을 지키면서 산 사람은 못 들어오게, 죽은 사람은 못 나가게 한다.
올바르지 못한 행동이 이롭다고 하는 사람에게 그에 맞는 형상을 보여주자. 괴물과 사자는 잘 먹어서 강하지만 사람은 굶주려서 쇠약하다. 사람은 괴물과 사자에게 끌려다닌다. 괴물과 사자가 지들끼리 물어뜯으며 싸워도 사람은 통제할 수 없다. 반면 올바른 행동이 이롭다는 사람은 괴물을 길들여 협력자로 만들 것이다.
올바르지 못하고 무절제한 행동은 이익이 아니다. 범죄를 저지르고도 발각되지 않는다면, 처벌을 받지 않으면 세상은 더욱 사악해진다. 반면 벌을 받으면 세상의 야수적인 부분은 순화되고 유순한 부분은 자유로워진다. 나아가 인간 영혼 전체가 가장 훌륭한 본성을 갖고 절제와 지혜를 갖춘 올바름을 지닌다. 지각 있는 자는 올바른 정신을 실현할 학문을 귀하게 여긴다. 육체를 야수적, 비이성적 즐거움에 내맡기지 않고 재물을 소유할 때도 화합을 유지하여 나쁜 일에 말려들지 않는다. 자신을 향상시킬 명예만 받아들인다.
자, 사실 지금까지 얘기한 이런 인간과 국가는 현실에서 이루어지기 조금 어려워 보인다. 저런 위대한 사람은 정치가가 되지 않을 것이다. 마음속에 있는 왕국에서만 정치를 하겠지. 솔직히 말하면 이상국가는 지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그렇다. 이상국가는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토마스 모어는 이런 이상국가를 유토피아(Utopia)라고 했다. 그리스어로 ‘Ou(없음, 우)+Topes(장소, 토포스)’. 즉 이 세상에 없는 곳이라는 뜻). 이런 나라는 땅이 아닌 저 하늘에 있다. 이상국가를 원하는 사람 눈에는 그 국가가 보이고 그 안에서 살 수 있다. 그 국가가 실재하느냐, 앞으로 존재할 것이냐는 큰 문제가 아니다.
8. 시인추방론, 혼의 불멸성, 올바른 삶에 대한 보상.
수호자 그룹을 양육할 때 필요한 ‘몸과 혼을 위한 교육’을 각각 체육, 음악(문학)이라고 했다. 그러나 훌륭한 국가에는 본질적으로 음악보다는 철학 교육이 적합하다. 시와 그림 등 모든 예술활동은 모방에 불과하다. 이 세상은 실재인 이데아를 모방하여 만들어졌고 예술가는 다시 이 세상을 모방한다. 이데아보다 질 낮은 것을 만들어낼 뿐이다. 침대를 예로 들자. 침대의 이데아(실제, 참모습)는 최고단계다. 목수가 만든 침대는 2단계, 화가의 침대 그림은 3단계다. 따라서 침대 그림은 이데아보다 두 등급 낮다. 그렇다면 침대의 이데아는 누가 만들었을까. 바로 신이다. 신은 원형의 제작자다. 목수까지는 침대 제작자로 볼 수 있지만 화가나 시인은 모방자에 그친다. 호메로스의 시가 아무리 위대하다 한들 나라의 통치 법률 전쟁 기술에는 보탬이 안 된다. 모방자는 결코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 더구나 시인들은 정열을 불러일으켜 이성을 해치고 교묘한 솜씨로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한다. 청춘을 내세우지만 사실 별로 아름답지 않은 젊은이의 얼굴과 비슷하다. 그 얼굴은 꽃다운 시절이 지나면 본색이 드러난다. 시인들은 모조리 나라에서 추방해야 한다. 화가도 마찬가지다. 희극은 또 어떤가. 인간은 웃음을 즐기지만 체면 탓에 이성으로 애써 억제한다. 희극이나 만담으로 감정의 사슬이 풀리고 웃음이 고무되면 비극이 초래된다. 감정에 치우치면 이성을 잃는다는 말이다. 국가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건 오직 신과 훌륭한 인물을 찬미하는 노래뿐이다. 즐거움만 추구하는 시는 법과 이성을 대신해 왕 노릇을 할 것이다. 오늘날의 디오니소스 축제는 시민들을 단합시키고, 연극은 교육적 효과를 지닌다. 이를 통해 계몽된 시민들은 정치적 단결력을 발휘하고 통치자에게 복종이 아닌 비판을 드러낸다. 따라서 국가는 이를 엄격히 금해야 한다.
자, ‘올바름’을 찾기 위한 긴 여정은 이렇게 끝이 났다. 우리의 혼은 불멸이다. 인간은 죽어서도 보상받는다. 그것도 살아있을 때보다 훨씬 큰 보상을. 육체는 스스로 살아 움직이지 못하지만 영혼은 스스로 살아 움직인다. 육체에는 죽음이 있지만 영혼에는 시작도 끝도 없다. 영혼과 육체는 일시적으로 결합할 뿐 결국 분리된다.
좋음의 이데아에 이르는 영혼은 진리와 이데아의 세계인 천상에 도달한다. 즉 좋은 사람은 죽어서까지 올바름과 훌륭함에 대해 보상받는다. 마지막으로 이야기 하나를 하며 마무리 해볼까 한다.
에르의 신화
먼 옛날 ‘에르’라는 사내가 있었다. 그는 전쟁에서 용맹히 싸우다 전사했다. 그런데 며칠 뒤 시신을 화장하기 위해 쌓아둔 장작 위에서 에르는 되살아났다. 그는 사람들에게 자기가 12일 동안 저승에서 본 것들을 이야기 했다.
나는 다른 영혼들과 함께 여행하다가 신비한 장소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는 하늘 쪽으로 구멍이 두 개, 땅 쪽으로 두 개 뚫려있었고 구멍들 가운데는 영혼의 심판자들이 앉아있었지요. 심판을 받은 혼은 구멍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올바른 사람은 심판 내용 표지를 앞에 두르고 하늘의 오른쪽 구멍으로, 올바르지 못한 사람은 자기 행적이 적힌 표지를 등에 달고 땅의 왼쪽 구멍으로 들어갔어요. 동시에 하늘 왼쪽 구멍에서는 순수한 혼들이, 땅 오른쪽 구멍에서는 오물을 뒤집어쓴 혼들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오랜 여행을 한 것처럼 보엿어요. 나는 그들과 함께 초원으로 나가 야영을 했습니다. 우리는 서로 안부를 물으며 각자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지요. 땅 쪽에서 온 혼들은 천년의 슬픈 지하 여행기를 얘기했고 하늘 쪽에서 온 혼들은 행복했던 일과 아름다운 구경거리를 이야기 했습니다. 땅의 영혼은 사람으로 사는 동안 저지른 나쁜 일의 열배만큼 벌을 받았다고 합니다. 특히 땅의 오른쪽 구멍 아래에서는 다들 너무 힘든 벌을 받기 때문에 탈출하고 싶어 한다네요. 아, 가장 심한 벌을 받는 사람은 대부분 참주였다고 합니다.
초원에서의 야영 8일째, 다시 길을 떠난 우리는 3일 뒤 한 장소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서 모든 천체를 관통하는 빛의 기둥을 내려봤지요. 그 빛은 무지개와 비슷하면서도 더 밝고 아름다웠어요. 우리는 하루 뒤 그 빛에 도착했고 빛 중간 몇 개의 띠가 하늘에서 아래쪽까지 뻗어있는 것을 봤습니다. 그 띠의 끝에는 운명의 여신들의 어머니인 아낭케가 앉아있었고 빛의 띠는 아낭케의 방추에 하나로 묶여있었어요. 이 방추에는 8개의 돌림판이 연결되어 돌고 있었는데, 이들은 각각 항성 토성 목성 화성 수성 금성 태양 달이었습니다(빛 기둥, 방추, 돌림판은 모두 천체를 묘사한 것). 아낭케 여신의 무릎 위에는 방추가, 주변에는 세 운명의 여신이 앉아있었습니다. 세 여신은 각각 영혼의 과거(라케시스) 현재(클로토) 미래(아트로프스)를 노래했지요.
영혼들은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신관에게 불려갔습니다. 신관은 영혼들에게 제비뽑기를 시켰는데 이상하게 나는 제외되더라고요. 그러곤 삶의 표본들이 우리 앞에 놓여 있었는데 그 수와 종류가 매우 많았어요. 모든 동물과 인간의 삶이었기 때문이죠. 혼들이 뭘 뽑아야할지 몰라 당황하자 신관은 말했습니다. ‘마지막에 선택해도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다. 맨 처음 선택하는 사람도 방심하면 안 되고 나중에 선택하는 사람도 낙심할 필요 없다는 말이다’. 신관이 말을 마치자 첫 순서의 영혼이 바로 나가서 참주의 삶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지각이 없고 욕심이 많아 제비를 충분히 살피지 않았습니다. 자기에게 일어날 나쁜 일은 생각지도 않은 채 돈과 욕심에 눈이 먼 것이죠. 다음으로 다이몬이라는 사람이 제비를 뽑았습니다. 그는 전생에 질서 있는 나라에서 자라 평탄한 인생을 살았고 하늘에서 올 수 있었다고 합니다. 반면 땅쪽에서 온 사람들은 고생을 많이 해서 매우 신중하게 제비를 뽑았습니다. 이렇게 많은 영혼들에게 착한 생애와 나쁜 생애가 배당되었죠. 만약 어떤 이가 이승에서 건전한 철학을 했다면 이승 뿐 아니라 저승길에도, 다시 돌아올 때도 하늘 쪽의 부드러운 길을 밟을 거예요.
영혼들은 보통 전생 습관에 따라 다음 생을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반대도 많았죠. 트로이전쟁의 명장인 오디세우스의 영혼은 전쟁에서 갖은 고초를 겪은 탓인지 명예를 버리고 평범한 삶을 택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동물이 인간 생을 택하기도, 부정한 사람이 야수가 되기도, 얌전한 사람이 가죽을 택하기도 했습니다. 모든 혼은 선택을 마친 후 세 여신들에게 운명을 확인받았습니다. 그 후 우리는 다함께 그곳을 빠져나왔고 ‘레테(망각)의 들’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은 정말 숨 막힐 정도로 더웠습니다. 목이 말라 죽을 지경이었죠. 그래서 우리는 저녁이 되어 레테의 강 옆에서 야영을 했습니다. 이상하게도 그 강물은 어떤 그릇으로도 담을 수 없었습니다. 들판이 매우 더웠기 때문에 나를 제외한 영혼들은 모두 허겁지겁 많은 물을 마셨습니다. 그런데 그 강물을 일정량 이상 마시면 과거의 일을 모두 잊는 것 아니겠어요? 그렇게 제 주변의 영혼들은 과거를 완벽히 잊게 됐습니다.
모두가 잠든 밤이 되자 천둥과 지진이 세상을 뒤흔들었습니다. 물을 마시지 않은 나를 제외한 다른 영혼들은 누군가에 이끌려 이곳저곳으로 옮겨졌죠. 새벽에 눈을 뜬 나는 다시 원래 육체로 돌아왔어요. 어떻게 돌아왔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장작더미 위에 누워있는 날 발견했을 뿐
고대 그리스의 지혜가 총망라된 플라톤의 『국가』는 이렇게 불멸과 윤회를 말하며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어떤가요. 잘 읽으셨나요. 설득력이 있나요 그냥 개소린가요. 난 반반인 것 같습니다. 되게 비현실적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와 정말 이런 국가가 있으면 대박이겠다' 싶습니다. 칼포퍼는 플라톤의 역사주의를 통렬하게 비난했습니다. 플라톤을 어설프게 알았을 땐 포퍼에 동의했으나 국가를 쭉 훑고 나니 꼭 포퍼가 옳았다고는 얘기할 수 없겠어요.
지금은 술을 많이 먹어서 코멘트를 길게 못 남길 것 같습니다. 탈고 기념으로 한잔 하고 있거든요. 고생하셨습니다. 안녕.
아, 만약 이 글에 틀린 부분이 있다면 언제든, 누구든 지적해주세요. 나름 열심히 정리한다고 했는데 부족한 부분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지적 감사히 받아 더 분석하고 수정하겠습니다. ㅂ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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