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지분으로만 따지면 삼성전자도 외국기업
기업국적 규명 갈수록 무의미…어디서 고용창출 하는지가 중요
소유·지배구조를 기준으로 기업의 국적을 따져서는 안 된다. 기업이 어느 나라에서 실질적으로 영업하고 있으며 일자리를 창출하고 있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선 롯데의 사업 현황을 살펴보면 일본 기업으로 규정하기가 어렵다. 롯데는 80여개 계열사를 통해 9만5000명을 고용하고 있다. 가맹점 사업주와 협력사 직원까지 합치면 국내에서만 총 35만개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있다.
벌어들인 수익의 상당액은 한국에 재투자 한다. 롯데는 지난해 5조7000억원을 투자했고 올해는 연말까지 사상 최대인 7조5000억원을 투자할 계획이다. 일본 주주사들로 빠져나간 돈도 기업 규모에 비춰 많지 않다. 한국 롯데 계열사들이 지난해 일본 롯데 계열사에 지급한 배당금은 340억원으로 전체 배당(3000억원)의 11.3%, 영업이익(3조2000억원)의 1.1%다. 유통, 식품 등 내수산업 비중이 높지만 면세점, 호텔 등을 통해 외국인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효과도 크다. 롯데면세점은 지난해 매출의 60%인 2조4000억원을 외국인으로부터 벌어들였다.
롯데와 비슷한 예로 신한금융그룹이 있다. 총자산 기준 국내 금융권 2위인 신한금융의 대주주는 재일동포다. 하지만 신한금융이 일본금융회사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고용 창출하는 기업이 한국 기업”
학계에서도 소유구조만으로 기업의 국적을 규정할 수 없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미국 빌 클린턴 행정부에서 노동부 장관을 지낸 로버트 라이시 UC버클리 공공정책대학원 교수는 1990년 발표한 ‘누가 우리인가(Who is us?)’라는 논문에서 “미국에 주주가 있지만 해외에 공장이 있는 기업과 해외에 주주가 있지만 미국에 공장이 있는 기업 중 누가 우리인가”고 물었다. 그의 답은 “미국에 공장을 둔 기업”이었다.
이런 논리를 따르면 ‘한국에 일자리를 만드는 기업’이 한국 기업이다. 민경국 강원대 경제학과 명예교수는 “소유구조만 따지면 삼성전자 등 외국인 지분이 50%를 넘는 국내 주요 기업 대부분이 외국 기업이 될 것”이라며 “어디에서 사업을 하고 일자리를 창출하는지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대주주나 경영자의 국적 또는 정체성을 근거로 기업의 국적을 따질 수도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오정근 건국대 정보통신대학원 교수는 “국내 기업의 해외법인장 중 현지 언어를 못하는 사람이 많고 외국 기업의 한국지사장도 대부분 한국어를 못한다”며 “대주주나 경영자의 정체성은 중요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정경유착 아닌 자본 유치 사례”
롯데가 개발독재 시절 ‘정경유착’을 통해 특혜를 받았다는 논란도 있다. 이와 관련해선 롯데가 한국에 진출하던 때의 특수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 경제계의 시각이다. 신 총괄회장은 1948년 일본에 롯데제과를 설립해 사업하다 한·일 국교 정상화 후인 1967년 한국에 진출했다.
이 과정에서 신 총괄회장은 신격호라는 한국 이름으로 51%, 시게미쓰 다케오라는 일본 이름으로 49%를 투자했다. 당시 법률상 합작법인을 세울 때 외국인 지분율이 50%를 넘을 수 없어 불가피하게 51%의 지분을 한국 이름으로 등록했다는 것.
경제 성장을 위해 외자 유치에 목을 매던 정부가 신 총괄회장의 한국 진출을 돕기 위해 편법을 쓰도록 한 것이다. 신한은행을 설립할 때도 정부는 재일동포의 자금을 국내에 합법적으로 들여올 방법이 없어 외교 행낭에 돈을 넣어 가져오기까지 했다. 재계 관계자는 “롯데는 외국에서 활동하던 한국인 사업가가 국내에 역진출해 토착 기업으로 성공한 사례”라며 “한국 경제 성장에도 기여한 바가 크다”고 말했다.
자산 5조원 이상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의 세부 지배구조를 의무적으로 공개하도록 한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공정거래법)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반(反)시장적인 규제’로 평가된다. 사적 계약의 영역인 기업의 지배구조까지 낱낱이 파헤쳐 기업들에 재무적·심리적 부담을 지울 뿐만 아니라 해외 경쟁업체나 헤지펀드 등엔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국내 기업의 핵심 경영정보를 공짜로 제공한다는 지적도 있다.
새정치민주연합 신학용 의원실은 5일 “롯데 해외계열사 규제법안을 발의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자산 5조원 이상 상호출자규제기업집단에 새롭게 ‘해외계열사 간 상호출자 현황’ 공개 의무를 부여하고 해외계열사도 기업 현황을 공시하도록 하겠다는 내용이다. 현재 상호출자규제기업집단의 해외 계열사는 의무 공시 등 규제 대상이 아니다.
공정거래위원회도 롯데 해외 계열사에 대한 현황 파악에 나섰다. 공정위는 이날 보도자료를 통해 “롯데그룹에 해외계열사 주주 및 출자현황 자료를 요청했다”고 발표했다. 공정위는 광윤사, 롯데홀딩스, 12개 L투자회사, 기타 일본 롯데 계열사에 대한 주주정보, 기업현황 등 광범위한 정보를 요구했다.
공정위의 이 같은 움직임은 기존에 관련 법령을 해석하던 태도와는 정반대로 달라진 것이다. 당초 공정위는 롯데그룹 지배구조의 최정점에 있는 광윤사, 호텔롯데의 주요 주주인 L펀드들의 실제 투자자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 “공정거래법 시행령 17조 1항에 규정된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 소속회사’의 범위가 ‘국내 회사’에 한정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일본 회사들은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 소속회사가 아니기 때문에 정보 공개 의무가 없다는 얘기였다.
지난달 31일 기자를 만난 공정위 관계자는 “관련 법령에 따라 우리가 일본 회사들에 주주 정보를 요청할 권리가 없다”며 “또 이런 규제가 다른 나라에는 없는 규제이기 때문에 (요청을 해도) 먹히지가 않는다”고 토로했다.
하지만 공정위는 5일 이 같은 태도를 바꾸면서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의 지배구조 공개'를 다루고 있는 공정거래법 14조의 조항을 근거로 들었다. 외국의 소재지가 있는 해외 법인은 현행 공정거래법상 규제 대상이 아니지만 국내에 있는 대기업 집단 계열사 범위를 확정하는데 필요한 자료라면 해외 계열사 자료도 요청할 수 있다.
일본 회사들이 이에 응할지는 알 수 없지만 공정거래법의 ‘경제력 집중 억제’ 조항들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한국만의 규제다. 현행 공정거래법은 최대주주뿐만 아니라 혈족으로 구성된 특수관계인의 지분율 등 사업과 무관한 사적 계약까지 빠짐없이 공개하도록 하고 있다.
계열사 간 상호출자, 순환출자를 금지하고 이를 어길 시 과징금을 부과하는 조항도 있다. 일본은 한국과 경제, 산업 구조 등이 비슷하지만 ‘대기업집단의 금융회사 의결권 제한’을 제외하곤 한국처럼 대기업을 옥죄는 규제가 없다.
결국 “총수 일가의 일본회사 지분 내역을 공개하지 않은 일본 롯데가 이상한 것이 아니라 총수 일가의 지분을 낱낱이 밝혀야 하는 한국의 경영환경이 비정상”이라는 게 경제계의 시각이다.
경제계는 롯데그룹 사태를 빌미로 정치권 등이 대기업 총수들의 소수 지분을 통한 기업 지배를 문제 삼는 것에 대해 ‘반(反)시장주의적 발상’이라며 우려를 표시하고 있다. 총수들의 지분율이 낮아진 것은 외부 자금을 끌어들여 기업을 성장시키고 그룹 외연을 확장한 데 따른 당연한 결과물이라는 이유에서다. 정부 역시 경제성장의 과실을 국민과 나눠야 한다며 기업공개를 적극 유도해왔다는 점에서 총수들의 지분율 하락은 필연적이었다는 주장이다.
우리나라 대기업은 축적된 자본이 아닌 부채를 통한 성장전략을 취해왔다. 대기업들이 자기자본 없이 빚으로 크다 보니 기업 공개를 하고 자본시장에서 자본을 유치하면서 돈 없는 오너들이 유상증자에 참여하지 못해 지분이 줄게 된 것이다. 재계 관계자는 "쥐꼬리 지분은 빈약한 원시자본으로 기업을 키우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기업보국 하려는 기업인들의 우국충정의 결과"라고 했다. 고도성장기였던 1960년대부터 빚으로 기업을 키워 온 것. 사실 최 회장이 지금 감옥에 있는 것도 개인의 사리사욕이 아니라 낮은 지분 때문에 소버린의 경영권 공격을 받은 이후 경영방어를 위해 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범죄와 연루돼 그리 된 것이다. 승계 준비가 잘 돼 있다고 알려졌던 삼성도 최근 승계 과정에서 엘리엇의 공격을 당했을 정도로 우리나라 재벌의 지배구조는 허약하다.
◆기업 성장경로 이해 못하는 정치권
정치권은 여야를 막론하고 연일 롯데그룹 총수 일가의 낮은 지분율을 통한 그룹 지배를 공격하고 있다. 심재철 새누리당 의원은 5일 최고중진연석회의에서 “신격호 총괄회장 일가가 불과 2.4%의 지분으로 80여개 계열사를 지배하는 것은 순환출자 때문”이라며 “정부 당국은 꼬리가 몸통을 흔들 수 없도록 순환출자에 대해 분명한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성수 새정치민주연합 대변인도 “소수의 지분을 가진 오너 일가가 복잡한 지분구조를 이용해 우리 사회의 공적 자산을 좌지우지하는 현실에 국민의 실망과 배신감이 크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같은 주장은 기업 경영권과 지배력을 일치시켜야 한다는 잘못된 통념, 기업 성장과 소유구조 변화의 관계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게 많은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교수는 “기업 성장 과정에서 총수들이 점차 낮은 지분율로 기업을 지배하게 되는 것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라며 “미국은 한국에는 없는 차등의결권을 도입해 경영자들이 한국 총수 일가와 비교할 수 없는 강력한 의결권을 행사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미국 포드는 총수 일가 지분율이 1.9%에 불과하지만 차등의결권을 통해 40%의 의결권을 행사하고 있다. 역시 차등의결권을 도입한 뉴욕타임스는 0.6%의 지분을 보유한 슐츠버거재단이 의결권 100%를 갖고 있다.
전문가들은 대기업 순환출자 문제도 유연하게 바라봐야 한다고 주문하고 있다. 김종석 홍익대 경영학과 교수는 “순환출자 덕분에 기업인들이 적은 자본으로 더 많은 기업을 설립할 수 있고, 그 결과 더 많은 일자리가 생긴다”며 “때문에 순환출자를 규제하는 국가는 찾아보기 힘들고 대부분 국가는 상호출자도 허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줄기차게 지분율 하락 유도한 정부
경제계는 대기업 총수 일가의 지분율이 하락한 것은 정부 정책에 부응한 측면도 크다고 항변하고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에 따르면 국내 10대 그룹 총수의 그룹 전체 계열사에 대한 지분율은 1991년 5.0%에서 2012년 1.1%로 줄었다. 신석훈 전경련 기업정책팀장은 “대기업들은 1970~1990년대 정부의 기업공개·소유분산 정책에 부응해 내부 지분율을 지속해서 낮춰왔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대기업 총수들은 1975년 ‘기업의 이익을 국민과 공유하라’는 취지로 시행된 기업공개명령제도에 따라 액면가에 가까운 금액으로 상당량의 주식을 일반에 매각했다. 이 같은 정책은 1990년대 소유분산 정책, 1999년 부채비율 인하유도 정책 등으로 이어졌다.
롯데 사태를 빌미로 정치권이 철 지난 ‘재벌개혁’을 들고나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이 경제계의 시각이다. 가뜩이나 이명박 정부 시절부터 박근혜 정부 초기까지 3~4년간 입안된 경제민주화 정책으로 기업들에 대한 규제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상황이다.
300년이 넘는 기업 역사를 자랑하는 독일의 화학·의약회사 머크는 창업자 가문인 머크가(家)가 13대째 가족경영을 이어오고 있다. 상장된 지분 외 회사 지분은 150명에 이르는 일가가 나눠갖고 있다. 자손 중 한 명이 머크 가족위원회 수장으로 지주회사를 이끌고 전문경영인이 각 계열사를 경영한다. 머크 가문 일원이라도 다른 회사에서 경력을 쌓고 능력을 검증받아야만 고위직에 ‘지원’할 수 있다.
한국에서 롯데그룹 형제간 다툼처럼 소위 ‘왕자의 난’이 되풀이되는 이유는 가족경영 자체가 아니라 ‘가족경영 체제의 부재’가 문제라는 지적이 나온다. 세대를 거듭할수록 창업가문 구성원은 늘지만 승계에 명확한 기준이나 뚜렷한 원칙을 정해놓은 대기업들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통상 자의든 타의든 형제 대부분이 일단 경영에 참여한 뒤 계열분리로 기업을 쪼개는 것이 수순이다. 2, 3세들은 주로 외국에서 공부하다 젊은 나이에 임원으로 입사해 경영 능력을 검증받을 기회조차 갖지 못한다. 능력을 기반으로 한 가족 간 합의가 아니라 아버지의 결정으로 후계자가 정해지면 다른 편에서는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다. 권태신 한국경제연구원장은 “가족기업 내부 합의 과정은 물론 후계자의 경우 맞춤형 경영수업이나 다양한 경험을 통해 능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머크뿐 아니라 폭스바겐 BMW 등 자동차회사, 밀레와 같은 가전업체 등 자본집약적인 제조사들도 가족경영체제를 제대로 갖춘 기업으로 꼽힌다. 지난해 방한한 프랑크 스탄겐베르크 하버캄프 당시 머크 회장은 “머크의 장수 비결은 회사의 이익을 가문의 이익보다 먼저 생각하는 가치관이 뿌리를 내린 데 있다”며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회사의 지속적인 성장”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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