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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잔인한 휴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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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6.03.30 오전 1:36
최종수정 2016.03.30 오전 6:44




최민우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이세돌-알파고 대국을 중계하던 해설자는 이런 말을 빈번히 했다. “인간이라면 이렇게 두었을 텐데요, 알파고는 과연 어떨지 궁금합니다.” 3연패를 당하던 이세돌이 4국에서 이기자 인간계의 첫 승이라며 떠나갈 듯 환호했다. ‘인간이라면’이나 ‘인간계’라는 전제, 어쩐지 낯설지 않은가. 일찍이 이런 단서는 없었다. 기껏해야 충청도 출신의 총리(연고주의)나 대한민국 사상 첫 4강(국가주의)이 고작이었다. 조금 더 나아가도 아시아계 첫 유엔 사무총장이면 족했다. 지역·인종·종교 등의 영역을 넘어 인간 자체를 대표한다는 투의 말이 없었다. 왜? 인간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인간이 아닌 건 아무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알파고는 처음으로 인간을 스스로 대상화하게끔 만들었다.

오랜 세월 기고만장했던 인간이 어떻게 단박에 주제 파악을 하게 된 걸까. 우월한 존재가 나타나서다. 그건 인류가 여태 경험하지 못한 신세계였다. 인간보다 빠른 짐승도, 힘이 센 동물도, 번식력이 좋은 식물도 있었지만 머리가 좋은 생명체는 없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독선은 사실 두뇌에서 기원했다. 그런데 공상과학 영화에서나 상상했던 인간보다 뛰어난 지능과 학습능력을 가진 로봇이라니. 인간의 통제보단 오히려 인간을 지배할지 모른다는 공포가 현실적 시나리오로 다가왔다.

근데 냉정히 따져보자. 우리는 왜 인공지능 출현을 ‘지배-피지배’로만 해석할까. 인간이 지금껏 지구상 유일무이한 지배자였기에 수천 년 이어온 독점적 기득권을 혹시 잃을까 봐 본능적으로 두려워하는 건 아닐까.

알파고가 이겼음에도 패배를 인정하는 품격, 포기할 줄 모르는 투혼 등 ‘인간다움’만큼은 결코 인공지능이 따라 할 수 없다고들 했다. 실로 엄청난 자기 미화다. 딱 한 번 졌다고 이런 약자 코스프레라니. 과연 인간만큼 살벌한 종(種)이 지구상에 존재했을까. 지금도 인간은 도축하고 사육하고 가죽을 벗긴다. 땅을 뒤엎고 독성물질을 뿌리며 멀쩡한 산을 난도질한다. 생존이 아닌 편의를 위해서다. 구제역의 기미라도 보이면 수만, 수십만 마리의 가축을 눈도 깜짝하지 않고 살육하는 게 바로 인간이다. 인본주의란 어쩌면 끔찍한 인간이기주의였는지 모른다.

해서 알파고의 등장은 인공지능 위험성에 대한 묵시록이 아니다. 40억 년 전 지구 생명체가 출몰한 이후 고작 4만 년 전에 탄생한 현생 인류가 조화로운 행성을 파괴하며 저질렀던 해악을 되돌아볼 마지막 기회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은 2월 지구 표면온도가 섭씨 1.35도 높아졌다고 했다. 지구 생태계 위기는 이미 임계점에 이르렀다. 인간에게 지금 필요한 건 다른 생명체와 더불어 살아간다는 공동체 의식, 지구 구성 요소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겸허한 인정이다. 지금처럼 인간만을 위해 질주한다면 후대의 역사는 SF소설처럼 이렇게 기록할지 모른다. “폭압 아래 숨 죽였던 모든 생명체가 지구 역사상 가장 악랄한 종자였던 ‘인간류’를 물리칠 수 있는 결정적 계기를 2016년 마련했다. 그건 인공지능과의 연대였다.”

최민우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최민우 기자 minw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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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급 칼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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