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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2019-08-18 08:09:00 수정|2019-08-18 08:3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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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욱 미국 스탠퍼드대 아시아태평양 연구소장(사회학과 교수)은 역사사회학, 국제정치학에 정통한 재미 석학(碩學)이다. 신 교수는 한미동맹, 동북아 역사, 남북관계 등에 대한 정책 과제를 수행해 미국 워싱턴 정가에서도 지명도가 높다. 그는 2001년 스탠퍼드대 부임과 동시에 한국학 프로그램을 설립했고, 2005년부터 지금까지 동 대학의 아시아태평양 연구소장으로 있다. 그간 출간한 영문 저서는 20권이 넘는다. 신 교수가 현재의 한일 갈등을 새로운 시각에서 조명하는 글을 ‘신동아’에 보내왔다. [편집자 주]



전국공무원노동조합조합원들이 8월 7일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폐기 요구 및 아베 규탄행동 전면 확대 기자회견’에서 손팻말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스1]

한일관계가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 한일 간에는 주기적으로 긴장과 갈등이 있어왔지만, 이러다 자칫 되돌릴 수 없는 상황으로 번질까 걱정이다. 예상대로 일본은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할 것을 결의했다. 문재인 정부는 공개적으로 대일투쟁을 독려하고 있다. 아베 정부도 뒤로 물러설 조짐이 없다. 말 그대로 치킨게임 양상이다. 중국의 부상과 북핵·미사일 위협, 저출산 고령화 사회 진입 등 함께 고민하고 해결해야 할 전략적 공유지가 많은 두 나라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이렇게 싸우는지 정말 답답하고 안타깝다.

일본의 우파 국수주의나 한국의 좌파 국수주의가 정면 충돌하는 양상이다. 일본을 비판할 부분도 많다. 일본을 두둔하거나 양비론을 펼치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그러나 일본을 이기고 싶다면 더욱 냉정한 자세로 스스로를 돌아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현재 한일 갈등 국면을 보면서 몇 해 전 주한미군의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를 둘러싸고 벌어진 한중 간 갈등이 떠오른다. 당시에도 중국이 한국에 경제보복을 단행했다. 그때와 지금의 한국 내 반응과 대응은 대조된다. 사드 배치 역시 소파(SOFA·주한미군지위협정) 규정에 따라 이뤄졌다. 이에 중국은 자국의 안보를 위협한다고 반발했다. 한국 정부는 이를 무마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하지만 현재의 대일투쟁과 같은 광범위한 반중 민족주의 감정은 발생하지 않았다. 왜 그럴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이 현 상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중국의 헤게모니와 새 리더 일본

우선 중국의 경제보복이 일본의 경제보복 조치보다 한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더 크다는 주장이 있을 수 있다. 중국이 한국의 최대 무역국이고 대중 무역 덕에 한국이 흑자를 보고 있는 반면, 대일 무역수지는 늘 적자인 것은 맞다. 그러나 이번 일본의 경제 조치에서도 나타났듯 대일 무역이 반도체 등 한국의 첨단 산업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크다. 대차대조표를 따져보면 한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중국의 보복과 비교해 결코 작지 않다. 따라서 단순히 경제적 이유만으로 대중·대일 반응 간 차이를 설명하기 어렵다.

과거사 문제로 차이를 설명할 수도 있다. 일본의 식민 지배와 과거사에 대한 불충분한 사죄 및 배상을 지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곰곰이 역사를 따져보면 한반도를 침공한 전적은 일본보다 중국이 훨씬 더 많았다. 또 중국이 6·25전쟁 때 인민해방군을 보내 개입하지 않았다면 아마 한반도는 통일됐을 것이다. 300만 명이라는 엄청난 희생자도 내지 않았을 터다. 한국에 대한 일본의 과거사는 그토록 비판하는 한국인들이 왜 중국에는 같은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지 의아한 일이다.

이런 양상은 한국의 독특한 대중, 대일 심리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좀 단순하게 표현하면 근대 일본의 부상과 식민 지배기를 거치며 형성된 한국의 민족 감정에서 그 단초를 찾을 수 있다. 한국은 사대(事大)를 하면서까지 동북아 지역에서 중국의 헤게모니는 인정했다. 반면 근대 시기 지역의 새 리더로 부상한 일본은 인정하지 않으려는 의식이 한국에 존재했다. 한국이 자신보다 한수 밑이라고 여기던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그 감정은 더 격해졌다. 현실과 의식 사이의 괴리는 일종의 콤플렉스로 발전했다. 중국과 일본이 한국을 두고 같은 경제보복을 가해도 일본에 더욱 반발하는 데에는 이런 심리 요인이 자리하고 있다.

식민 지배기에 형성된 반일 감정은 한민족의 순수 혈통을 강조하는 배타적 민족주의로 발전했고 분단 시대를 거치며 더욱 공고해졌다. 반일은 남북한 모두에 전가의 보도와 같았다. 분단 시대 민족주의의 과잉 역시 마찬가지였다.

역사적으로 민족주의는 우파의 이데올로기였다. 좌파는 민족주의를 부르주아의 산물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한반도에서 민족주의는 남·북한, 좌·우파 모두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현재 한국에서 불고 있는 국수주의적 반일 감정만 해도 좌파가 선도하고 있다. 오히려 우파는 친일파·매국노라는 프레임에 갇힐까 봐 전전긍긍하며 마지못해 대일 투쟁에 동참하고 있다.

현재 한일 갈등의 구조와 본질을 꿰뚫기 위해서는 한국 민족주의의 특성을 파악해야 한다. 특히 그 역사적 기원과 형성 과정 그리고 정치적 역할에 대한 이해가 필수다.

한국의 민족주의 계보와 성격



문재인 대통령이 6월 28일 일본 인텍스 오사카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 공식 환영식에서 의장국인 일본 아베 신조 총리와 인사한 뒤 이동하고 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한국 민족주의의 기원과 계보를 두고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단, 그것이 근대의 산물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학계 안에서 큰 이견이 없다. 19세기 말 이후 서구 열강과 일본이 한반도로 밀고 들어왔다. 위기에 처한 구한말 지식인들은 대응책으로 민족주의를 수용했다. 우리가 사용하는 ‘민족’이라는 개념은 일본에서 차용한 것이다. 이는 독일의 ‘kulture nation’을 번역한 개념이다. 즉 한국 민족주의의 계보는 독일-일본-한국으로 이어진다.

이 점에서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식민 지배는 군사·정치·경제를 넘어 의식과 담론에 대한 지배이기도 했다. 식민의 피지배자가 저항 수단으로 되레 식민 지배자들의 담론과 논리를 이용하는 것은 세계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한국의 민족주의는 혈통을 강조하는 종족적(ethnic) 성격을 띠게 됐다. 민족주의가 한국에 처음 소개되던 19세기 말에는 일각에서 영미의 시민적·정치적 개념이 논의되기도 했다. 결국 독일과 일본의 문화적·종족적 민족 개념이 한반도에 지배적으로 자리 잡게 됐다. 이는 1930년대 일제가 추구한 동화주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또 좌파 사회주의·공산주의의 등장과도 연결돼 있다.

일제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일본인과 조선인의 조상이 같다는 일제의 식민사관)을 통해 동화주의를 추구했다. 이에 맞서 한편에서는 반대 논리로 한국인만의 순수하고 독특한 혈통을 강조했다. 동시에 보편적 개념으로서의 계급을 강조하는 좌파 사회주의에 대응해 민족이라는 특수성이 부각됐다. 대표적인 것이 1933년 발표된 이광수의 ‘조선민족론’이다. 그는 민족을 변하지 않는 존재 즉 ‘영원한 실재’로 보았다. 이는 당시 독일, 이탈리아 등 유럽을 휩쓸던 파시즘과 유사한 성격을 지녔다.

미국의 역사·정치 사회학자인 리아 그린펠드(Liah Greenfeld)의 민족주의론이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그린펠드에 따르면 독일의 민족주의는 시민적·정치적 공동체를 강조한 영국, 프랑스의 민족주의와 달리 혈통과 문화를 강조했다. 색다른 형태의 독일 민족주의가 자리 잡게 되는 데는 ‘리센티망(Ressentiment)’ 이라는 심리적 요소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조건이 있다. 첫째는 현실적인 불평등, 둘째는 그 불평등에서 기인한 부러움과 증오라는 혼재된 감정이다. 특히 그 대상이 자신보다 못하다고 여길 때 이런 심리적인 상태가 나타난다. 일찍이 산업혁명을 이룬 영국이나 정치혁명을 이룩한 프랑스에 비해 후발주자였던 독일은 부러움과 증오가 혼재된 심리적 상태에서 혈통과 문화를 강조하는 독특한 민족의식을 발전시켰다. 또 다른 후발주자인 일본 그리고 한국이 영미식이 아닌 독일식 민족 개념을 수용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대국’과 ‘왜놈’ 사이

‘리센티망’ 개념은 현재의 한일 갈등을 이해하는 데 많은 시사점을 준다. 영국과 프랑스에 대해 독일이 가졌던 심리와 마찬가지로 한국인들은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일본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중국은 대국으로 인정한 반면, 일본은 ‘왜구’ 또는 ‘왜놈’으로 폄하했다. 사대의 대상은 중국이었지 일본이었다는 기록은 없다. 하지만 한국인들이 한 수 아래라고 여겼던 일본이 메이지유신으로 근대화를 이룬 후 한국을 식민지화해버렸다. 한국으로선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이었음이 당연하다. 더구나 일본은 ‘내선일체론’ ‘황국신민화’ 등으로 한국의 역사와 의식마저 바꾸려 했다. 일본에 맞서기 위해 단군의 자손과 혈통임을 강조하는 단일민족주의만큼 효과적인 방법은 없었을 것이다.

식민 지배가 끝났지만 한국인들의 ‘대일 리센티망’은 소멸하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일본과의 화해와 도움이 절실했지만 한국인들은 이를 심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1965년 한일협정을 ‘굴욕외교’로 판단한 이유다. 한국의 발전 모델을 제공한 것도 일본이었다. 지금도 일본은 경제 규모가 세계 3위에 이르는 국가다. 한국보다 한 수 위인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아직도 정서적으로 이런 현실을 받아들이기 매우 어려워한다. 따라서 일본에 대해 부러움과 증오가 혼재된 감정이 뒤범벅돼 있다. 반일 감정은 정치적·감성적 휘발성이 매우 강하다.

과거사 문제만 해도 그렇다. 일차적으론 일본의 태도에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과거사를 대하는 일본의 독특한 심리 또한 중요한 분석 대상이다). 다만 일본이 아무리 사과해도 한국이 이를 진정성 있게 받아들이긴 어려울 것이다. 한국인 대부분은 일본이 사과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과했다는 사실 자체도 진정성이 없다는 이유로 부정하고 싶은 것이 한국인들의 솔직한 심정이다. 한국의 국력이 일본을 앞서는 날이 올 때까지는 그럴 것이다.

반면 한국이 일본에 대해 갖고 있는 ‘리센티망’이 중국에 대해선 발동하지 않는다. 심정적으론 중국이 대국임을 인정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경제 등) 한국이 아직 앞서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 아닐까. 한국 내에 반중 정서가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반일 감정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현재의 한일 갈등이 봉합되더라도 한국인의 의식 속에 깊이 박혀 있는 ‘리센티망’이 사라지지 않는 한 반일 감정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을 것이다.

좌파 민족주의

보편성을 강조하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와 달리 민족주의는 특수성을 강조한다. 따라서 원칙적으로 좌파와 민족주의는 양립할 수 없다. 공산주의 이론에서 민족주의는 부르주아의 이데올로기로 폄하됐고, 점차 소멸하리라 간주됐다. 하지만 민족주의가 반제·반식민지의 이념으로 호소력을 갖자 좌파에서도 이를 무시하기 어렵게 됐다. 1920년대에 공산주의 국제기구인 코민테른에서 식민지 사회에서의 민족문제에 대한 논쟁이 일어난 배경이었다.

아시아의 공산주의는 민족주의를 좌파에 본격 결합했다. 중국의 마오쩌둥은 민족주의의 대중 호소력을 일찍이 간파했다. 베트남의 호찌민, 북한의 김일성도 계급의식보다 민족 감정에 호소했다. 유럽 등 서구에서 일어난 급진적 민족주의 즉 파시즘이나 나치즘이 우파적 운동이었다면, 아시아의 민족주의는 좌파적 성격을 강하게 띠었다.

우파건 좌파건 민족주의가 급진적 성격을 보였을 때 그 결과는 처참했다. 유럽의 급진적 우파 민족주의는 인종주의와 결합해 유대인 학살 등 인종청소(ethnic cleansing)라는 비극을 낳았다. 아시아의 급진적 좌파 민족주의는 고립과 빈곤을 초래했다. 독일은 패전 후 급진적 민족주의의 광풍에서 벗어난 뒤에야 번영을 이뤘다. 중국과 베트남도 급진적 민족주의의 늪에서 빠져나온 후에야 빈곤에서 탈출했다. ‘김씨 왕조’를 구축하고 ‘우리민족 제일주의’를 고집하는 북한은 아직도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말이다.

민족주의가 ‘좋으냐 나쁘냐’ 하는 논쟁이 있지만 사실 민족주의 자체는 중립적이다. 민족주의는 다른 이데올로기와 쉽게 결합할 수 있을 만큼 유연하다. 고로 민족주의가 어떤 이데올로기 및 정치체제와 결합하느냐에 따라 순기능을 발휘할 수도 반대로 역기능을 초래할 수도 있다. 반제·반식민주의의 이념적 기반이 될 수도 있고, 후발 국가의 근대화를 촉진하는 심리적 동력을 제공할 수도 있다. 한국에서도 민족주의는 반일 식민주의운동과 ‘조국근대화’의 이념 기반을 제공했다.

반면 제국주의나 파시즘 등 독재국가의 이념적 토대로 자리매김할 수도 있다. 남북한 공히 독재체제를 구축하고 공고화하는 데 민족주의를 적극 활용했다. 박정희와 김일성은 상반된 체제를 만들었다. 정작 두 체제는 민족주의에 터를 잡은 권위주의였다는 점에선 공통점이 많다. 지금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자국 우선주의, 반(反)이민 정서도 민족주의를 국수주의나 포퓰리즘과 적당히 섞은 형태로 나아가고 있다.

다니엘 벨의 ‘이데올로기의 종언’이나 프란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 등은 한결같이 민족주의의 종말을 예측했다. 결과는 반대로 나타났다. 민족주의는 21세기에도 카멜레온처럼 다양한 형태로 변신하며 전 지구적으로 기승을 부리고 있다. 한편으로는 신자유주의에 기반한 세계화와 이로 인한 불평등의 심화가, 또 한편으로는 소수자·이민자 권익의 증진이 민족주의가 국수주의 및 포퓰리즘과 결합할 토양으로 작용했다.

특히 전자는 좌파에, 후자는 우파에 국수주의의 자양분을 제공했다. 좌파 포퓰리즘이 판을 치는 남미 국가들은 경제 파탄을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 탓으로 돌리며 국민 정서를 자극하고 있다. 우파 국수주의가 득세하는 유럽이나 미국의 경우 소수자와 이민자를 희생양으로 삼고 있다. 과거 급진주의적 민족주의가 확산된 것처럼 작금의 좌·우파 국수주의 모두 민족주의의 역기능인 셈이다. 후쿠야마 자신도 최근에는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의 부활을 인정하면서 그 폐해를 걱정할 정도다.

유럽형 국수주의 vs 남미형 국수주의

한국과 일본에서 나타나고 있는 국수주의적 민족주의도 이러한 세계사적 흐름과 무관치 않다. 아베 정부의 일본이 유럽형 우파 국수주의 성격에 가깝다면, 문재인 정부의 한국은 남미형 좌파 국수주의와 유사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대일 문제에 있어 ‘이순신 장군의 배 12척’ ‘국채 보상 운동’ ‘일본 제품 보이콧’ 등을 거론하며 반일 정서를 부추기는 행태는 민족주의적 혹은 국수주의적 포퓰리즘의 전형이다. 이를 통해 경제 난국과 그간 대일관계를 방치한 책임을 그릇된 애국주의로 일거에 대치해버리는 효과를 가져왔다.

지금은 모두 일본의 경제보복 조치에 개탄만 하고 있을 뿐 사태의 근본 원인에 대한 성찰이나 반성은 없다. 문재인 정부 역시 사태 해결을 위한 전략을 마련하기보다는 ‘의병, 죽창’을 호소하는 시대착오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일 간 경제 분쟁의 단초를 제공한 것은 지난해 10월 대법원의 징용배상 판결이었다. 일본은 그동안 1965년 체결된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강제 징용 피해에 대해 개인에게 배상할 의무가 없다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대법원은 이 협정이 정치적인 해석이며 개인의 청구권에 적용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강제 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 대해 1인당 1억 원씩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이에 반발한 일본이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할 수 있다고 경고하면서 한일관계는 급속히 냉각됐고 결국 현실이 됐다.

국내법과 국제조약(1965년 한일협정) 간의 괴리가 있었고, 국민 정서와 외교 논리가 강하게 부딪쳤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외교적 해법을 모색하기보다는 사법부의 영역이라며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러다 일본이 경제 수단으로 공격해 오자 국민감정에 호소하는 대응 전략을 택했다. ‘친일 대(對) 반일’ ‘애국 대 매국’이라는 이분법 프레임으로 외교 실책의 책임을 비켜가며 대일 투쟁을 극대화했다. 반일 감정만큼 효과적 무기는 없기 때문이다.

진리의 독점을 거부하는 사회



최재성 더불어민주당 일본경제침략대책특위 위원장(가운데)이 8월 5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이 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예상대로 대통령과 집권당의 지지율은 치솟았다. 이를 간파한 집권당의 싱크탱크는 한일 갈등이 내년 총선에서 유리하다는 보고서까지 작성했다. 국수주의적 포퓰리즘은 정치적으로 일시적인 도움은 될지언정 한일관계를 푸는 데 아무런 실익이 없다. 국민을 편 가르기한 후유증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 피해는 나라와 국민이 고스란히 떠안을 테니 말이다. 좌든 우든 국수주의적 포퓰리즘이 성공한 사례는 없다. 광복 후 남한의 민족주의가 주로 우파에 의해 활용됐다면 지금은 좌파의 무기로 사용되고 있다.

역사철학자 카를 포퍼는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우파 민족주의와 좌파 마르크시즘을 열린사회의 주적이라고 역설했다. 포퍼에 의하면 열린사회란 비판을 수용하고 진리의 독점을 거부하는 사회다. 여기서는 누구도 독단적 권리를 행사하지 못한다. 비판받지 않아도 되는 절대적 진리란 용인되지 않는다. 아무도 심판자일 수 없다. 과연 이 시점에서 한국이 열린사회로 가는 여정을 막는 주적은 무엇일까? 반일 감정으로 온 나라가 휩싸인 지금 이 질문에 대한 고민과 성찰 없이 한국이 열린사회로 나아갈 수는 없다.

식민 지배와 분단은 한반도에 ‘민족주의 과잉과 자유주의 빈곤’ 현상을 빚어냈다. 남·북한, 좌·우파 공히 자유주의보다 민족주의에 과도하게 의존했다. 반일은 늘 효과적인 정치 무기였다. 반일 독립운동을 한 이승만은 그렇다 치더라도 민주화 이후 김영삼, 노무현, 이명박 정부 등 집권 세력은 좌우를 가리지 않고 지지율이 떨어지는 임기 후반기에 여지없이 반일 감정을 활용했다. 문재인 정부도 예외가 아니다. 반일 감정에 힘입어 지지율은 오히려 급등했다.

포퍼가 지금의 한국 사회를 본다면 어떤 심정일까? 아마 자신이 분류한 열린사회의 적에 대한 유형을 재고해야 할지 모른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열린사회의 적은 우파 파시즘도 좌파 마르크시즘도 아닌 좌파 국수주의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민주화를 위해 권위주의와 싸웠던 현 집권층, 특히 과거 운동권 세력이 한국이 열린사회로 가는 데 걸림돌이 되고 있는 건 아닌지 곰곰이 생각해볼 문제다. 고위공직자가 나서서 한국 사회를 ‘친일과 반일’ ‘애국과 매국’으로 편 가르기하는 것은 아무리 정치적인 행위라 치더라도 부끄럽기 짝이 없는 모습이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달성하고 G20 국가임을 자부하는 한국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임진왜란·식민지배 43년 빼곤 한일관계 양호

지금 필요한 것은 국민 정서를 자극하는 포퓰리스트적 민족주의가 아니다. 이성적 토론이 가능한 합리적 자유주의다. 자유주의에서 개인은 그 자체의 존엄을 가진 독립적 존재다.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고 책임져야 하는 개체다. 하지만 민족주의는 집단주의다. 개인은 그 자체로서 별 의미가 없고, 오직 민족이라는 집단의 일원으로서만 사고하고 행동해야 한다. 민족주의가 전체주의로 흐를 위험성이 여기에 있다. 친일파, 매국노 담론은 민족이냐 반민족이냐라는 단순한 선택을 강요한다. 개인의 자율성은 사라지고 집단의 논리만이 강요되는 이것이 바로 포퍼가 말한 열린사회의 적이다.

항변할지 모른다. 지금은 대일 투쟁의 전열을 가다듬어야 할 때이므로 개인의 선호도는 잠시 제쳐두고 함께 뭉쳐야 한다고.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파시즘이든 볼셰비즘이든 집단의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는 결국 파멸한다는 것이 역사의 엄중한 교훈이다.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들은 아베 정부의 우파 국수주의를 비판한다. 군국주의 파시즘으로 패망한 역사적 경험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기 때문일 터다. 한국에도 열린사회의 적과 싸울 수 있는 양식 있는 지식인들의 용기와 행동이 필요하다. 지금이 과거와 같은 정치적 권위주의 시대는 아니지만 이분법적 편 가르기와 자기검열(self-censorship)이 엿보이는 모습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양심적인 지식인’이 한국보다 일본에 많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일본을 이기려면 열린사회의 적과 맞서는 지식인이 일본보다 더 많이 나와야 한다.

혈통을 강조하는 종족적 민족주의는 이미 역사적 소임을 다 했다. 같은 피를 나눈 공동체의 일원으로서가 아닌, 정치적·시민적 가치를 공유하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민족 개념을 재정립할 때다. 그래야만 보다 민주적인 통일을 준비할 수 있다. 외국인 결혼이주 여성, 조선족, 탈북민 등을 혈통에 관계없이 존중해야 열린사회가 될 수 있다.

대일 콤플렉스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아직 일본이 한국보다 전체적인 국력에서 앞서 있긴 하지만 위축되거나 질시할 필요는 없다. 한국은 국제무대에서 일본과 떳떳하게 경쟁할 만한 여력을 갖춰가고 있다. 식민지배라는 뼈아픈 경험을 잊어선 안 되지만 앞으로 나아가는 데 발목을 잡게 해서도 안 된다. 역설적이게도 극일(克日)을 하려면 반일을 넘어서야 한다.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이 떠오른다. 김대중 정부는 1) 임진왜란 7년, 식민지 지배 36년을 제외하곤 한일관계가 비교적 양호했다는 역사 인식하에 2) 시장경제, 자유민주주의, 미국과의 동맹 등 양국이 공유하는 보편적 가치를 강조하며 3) 실질적인 국익을 위한 대일정책의 성격과 영역을 규정했다. 1998년에 이루어진 이 선언은 한국이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와 전임 김영삼 정부의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으로 경제난과 한일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을 시기에 이뤄졌다. 국수주의 감정을 자극하는 포퓰리즘 대신 현실적 실용주의를 택한 것이다.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을 계승하겠다는 문재인 정부가 대일관계에서는 김-오부치 정신을 이어갈 수 없는 것일까.

전 지구적 광풍과 대한민국

현재의 한일 갈등은 시간이 지나면 어떤 형태로든 봉합될 것이다. 감정이 폭발한 후 일정한 냉각기를 거치면 다시 현실로 돌아올 것이다. 하지만 민족주의의 과잉화를 막고 합리적 자유주의를 고양하지 않고는 언제 또다시 터질지 모를 활화산과 같다. 한국이 열린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지식인의 역할이 중요하다. 전 지구적으로 불고 있는 포퓰리즘과 국수주의의 광풍에서 대한민국을 지켜야 한다.



신기욱
● 1961년 출생
●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미국 워싱턴대 사회학석·박사
● 미국 아이오와대,UCLA 교수
● 現 미국 스탠퍼드대사회학과 교수 및 아시아태평양 연구소장
● 저서 : ‘슈퍼피셜 코리아:화려한 한국의 빈곤한 풍경’‘한국 민족주의의 계보와정치’ ‘하나의 동맹, 두 개의렌즈’ 등

신기욱 미국 스탠퍼드대 아시아태평양 연구소장(사회학과 교수) gwshin@stanford.edu


[이 기사는 신동아 9월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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