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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Strok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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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진보와 개혁을 위해 싸워라. 부당함과 부패를 결코 묵인하지 말라. 항상 모든 당파의 선동가들과 싸워라. 결코 어떤 당파에도 소속되지 말라. 항상 특권 계층과 공공재산의 약탈에 항거하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연민이 없어서는 안된다. 항상 대중의 복지에 헌신하라. 단순히 뉴스를 인쇄하는 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항상 철저하게 독립적이어야 한다. 약탈적인 금권에 의한 것이건 약탈적인 빈곤에 의한 것이건, 무엇이든 잘못된 일을 공격하는 걸 결코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조지프 퓰리처

 

조지프 퓰리처는 ‘퓰리처상’을 만든 미국의 신문인이다. 헝가리 출신으로 세인트루이스에서 <포스트 디스패치>사로 시작하여 언론사 경영에 성공하였다. 이후 뉴욕으로 가 <뉴욕 월드>를 매수, 센세이셔널한 뉴스의 보도와 캠페인 등으로 미국을 대표하는 신문사로 성장시켰다. 그는 상업성과 정론언론의 사이를 넘나드는 신문사 경영으로 현대 저널리즘의 전형을 만들었다. 사후 그의 유언에 따라 1917년 ‘퓰리처상’이 제정되었다.

 

 

퓰리처라는 이름이 가진 두 가지 이미지 

매년 4월이면 올해의 퓰리처상 수상자 발표에 세계의 이목이 주목된다. 비록 미국 내 언론 및 문화인들에게 주어지는 상이지만, 퓰리처상은 미국을 넘어 세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보도ㆍ문학ㆍ음악상으로 인정받고 있기 때문이다. 퓰리처상은 컬럼비아 대학의 퓰리처상 위원회가 저널리즘 14개 부문, 문학 6개 부문, 그리고 음악 1개 부문에서 그 해 가장 탁월한 업적을 이룬 인물을 추천받아 수여한다. 수상자에게는 1만 달러의 상금이 지급되기도 하는데, 퓰리처상은 상금의 액수를 떠나 관련 업계 종사자들에게는 평생의 꿈이자 목표이며, 수상자들에게는 엄청난 영예와 권위가 주어진다.

 

‘언론계의 노벨상’이라고도 불리는 퓰리처상을 만든 사람은 20세기 초 미국 언론을 주도했던 조지프 퓰리처(Joseph Pulitzer, 1847~1911)이다. 퓰리처상도 그의 이름을 따 만들어진 것이다. 세계 문화ㆍ언론인들의 꿈이랄 수 있는 상의 이름인 퓰리처, 그러나 그 이름에는 또 다른 이미지가 하나 더 따라 다닌다.

 


그것은 그가 미국 언론을 주도했던 20세기 초, 과열된 신문사 간의 경쟁 속에서 만들어진 선정적 신문보도를 일컫는 용어, ‘황색언론(yellow journalism)’이란 말이다. 황색언론은 퓰리처가 발행하던 <뉴욕월드>에 게재된 만화의 주인공 노란 아이(the yellow kid)에서 나온 말로, 독자의 시선을 끌기 위해 선정주의에 호소하는 신문의 경향을 말한다. 인간의 불건전한 감정을 자극하는 범죄ㆍ괴기사건ㆍ성적추문 등을 과다하게 취재ㆍ보도하는 경향인데, 20세기 초 조지프 퓰리처와 그의 경쟁자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William Randolph Hearst)에 의해 주도되었다.

 

문화와 언론에 있어서 가장 영예로운 상인 퓰리처상을 만든 사람이면서 그와 정반대로 언론의 가장 추하고 음습한 모습을 일컫는 황색언론의 대명사로도 알려진 조지프 퓰리처가 가진 두 가지 이미지는 실제 오늘날 언론이 가진 두 가지 속성, 공공성과 상업주의를 둘 다 아우르려는 이율배반적 성격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헝가리에서 온 가난한 이민자 청년, 언론에 발을 들이다


조지프 퓰리처는 헝가리의 유대계 부유한 곡물상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각 과목마다 가정교사를 들일 정도로 아들의 교육에 열성이었다. 그 결과 퓰리처는 헝가리어뿐만 아니라 독일어, 프랑스어에 능통하고 상당히 높은 수준의 교양을 쌓을 수 있었다. 그러나 유복한 집안 환경은 아버지의 이른 죽음과 파산으로 파탄이 났다. 17세 무렵 퓰리처는 돈벌이를 위해 군대에 들어가려 했으나 병약해보이는 몸과 나쁜 눈은 그마저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결국 퓰리처는 17세의 나이에 유럽대륙을 떠나 머나먼 미지의 땅 미국으로 흘러 들었다. 뉴욕에 처음 도착한 퓰리처에게 미국은 녹록한 곳이 아니었다. 그는 비록 3개 국어를 할 수 있는 교양인이었지만, 영어에 능통하지 않았기에 그가 가진 지식과 재능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퓰리처는 남북 전쟁 말기 용병으로 북군에 들어가 잠시 군인이 되기도 했지만, 전쟁이 끝난 후에는 그저 영어를 못하는 하층계급 이민자에 지나지 않았다. 이후 퓰리처는 짐꾼, 웨이터, 노새몰이꾼까지 먹고 살기 위해 무슨 일이든 닥치는 대로 했으며 때로는 노숙자 신세가 되기도 하였다.

 

뉴욕에 뿌리 내리지 못한 퓰리처는 당시 많은 이민자들이 흘러들던 세인트루이스로 갔고 그곳에서 직장을 얻으려 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영어는 서툴렀고 그 때문에 그는 루이지애나 사탕수수 농장에 일자리를 구해주겠다는 사기꾼을 만나 수수료로 그동안 모은 돈 마저 사기를 당해 날리게 되었다.

 

사기꾼을 잡고 더 이상 다른 피해자가 나오지 않게 하겠다는 일념으로 퓰리처는 세인트루이스의 독일이민자들을 위해 독일어로 발행되던 신문 <웨스틀리체 포스트>에 억울한 사연을 독자투고했다. 독일어에 능통했던 그의 문장력은 뛰어났고 이야기는 실감이 났다. <웨스틀리체 포스트>의 편집자는 퓰리처의 글을 보고 그가 ‘세익스피어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영어에만 능통하지 못할 뿐 충분한 교양을 갖춘 퓰리처를 전격적으로 기자로 등용했다. 앞날이 불투명했던 가난한 헝가리 출신 이민자 청년은 이렇게 언론에 발을 들이게 되고 이후, 미국뿐 아니라 현대 저널리즘의 기준을 만든 신문왕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성공의 탄탄대로

퓰리처는 기자가 된지 10여년 만에 세인트루이스에서 <포스트 디스패치>사를 창간하였고 언론사 경영에 성공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뉴욕에 진출한 그는 <뉴욕월드>를 매수하여 미국을 대표하는 신문사로 성장시켰다.

 


자신이 가진 실력에 맞는 일자리를 구하자 퓰리처의 앞날은 그야말로 탄탄대로였다. 영어를 잘 못해 괜찮은 일자리를 얻지 못한 채 전전하던 시절에도 퓰리처는 도서관을 드나들며 공부했고 사회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았기에 제대로 된 일자리를 얻자 특종을 터뜨리며 민완 기자로 거듭났다.

 

더불어 안정된 일자리와 고정적 수입은 그가 먹고살기 위해 노동판으로 내몰려 많은 시간을 허비하지 않게 했기에 영어도 빨리 늘었다. 그사이 그는 기자 일을 병행하면서 도서관에서 독학으로 변호사가 되기 위한 공부를 했고, 마침내 변호사 자격증도 획득했다. 그러나, 그의 외국인 같은 영어 발음과 다소 기괴한 외모 때문인지 법률 의뢰인은 그다지 모여들지 않았다. 결국, 퓰리처는 변호사 일보다 기자 일에 몰두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그것이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일이 되었다. 그는 하루에 16시간씩 지독히 일해 동료들로부터 ‘독일놈(joey the German)’ 혹은 ‘유태인놈(joey the Jew)’이라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고 한다.

 

퓰리처는 정치에도 관심을 가졌다. 젊은 시절에는 잠시 공화당 당원이 되어 선거를 통해 주 대표가 되기도 하였지만, 이후 공화당 내부의 부패와 여러 가지 문제에 환멸을 느끼고 민주당으로 당을 바꾸었고, 이후로 평생 민주당 당원으로 살았다.

 

기자로서 또 정치인으로서 승승장구하게 된 퓰리처는 <웨스틀리체 포스트>의 주식을 사들였다가 되파는 등 경제에 대한 감각도 탁월해 빠른 시일 내에 재산을 불려 갔다.

퓰리처는 기자가 된지 10여년 만에 <세인트루이스 디스패치>를 사들이고 곧이어 <세인트루이스 포스트>를 사들인 후, 두 신문사를 합병해 <포스트 디스패치>로 창간하였다. 데일리로 발간되던 이 신문은 퓰리처 자신의 성공 스토리와 재미있는 기사로 인해 많은 인기를 끌었고 퓰리처는 이를 바탕으로 뉴욕으로 진출했다.

 

 

황색언론의 대명사, 혹은 진실을 추구하는 정론언론의 수호자


퓰리처는 매년 4만 달러 이상의 적자를 내던 <뉴욕월드>를 금융업자 제이 굴드로부터 35만 달러에 사들였다. 그리고 세인트루이스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신문의 성격을 바꾸어갔다. 그는 ‘재미없는 신문은 죄악’이라고 말하며 판매 부수를 늘리기 위해 신문에 사람들이 흥미로워할 이야기나 선정적인 내용, 스캔들을 대서특필했다. 이는 정부의 새로운 정책이나 사람들의 소식을 전하는 것으로만 생각되던 신문의 고정관념을 완전히 깨는 것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퓰리처는 그동안 다른 신문들이 점잔을 떠느라 게재하지 않았던 스포츠 관련 뉴스와 여성들의 흥미를 일으킬 만한 기사들을 싣고, 여성기자를 뽑았으며, 신문에 만화와 삽화를 넣었다. 또한 딱딱한 뉴스가 아니라 사람들이 즐길 만한 꺼리를 싣는 일요판을 따로 발행하는 등, 신문에 오락성과 상업성을 불어넣었다. 이는 현대 신문저널리즘의 새로운 장을 연 것으로, 퓰리처의 이러한 시도는 이후 오늘날까지 신문 구성과 기획에 새로운 기준을 세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퓰리처의 새로운 시도는 적중했다. 인수당시 발행부수가 1만부에 불과했던 <뉴욕월드>는 단숨에 미국에서 최고의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신문으로 뛰어올랐다. 사람들은 이전에 보지 못했던 신문에 열광했고  <뉴욕월드>는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그러나 퓰리처의 성공은 주변의 시샘을 샀고 경쟁자를 만들었다. 영화 <시민 케인(Citizen Kane)>의 모델이 되기도 하는 등 평소 기괴한 캐릭터로 알려져있던 언론 재벌 2세 월리엄 랜돌프 허스트가 서부로부터 동부로 진출해 <뉴욕저널>을 발행하면서 퓰리처의 <뉴욕월드>의 스타일을 고스란히 모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로 인해 두 신문사 간에는 서로 더 강하고 자극적이며 보다 놀라운 기사를 먼저 싣기 위한 경쟁이 불붙기 시작했다. 이 경쟁은 감정적인 부분에까지 치닫게 되는데, 그 한 예가 ‘황색언론(yellow journalism)’이란 말의 유래가 된 만화캐릭터 ‘노란아이(the yellow kid)’를 둘러싼 두 신문사 간의 과도한 스카우트 경쟁이었다.

 

‘황색언론’이라는 용어의 유래가 된 만화캐릭터 ‘노란 아이(the yellow kid)’는 작가 아웃콜트가 풍자적으로 표현한 만화의 인기 캐릭터였다.

퓰리처의 <뉴욕월드>와 허스트의 <뉴욕저널>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던 ‘노란 아이’는 결국 <뉴욕저널>의 지면에 실리게 된다.

 

 

원래 노란 아이는 퓰리처의 <뉴욕월드> 일요판에 싣기 시작한 만화의 캐릭터였다. 작가 아웃콜트(Richard Felton Outcault)는 <호건앨리(Hogan's Alley)>라는 만화에서 ‘노란 아이’를 등장시켜 당시 뉴욕 서민들의 삶을 적절한 은어 등을 사용하여 재미있고 풍자적으로 표현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런데 이 작가와 그의 작품을 <뉴욕저널>이 고액을 주고 스카우트해 감으로써 과열된 스카우트 경쟁이 시작된 것이었다. 퓰리처의 <뉴욕월드>는 작가에게 더 많은 금액을 제시해 그를 다시 스카우트했다. 그러나 두 신문사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던 작가는 결국 <뉴욕저널>로 작품을 옮겨가기로 결정했다.

 

재밌는 일이 일어난 것은 그 다음이었다. 퓰리처는 ‘노란 아이’ 캐릭터를 이미 특허신청 해놓았다면서 다른 작가를 기용해 <뉴욕월드>에 ‘노란 아이’를 그대로 등장시켰다. 경쟁적인 두 신문에서 같은 만화캐릭터가 동시에 사용된 것이다. 사람들은 이를 보고 ‘노란 아이’의 노란색을 따서 두 신문사 간의 과도한 기사 경쟁과 그 선정적 내용을 싸잡아 ‘황색언론(yellow journalism)’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두 신문사에서 화려하게 펼쳐진 황색언론은 국제 정세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당시 쿠바의 독립을 둘러싸고 미국은 쿠바의 독립운동 세력을 지원하고 있었고, 이로 인해 쿠바를 식민지로 두고 있던 스페인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다. 이런 국제적 불화의 기미에 기름을 끼얹고 불을 지핀 것이 퓰리처와 허스트였다. 이 두 사람이 경영하는 신문사 <뉴욕월드>와 <뉴욕저널>은 상대 신문사에 비해 자사의 신문발행부수를 늘리기 위해 선정적이고 충격적이며 과장된 기사를 경쟁적으로 싣고 있었는데, 이 당시 주요한 소재로 이용된 것이 스페인이 쿠바 사람들을 얼마나 잔혹하게 압제하는가였다. 나날이 강도를 더해가는 잔혹한 표현에 쿠바문제나 국제 정세에 관심이 없던 일반 미국 국민들도 쿠바를 하루 빨리 악마 같은 스페인의 손아귀에서 구해내어야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미 정부가 쿠바를 위해 스페인과 싸워야 한다는 순진한 생각을 품기에 이르렀다. 그 이면에는 미국 자본가들의 이권과 여러 복잡한 국제 문제들이 도사리고 있었지만, 선정적 신문의 과도한 보도는 미국 국민들이 정부에 전쟁을 요구하는 단계로까지 진행되었고 결국 미국과 스페인 사이에 전쟁이 터지고 말았다. 이 미국-스페인 전쟁은 결과적으로는 미국에 유리하게 작용하여 미국은 쿠바에 대한 영향력뿐만 아니라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필리핀을 차지할 수 있었고, 동남아에 그 세력을 넓혀 본격적인 제국주의 경쟁에 뛰어들게 되었다.

 

한편, 비록 황색 언론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썼지만, 퓰리처의 무한 폭로주의는 그 어떤 권력이나 부에도 영향받지 않고 사실을 폭로하는 언론의 독립성이라는 힘을 키우게 하였다. 그는 그 어떤 경우에도 언론은 독립적이어야 하며, 어떤 외압에도 굴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당시 대통령이던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1858~1919)와 한판 대결을 벌이기도 하였다.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퓰리처는 초기에는 루스벨트가 퓰리처의 언론관을 극찬할 정도로 사이가 괜찮았다. 그러나 루스벨트가 칭찬한 퓰리처의 언론관에는 자신을 칭찬한 사람이기 때문에, 혹은 권력가여서, 혹은 명망가여서, 혹은 인격자로 알려져서, 밝혀서는 안 되는 뉴스거리란 없었다. 그런 사람이면 사람일수록 그들의 부정을 까발리고 스캔들을 캐야 한다는 것이 퓰리처의 생각이었다.

 

당시 파나마 운하의 부설권을 프랑스로부터 양도 받아 일을 진행시키는 과정에서 공직자의 뇌물수수 사건과 독직(瀆職: 부정행위)사건이 일어났다. 어렵게 성사된 파나마 운하 사업이었던 만큼 대통령 루스벨트는 이를 조용히 덮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를 가만두고 볼 퓰리처가 아니었다. <뉴욕월드>는 이를 연일 대서특필했고, 루스벨트는 보도를 막고 겁을 주기 위해 명예훼손으로 퓰리처를 고소했다. 대법원 까지 올라간 대통령과 신문사 사장 사이의 법정 다툼은 법원이 언론의 자유에 힘을 실어줌으로써 퓰리처의 승리, 나아가 국민에게 ‘알려야 할 것은 알려야 한다’는 언론의 존재이유를 확보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그는 정치인이나 기업가, 종교인 등 사회적으로 책임있는 사람들의 잘못을 폭로하는 일에 기자들을 독려했다. 그는 스탠더드 석유회사와 벨 전화회사의 독점내막을 공개하고 부패한 보험회사의 실태를 까발려 문을 닫게 만들었으며, 뉴욕 시의원의 뇌물 사건, 스캔들 등을 폭로했다.

 


1904년 <뉴욕월드>에 실린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풍자 만화. 대통령과 신문사 사장 사이의 법정 다툼은 결국 법원이 언론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퓰리처의 승리로 매듭지어졌다.

물론 자극적 폭로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출신이 그러하기도 한 탓에 외국인 이주민들에관심을 가졌으며, 공동주택에 사는 사회 하층민들을 위한 개혁운동을 신문에서 주도하기도 하였다. 이 외에 퓰리처는 당시 독립 100주년 기념으로 프랑스로부터 선물 받았으나 뉴욕 시의 재정난으로 세우지 못했던 자유의 여신상을 시민의 힘으로 세우자는 운동을 신문을 통해 펼쳐 기금을 모집, 마침내 리버티 섬에 자유의 여신상을 세우게 했다. 그 공로로 퓰리처의 이름이 자유의 여신상 발가락에 새겨져 있다.

 

 

퓰리처상의 제정

퓰리처 상의 앞뒷면. 퓰리처상은 조지프 퓰리처의 유언에 따라 1917년부터 매년 저널리즘 및 문학계에서 업적이 우수한 사람을 선정하여 시상하고 있다.

 

 

왕성한 활동을 펼치며 20세기 초 신문 산업을 주도했던 조지프 퓰리처는 젊은 날의 과도한 업무와 신문사 간 과열된 경쟁으로 인한 스트레스 등으로 건강이 악화되었다. 그의 눈은 거의 실명 상태가 되었으며, 두통과 신경증에 시달렸다. 은퇴할 즈음 퓰리처는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황색언론의 대명사가 된 일을 무척 후회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만든 언론의 역기능에 대한 속죄의 의미로 제대로 된 언론인을 양성하기 위한 고등교육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꼈고, 이를 콜롬비아 대학에 의뢰했다. 그리고 역시 콜롬비아 대학에 기금을 맡겨 한 해 동안 가장 훌륭한 기사를 쓴 저널리스트에게 주는 상을 제정하도록 하였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저널리즘 분야에서 가장 권위있는 상, 퓰리처상이다.

 

사실 20세기 초만 하여도 학문적으로 저널리즘을 따로 배운다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고 여겨졌다. 당시로서는 신문이라는 것 자체가 새로운 매체였기 때문에 인문ㆍ사회 분야의 학식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퓰리처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앞으로 저널리즘이 세상에 기여할 부분에 대해서 확실히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20세기는 신문뿐만 아니라 방송을 아우르며 저널리즘이 만개했던 시기였다.

 

퓰리처의 혜안으로 인해 콜롬비아 대학에 언론 대학원이 설치되었고, 1917년부터는 퓰리처상을 통해  매년 그해의 뛰어난 저널리스트들에게 영광의 상을 수여하고 있다.


조지프 퓰리처는 1911년 자신이 가장 좋아했던 장소인 요트 위에서 숨을 거두었다. 20세기 초 현대 대중 언론의 기준을 세운 신문왕 퓰리처의 삶과 업적이 남긴 영향은 20세기를 넘어 21세기까지도 여전히 유효하다.

 

 

 

 김정미 / 시나리오 작가, 역사 저술가
글쓴이 김정미씨는 대학원에서 역사를 전공, 역사적 사건과 인물에 관심이 많다. 역사 속 인물들의 면면에서 영화적 캐릭터를 발견하고 시나리오를 옮기는 작업을 하는 한편 역사관련 글쓰기도 병행하고 있다. [역사를 이끈 아름다운 여인들], [천추태후-잔혹하고 은밀한 왕실 불륜사], [어린이 역사 인물사전] 등의 책을 썼다.


발행일  
2012.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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