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감한 대통령, 나약한 군대
지뢰 폭발은 연평도 포격 이후 5년 만에 다시 터진 북한의 군사 도발이다. 그사이 5~6차례 사이버 테러가 있었지만 무력 공격은 처음이다. 이번 사태는 심각한 것이다. 김정은의 첫 도발이고, 천안함 기습을 반복했으며, 3단계 보복 타격이라는 남한의 의지를 시험하기 때문이다.
지난 10여 년간 이 나라의 지도자들은 무고한 젊은이들을 적의 공격에 바쳤다. 2002년 연평해전 떄 김대중 정궈은 병사들에게 '먼저 쏘지 말라'고 했다. 적이 국경선을 넘어와 포를 겨누어도 쏘지 말라는 것이었다. 2010년 천안함이 당했다. 기습 자체야 막기 힘들었지만 보복은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못했다. 어뢰를 건지고도 못했다. 8개월 후 적은 다시 도발했다. 이번엔 섬마을이 불탔다. 그런데도 이명박 대통령과 군 지휘부는 제대로 응징하지 못했다. 1000억원짜리 F-15를 띄워놓고도 못했다. 철모 끈이 불에 타도 해병은 용감히 싸었다.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대통령은 지하벙커에서 한없이 나약했다.
이 나라에서는 지도자와 지휘관은 살고 병사들만 죽었다. 그런 부끄러운 역사가 있다면 후임 정권은 각오가 각별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박근혜 정권도 다를 게 없다. 대통령은 군 통수권자다. 자신의 젊은 부하 2명이 적의 공격에 다리를 잃었다. 그런 위중한 상황이라면 대통령이 국민 앞에 나서야 하낟. 상황을 설명하고 대책을 말해야 하낟. 그런데 이틀 동안 대통령은 없다. TV에도 신문에도 없다. 청와대 대변인 발표가 고작이다. 대통령은 8일 국가안전보장회의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여성이어서 군대를 모르므로 공부를 위해서도 주재해야 하는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어느 나라 대통령인가.
국가안보 사태 때 안보 참모들이 여성 대통령을 보좌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다. 대통령의 양대 군사참모는 한민구 국방부 장관과 김관진 국가안보실장이다. 한 장관은 2010년 연평도 피격 때 합참의장이었다. 합참 작전회의에서 어느 대령이 "비행기로 폭격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한 의장은 끝내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사실상 그는 패장인 것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일제와 싸웠던 영웅적인 의병장 한봉수다. 그런 할아버지의 손자가 부끄러운 기록을 남겼다. 퇴임 이후 그는 사석에서 전술 실패를 인정하곤 했다. 그가 국방장관 물망에 오르자 "패장이 어떻게 국방장관이 되나"라는 시선이 있었다. 그는 "실패의 경험이 있으므로 더 잘할 수 있다"고 반박했다.
그는 지난해 6월 국방장관이 됐다. 그는 '창조국방'이라는 걸 내놓았다. 과학기술과 창의성을 국방 분야에 융합한다는 것이다. 이후 '창조국방'은 국방정책의 핵심적인 구호가 됐다. 과학기술과 창의성은 새로운 게 아니다. 정권과 시대를 넘어 추구해야 하는 가치다. 그런데 왜 유독 그만이 장관이 되자마자 '창조'라는 단어를 붙이는가. 국방장관이 북쪽의 적을 쳐다봐야지 왜 대통령을 바라보는가. 누가 집권하든 다음 정권에서 '창조국방'이라는 단어가 살아남을까.
장관이 이상한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보고 나는 그의 '국방 진정성'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그는 공언을 지키지 않고 있다. 지뢰 폭발에 대해 군은 "북한이 혹독한 대가를 치르도록 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군의 응징 조치라고는 대북 확성기 방송뿐이다. 적의 공격으로 병사들의 다리가 허공으로 날아갔는데, 병사들은 "응징하고 싶다"고 절규하는데 이 나라 군대는 총 대신 확성기를 쏘고 있다.
대국민 약속을 지키지 못한 건 김관진 국가안보실장도 마찬가지다. 그는 2010년 11월 연평도 피격 직후 국방장관이 됐다. 국민의 분노와 허탈감 속에서 그는 응징 3단계 원칙을 천명했다. 북한이 도발하면 원점-지원세력-지휘세력을 타격하겠다는 것이다. 군 지휘관들이 하도 자주 얘기해 웬만한 국민은 이 문장을 달달 왼다. 그런데 지금 그것은 어디에 있나. 군에서는 북한 경비초소를 포격으로 부수자는 의견이 있었다고 한다. 이른바 원점 타격이다. 그런데 이번에도 군 지휘부는 구차한 변명으로 수풀 뒤에 숨었다.
1973년 3월 북한이 비무장지대에서 작업하던 한국군을 공격했다. 대위와 하사가 중상을 입었다. 박정인 3사단장은 대포를 동원해 북한 경비초소를 부숴버렸다. 북한은 응전하지 못했다. 박 장군은 지금 87세다. 그는 유약한 한국군을 개탄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로마의 군사학자 베티게우스는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고 했습니다". 로마의 장군이 환생하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오, 한국의 창조국방 신기합네다. 확성기 멋있습네다."
-중앙일보 논설위원 김진
猛將의 싹을 자른 박정인 사단장 해임 사건
북한의 지뢰 공격 소식을 듣고 북이 우리 국민의 생명을 가지고 논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다에서도 죽여보고, 땅에서도 죽여보고, 어뢰도 쏴보고, 대포도 쏴보고, 지뢰도 터뜨려보고... 다음엔 또 무슨 새로운 아이디어로 우리 국민을 살상할지 궁금하기까지 하다. 이 지경이 된 것은 기본적으로 북이 우리를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공포'는 평화를 지킬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무기인데 우리는 그 수단을 잃어버렸다. 그 시초는 우리 정부가 1973년 박정인(朴定仁·87) 백골사단장(육군 3사단장)을 해임 예편시킨 것이라고 본다. 박 사단장 회고록에 따르면 3사단은 그해 3월 7일 비무장지대 내 표지판 보수 작업을 실시했다. 매년 봄 가을에 정기적으로 하는 작업이었다. 그런데 작업을 마치고 귀대하는 우리 장병을 향해 북이 기습 사격을 가해 왔다. 대위 1명과 하사 1명이 중상을 입고 쓰러졌다.
박 사단장은 마이크로 북측에 사격 중지를 요구했다. "차후 사태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인민군 측에 있다"고 몇 차례 경고했다. 북이 경고를 부시하자 박 사단장은 관측기를 상공에 띄운 다음 북측 GP(초소)에 포 사격을 개시했다(박 사단장은 연대장 시절 군사분계선 남쪽을 제 집처럼 넘나드는 북한군을 향해 일제사격을 퍼부어 5명을 쓰러뜨린 다음 붙잡아 온 사람이다. 그 중 둘은 죽었다). 포탄이 북 GP를 그대로 강타했다. 이어 북한군 보병들 배치 지역에도 포탄을 쏟아부었다. 부상 장병을 구출하기 위해 연막탄도 발사했다. 이 연막탄으로 일대에 불이 붙자 지뢰들이 연이어 폭발했다. 북한군이 달아나는 것이 목격됐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박 사단장은 그날 밤 사단 내 모든 트럭에 라이트를 켜라고 명령했다. 그 상태로 한꺼번에 DMZ 남방한계선까지 돌진케 했고 일부 차량은 군사분계선까지 밀고 갔다. 나중에 박 사단장은 "김일성에게 겁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실제 북에서 난리가 나고 김일성은 전군에 비상동원령을 내렸다. 김일성은 분명 떨었을 것이다.
1972년 이후 남북협상을 진행 중이던 정부는 한 달도 되지 않은 1973년 4월 3일 박 사단장을 해임했다. 군복까지 벗겼다. 미군의 요구도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 "북은 도발하면 훈장을 주고, 우리는 반격하면 벌을 준다"고 했는데 바로 그런 경우였다. 박 사단장은 회고글에서 "나는 나의 판단과 행동을 후회하지 않았다. 북한 공산당들은 약한 자에게는 강하지만 강한 자에게는 더없이 약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내가 포격을 퍼붓는 동안 그들은 단 한 발의 포도 우리 쪽에 발사하지 못했다"고 했다.
한 군인의 무모함이 나라를 곤란하게 만들 수도 있다. 군인에게 용맹이 덕목의 전부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용맹하지 못하면 절대 군인일 수 없다. 민간 정부의 통제를 받되 군은 용맹해야만 적에게 공포를 줄 수 있다. 온화한 신사가 집에 호랑이를 키우는 것이 정부와 군의 관계다. 박 사단장 해임 예편은 우리 군인들에게서 그와 같은 용맹을 빼앗아가 버렸다. '용맹하면 군복을 벗어야 한다'는 생각이 알게 모르게 군인들 머릿속에 들어박혔다.
월남한 청년들이 주축이 된 연대 하나가 "백골이 돼서도 통일을 이루겠다"고 맹세한 데서 백골사단의 이름이 유래했다. 그 사단의 진정한 부대장은 박정인 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백골사단에 취임한 날 '전 장병 철모 착용'을 명령 1호로 하달했다. 연이은 2호 명령은 '총기 거치대 자물쇠 제거와 실탄 장전'이었다. "백골!" 경례 구호도 부활시켰다. 끔찍해서 안전사고를 유발할 수 있다고 없앤 구호였다. 총검술 훈련도 남쪽 방향이 아닌 북쪽으로 하게 했다. 심지어 야외 화장실조차 북쪽으로 방향을 틀게 했다. 박 사단장은 '모든 일을 전투 기준으로' '죽어서 백골이 돼도 조국과 민족의 수호신이 되겠다'는 백골용사의 선서문을 만들어 복창케 했다. 사단장에서 해임됐을 때 이임사는 "북진통일을 완수하지 못해 유감이다"는 것이었다.
육사 출신인 박 사단장은 아들도 육사에 보냈다. 그 아들이 첫 방학 때 찾아오자 "내가 북진하다 전사하면 네가 백두산으로 진격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손자가 태어나자 할아버지에게 "백골!" 구호로 경례하게 했다. 그 손자가 또 육사에 들어갔다.
이런 무장(武將)은 진급이 뒤처지다 결국 별 한 개를 달고 물러나야 했고, 전투가 아닌 사고 방지와 진급이 목적인 군인들은 출세해 온 것이 지금 우리 군의 실정이다. 북 중 일 누가 두려워 하겠나. 장비가 낡고 연료도 없는 북은 전면전은 불가능하다. 핵은 쓸 수 없는 무기다. 결국 천안함 폭침이나 지뢰 도발처럼 등 뒤에서 찌르는 짓밖에 할 수 없다.
그런 세력일수록 '공포'가 특효약이다. 그런데 우리는 얌전한 신사가 집에 호랑이가 아니라 고양이를 키우는 꼴이다. 과거 남북회담 때 북측 사람들은 박 사단장의 근황을 궁금해했다고 한다. 그만큼 그를 두려워하고 의식했던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그런 군인이 몇이나 있는가.
-조선일보 양상훈 논설주간
'자료저장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상식- 중앙일보 뉴스클립 (0) | 2015.08.25 |
---|---|
양선희 (0) | 2015.08.25 |
엄마를 벌주는 사회 (0) | 2015.08.11 |
박통 연설 (0) | 2014.12.14 |
사대강 팩트 정리 (1) | 2014.12.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