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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재 칼럼] '국부 이승만'을 생각한다
기사입력 2016.01.18 오후 6:05
최종수정 2016.01.19 오전 5:19
자유시장경제 체제는 이승만 작품
54년 2차 개헌으로 자유권 확보
선거 책사들의 입방아 부적절하다
정규재 주필 jkj@hankyung.com
원본보기
한상진 국민의당 창당준비위원장이 이승만 전 대통령을 ‘국부(國父)’로 평가했다는 뉴스는 모처럼 정치권에서 나온 정상적인 언어다. 물론 토를 달았다. “사회통합의 관점에서 이해해달라”는 사족까지 붙였다. 실망스럽게도 금세 꼬리를 내릴 태세다. 김종인의 평가도 비슷하다. “3선 개헌이 없었더라면 국부로 인정할 수도 있겠지만 …”이라는 마지못한 어투다. “…국부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는데, 본인 스스로 망가뜨렸다”고도 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아직도 그렇게 금기어적 어법의 지배를 받는다. 천사 아니면 악마라는 유아적 도식이 여전히 이항대립적 역사의식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하이 임시정부가 있기 때문에 1948년 8월15일을 대한민국 건국이라고 할 수 없고, 따라서 국부가 아니라는 주장은 무식하거나 사악한 자들의 지지를 받는다. 그들은 이승만이 상하이 등 여러 개 임정의 초대 대통령이었다는 사실을 외면한다. 사전들이 이승만을 3·15 부정선거로 당선됐다고 쓰고 있는 것도 오류다. 부정하게 당선된 것은 이기붕이다.
대한민국의 역사를 ‘정의가 패배한 역사’라고 생각하는 부류는 백년전쟁이라는 가짜 영상물까지 만들어 이승만을 왜곡하는 데 정성을 들인다. 여성들이 그를 가운데 놓고 질투하던 사건까지 끄집어내 무언가의 치정사건처럼 엮어 보려는 갖은 시도들이다. 그를 친일파로 매도하는 것은 특히 인기있는 수법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인의 반일 의식이야말로 실은 그가 심어놓은 검은 유산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는 민주주의도 반일의식도 열심히 가르쳤다. 초대 내각에 친일파를 기용한 것은 김일성이지 이승만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는 우물안 개구리였던 당시 정치인들에게 국제정세를 자세히 가르쳐야만 했다.
박정희를 흠모하는 사람들도 이승만을 폄훼한다. 이승만을 높일수록 박정희의 경제 기적이 깎여 나간다는 순진한 도식 때문일 것이다. 4·19세대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들은 아직도 죽은 사람과 투쟁하고 있다. 정치적 출생증명서라도 되는 것처럼 그들은 경쟁적으로 초대 대통령 동상 부수기 운동을 한다. 새누리당에도 그런 사람이 많다. 그런 범주에는 아쉽게도 박근혜 대통령이 포함된다. 박 대통령은 작년 8·15 기념사에서 ‘이승만’ ‘건국’ ‘국부’ 이런 말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박 대통령은 상하이 임정으로 곧바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런데 교과서 바로잡기라니 … 걱정된다!
이승만 국부론이 단순히 그가 정부를 만들었기 때문에 붙여지는 호칭은 아닐 것이다. 그는 사회주의로 기운 대한민국을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로 돌려놓았다. 1948년에 제정된 제헌헌법은 지하자원, 수산자원까지 모두 국유로 천명할 정도로 사회주의적이었다.(제85조) 운수 통신 금융 보험 등의 기업은 국영 또는 공영으로 하고, 대외무역은 국가의 통제하에 두었다.(제86조) 그리고 사영기업을 국유 또는 공유로 하거나 경영을 통제, 관리할 수 있도록 했다.(제87조) 제헌헌법의 이 같은 조항들은 1954년 제2차 개헌에서 비로소 시장경제로 바뀌었다. 경영 통제 조항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통제할 수 없다’고 개정됐고, 무역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해’ 통제한다로 바뀌었다. 대한민국은 비로소 자본주의 국가로 태어난 것이다. 놀랍게도 그리고 운명적이게도 이 2차 헌법 개정은 그 유명한 사사오입이라는 편법을 통해 이뤄졌다. 지금 생각해도 등줄기에 식은 땀이 흐른다. 그나마도 김일성과 6·25전쟁을 치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기업의 이익은 근로자가 균점한다는 사회주의 조항(헌법 제18조)의 폐기는 1962년 5차 헌법 개정, 다시말해 박정희의 등장을 기다려야 했다. 이승만이 길을 닦고 박정희가 달렸다. 영웅 아닌 자가 있겠으며 특히나 무에서 유를 만들어낸 이승만을 국부로 추앙하지 않는다면 누구를 그 자리에 놓을 것인가. 정치판 책사들의 입방아가 그나마의 일보 전진이라며 박수라도 쳐야 하는 것인지 ….
정규재 주필 jkj@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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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국부 이승만, 통일되면 가능하다
기사입력 2016.01.27 오전 12:48
최종수정 2016.01.27 오전 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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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진 논설위원
건국대통령 이승만(1875~1965)을 높게 평가하는 이들은 그를 국부(國父)로 추앙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대개 보수·우파다. 진보·좌파에선 이런 목소리가 거의 없다. 그런데 놀라운 반전이 일어났다. 한상진 ‘국민의당’ 창당준비위원장이 이승만을 국부로 평가한 것이다. 그는 대표적인 진보파 사회학자다. 정치적으로는 김대중(DJ)에게 정서적 유대를 갖고 있다. 그런 인물이 ‘국부 이승만’을 언급한 것이다.
세계사에서 국부라 불리는 이들은 근대 공화국 건설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물이다. 고대·중세에서 아무리 위대한 제국을 만들었다 해도 국부라 하지는 않는다. 이슬람 제국의 무함마드,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로마의 카이사르,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국부로 불리지는 않는다. 조선의 이성계도 마찬가지다.
대개 봉건왕조와 싸워 근대 공화정을 수립한 이들이 국부가 된다. 왕조의 창립이나 확장보다 자유·평등·민권의 근대국가를 세운 게 중요한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헌신과 애국심으로 온갖 시련을 이겨내는 건 당연한 것이다. 이 두 가지를 갖춘 국부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미국의 조지 워싱턴, 남미의 볼리바르, 중국의 쑨원, 인도의 간디, 터키의 케말 파샤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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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는 이승만이 있다. 일제강점기나 해방공간에서 그는 가장 핵심적인 지도자였다. 그는 상하이 임시정부의 대통령이자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다. 그는 공산주의를 물리치고 자유민주 공화정을 도입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시련과 헌신 또한 간디나 쑨원 못지않다. 그는 봉건왕조 고종에 대한 쿠데타 음모로 5년6개월이나 감옥에 갇혔다. 유품이 보여주듯 청렴하고 검소했다. 북한의 남침으로부터 국가를 지켜냈다. 전후에는 강력한 한·미 동맹으로 국가 발전의 길을 열었다.
문제는 그의 과오다. 그는 친일파 청산에 소극적이었다. 공산주의 세력과 싸우려면 숙련된 관리·경찰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국회가 친일파 단죄 특위를 만들자 그는 삼권분립을 들어 반대했다. 이승만의 경찰이 특위를 공격했으며 결국 특위는 와해됐다.
독재도 중요한 과오다. 박정희는 아예 개발독재 소신파였다. 국가 개발의 초창기에는 민주주의가 유보돼야 한다고 믿었다. 반면 이승만은 민주주의 신봉자였다. 그런데도 그는 장기집권을 위해 독재 방식을 택했다. 경찰력과 편법으로 국회를 누르고 헌법을 바꾸었다. 결국 1960년 3·15 부정선거가 터졌고 학생들이 피를 흘렸다. 이승만은 부정을 지시하지도, 발포를 명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4·19의 비극과 정권의 몰락은 장기집권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오가 있는 건국 지도자는 국부로 불릴 수 없는 걸까. 그렇지 않다. 터키의 무스타파 케말(1881~1938)은 독재자였다. 그럼에도 그는 국부로 불린다. 공적이 과오보다 훨씬 크기 때문이다. 케말은 술탄 봉건왕조를 무너뜨리고 근대국가 터키를 만들었다. 역사적인 갈리폴리 전투에서 영국을 물리쳤다. 기독교 국가 그리스와 아르메니아의 공격으로부터 이슬람 터키를 구했다. 그는 1차적으로 케말 파샤(Pasha·지도자)가 됐다.
그러나 초대 대통령이 되자 케말은 독재권력을 휘둘렀다. 정치는 1당 체제였으며 반항하는 신문이 폐간되기도 했다. 그는 소수민족 쿠르드의 반란을 진압하고 지도자들을 처형했다. 그가 퇴임하기도 전에 동상이 세워졌다. 그런 독재 논란에도 불구하고 터키 국민은 그를 국부라 부른다. 의회는 그가 죽기 전 아타튀르크(Atatürk·터키의 아버지)라는 호칭을 헌상했다.
한국의 케말 파샤 이승만은 언제 국부가 될 수 있을까. 남북 통일이 되면 그럴 기회가 생길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역사는 사실(史實)을 해석하는 것이다. 사실이란 재료가 더욱 늘어나면 해석도 달라질 수 있다. 통일이 되면 공산주의 북한의 끔찍한 비밀이 세상에 드러날 것이다. 그러면 이승만의 자유민주 건국이 다시 조명될 것이다.
이승만이 중국이 아니라 미국에 머문 건 대한민국에 축복이라 할 수 있다. 김구 세력이 활동했던 중국에선 쑨원의 자본주의 혁명이 마오쩌둥의 공산혁명에 밀려나고 있었다. 중국의 조선 독립운동가들은 사회주의에 많이 노출됐다. 소련과 김일성에 대해 김구가 경계심을 늦춘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을 것이다. 반면 이승만은 미국에서 자본주의의 풍요로운 성장을 목격했다.
통일이 되면 이승만의 선택이 얼마나 위대한 지 증명될 것이다. 해방공간에서 남북 합작 세력이 매달렸던 환상이 얼마나 위험한지, 이승만의 유상 토지개혁이 북한의 국가 소유 집단농장보다 얼마나 우월한지, 그리고 무엇보다 이승만의 한·미 동맹이 북한을 어떻게 막았는지 국민은 생생히 느낄 것이다.
자유민주 국가의 건국과 호국(護國) 속에 4·19의 함성이 묻힐 때 천상(天上)의 이승만은 국부라 불릴 수 있을 것이다.
김진 논설위원
김진 기자 jin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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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영식의 세상만사] 국부(國父)는 없다
기사입력 2016.01.21 오후 8:13
/주필 yshw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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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民主)와 어울리기 어려워
‘건국의 아버지들’을 기억하자
개개인의 공과 함께 평가해야
이승만 전 대통령을 ‘국부(國父)’로 평가하자는 한상진 국민의당 공동창당준비위원장의발언이 야권에 정체성 논란을 불렀다.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선거대책위원장의 즉각적 반발과 ‘건국절’에 대한 입장 표명 요구를, 한 위원장이 김 위원장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전력을 거론해 맞받아치면서 불붙은 논란이 빠르게 번져나갔다. 그러나 논란을 계기로 국민의당 지지율 상승세가 꺾이자 한 위원장은 해명과 사과, 김구 묘역 참배 등으로 논란 진화에 나섰다.
적잖은 전문가들은 한 위원장의 이번 발언이 나름대로 계산된 것이라고 보았다. 더민주와 결별하면서 밝힌 이념노선의 차이를 분명히 드러내는 데 현대사나 해방전후사에 대한 인식처럼 좋은 재료가 없다. 실용ㆍ온건 개혁파가 주축인 국민의당이 온건보수 세력에 친근감을 표해 외연을 확장하려면, 보수ㆍ진보 사관이 엇갈리는 현대사 쟁점에 다소 보수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었을 성싶다. 그러나 오래 전부터 보수의 핵심 징표처럼 여겨져 온 ‘이승만 국부’ 논의를, 그것도 4ㆍ19 민주묘역에서 꺼내 든 것은 ‘계산된 의도’보다는 발언의 즉흥성이 두드러진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등을 계기로 그 동안 여러 차례 거듭된 논란의 내용에 비추어 초대 대통령이니 국부라고 불러도 좋지 않겠느냐는 그의 생각이 너무 순진하거나 안이해서 더욱 그렇다.
반면 그의 발언을 두들기느라 여념이 없는 더민주나 진보학계의 ‘국부’ 인식은 요건이 지나치게 엄격하다. 베트남의 호치민(胡志明)이나 터키의 케말 파샤처럼 건국의 기초를 닦고, 초대 최고지도자로서 국가발전에 분명한 족적을 남기고, 국민적 존경을 잃은 적이 없는 인물이어야 한다. 그 동안 이승만 전 대통령의 대안으로 거론된 김구나 박정희ㆍ김대중 등 어느 누구도 이런 엄밀한 기준을 채우지 못한다. 이 전 대통령이 국부가 아니듯, 다른 정치지도자 가운데도 마땅한 후보는 없다.
이런 현실을 두고 ‘국부가 없는 이상한 나라’라고 지적하는 사람도 있지만 동의하지 않는다. 국부는 없을 수도 있고, 없어도 좋고, 실제로도 없다. 우선 국부라는 말 자체가 세계사적 보편성보다는 중앙집권적 왕조 통치의 전통이 강한, 동양적 특성과 가까이 있다. 국부의 사전적 의미는 ‘나라의 아버지’로, 대비되는 말인 국모(國母)가 왕비를 가리키듯 임금을 가리킨다. ‘임금과 스승과 아버지는 하나’(君師父一體)라는 통치이데올로기가 ‘사부(師父)’와 함께 낳은 말이다. 아울러 국부가 있는 나라는 대개 진정한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있거나, 여전히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국민통합의 중요한 수단으로 삼고 있다.
왕정의 역사를 털어낸 자리에 세워진 민주주의 국가에서 굳이 국부의 존재를 희구할 이유가 없다. 아니, 민주주의가 정착되고, 민족주의 이념의 퇴행성이 충분히 드러난 이제 와서
국부를 가지려는 발상이 오히려 비정상이다.
프랑스가 드골, 미국이 조지 워싱턴을 국부로 섬긴다는 반론이 나올 수 있지만, 억지로 갖다 붙였을 뿐 보편적 국민 인식은 아니라고 한다. 실제로 미국은 국부보다는 ‘건국 아버지들(FoundingFathers)’을 흔히 쓴다. 아브라함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 모두에 ‘87년 전 우리 아버지들(ourFathers)’이라고 언급한 사람들이다. 대영 독립전쟁 발발 1년 뒤인 1776년 ‘독립선언문’과 이듬해 제헌의회의 건국헌법 기초작업에 헌신한 주역들이다. 독립전쟁을 이끈 전쟁영웅이자 초대 대통령인 워싱턴은 물론이고 , 존 아담스, 벤자민 프랭클린, 토마스 제퍼슨, 제임스 매디슨, 알렉산더 해밀턴 등 많은 사람이 포함된다.
그러고 보니 논리적으로든 현실로서든 존재할 수 없는 국부가 아니라 미국처럼 ‘건국의 아버지들’을 꼽아보려는 노력은 필요할 성싶다. 밑도 끝도 없는 헛된 국부 논란으로 현대사 인물들의 얼룩만 들춰낼 게 아니다. 그 대신 김구 이승만 김규식 등 많은 우리 ‘건국 아버지들’을 집단으로, 개개인의 공과(功過)와 함께 기억할 수 있다면 우리 안의 역사 화해에도 좋지 않겠나.
[양상훈 칼럼] 한 위대한 한국인을 무릎 꿇고 추모하며
| 2015/07/16 03:20
양상훈 논설주간
50년 전 1965년 7월 19일 오전 0시 35분 하와이의 한 노인 요양원에서 나이 아흔의 한국인 병자가 숨을 거두었다. 한 달 전부터 피를 토했다. 7월 18일엔 너무 많은 피가 쏟아졌다. 옆에는 평생 수발하던 아내, 대(代)라도 잇겠다며 들인 양자와 교민 한 사람밖에 없었다. 큰 한숨을 한 번 쉬더니 숨이 끊어졌다. 어떤 어려움에도 우는 법이 없었던 아내가 오열했다. 전기 작가 이동욱씨는 영결식의 한 장면을 이렇게 전했다. 한 미국인 친구가 울부짖었다. "내가 너를 알아! 내가 너를 알아! 네가 얼마나 조국을 사랑하는지… 그것 때문에 네가 얼마나 고생을 해왔는지. 바로 그 애국심 때문에. 네가 그토록 비난받고 살아온 것을. 내가 알아…."
그 미국인은 장의사였다. 그는 1920년에 미국서 죽은 중국인 노동자들의 유해를 중국으로 보내주고 있었다. 그런데 이승만이라는 한국인이 찾아와 그 관(棺)에 숨어 상하이로 가겠다고 했다. 한국 독립운동을 하는데 일본이 자신을 현상수배 중이라고 했다. 그 한국인은 실제 관에 들어가 밀항에 성공했다. '너의 그 애국심 때문에 네가 얼마나 고생했고, 얼마나 비난받았는지 나는 안다'는 절규는 그냥 나온 것이 아니었다.
15일 아침 서울 국립현충원 이승만 대통령 묘소를 찾았다. 나흘 뒤면 그의 50주기다. 필자 역시 이 대통령에 대해 부정적 얘기만 듣고 자랐다. 그의 생애 전체를 보고 머리를 숙이게 된 것은 쉰이 넘어서였다. 이 대통령 묘 앞에서 '만약 우리 건국 대통령이 미국과 국제정치의 변동을 알고 이용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보았다. 고개를 흔들 수밖에 없었다. 그 없이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그 없이 우리가 자유민주 진영에 서고, 그 없이 전쟁에서 나라를 지키고, 그 없이 한·미 동맹의 대전략이 가능했겠느냐는 질문에 누가 "그렇다"고 답할 수 있을까. 추모비에 적힌 지주(地主) 철폐, 교육 진흥, 제도 신설 등 지금 우리가 디디고 서 있는 바탕이 그의 손에서 나왔다. 원자력발전조차 그에 의해 첫발을 내디뎠다.
그는 무지몽매한 나라에 태어났으나 그렇게 살기를 거부했다. 열아홉에 배재학당에 들어가 나라 밖 신세계를 처음으로 접했다. 썩은 조정을 언론으로 개혁해보려다 사형선고까지 받았다. 감옥에선 낮에는 고문당하고 밤에는 영어 사전을 만들었다. 이 대통령은 독립하는 길은 미국을 통하는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1905년 나이 서른에 조지워싱턴대학에 입학하고 하버드대 대학원을 거쳐 프린스턴대에서 국제정치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41년 미국에서 'JAPAN INSIDE OUT(일본의 가면을 벗긴다)'을 썼다. 그 책에서 이 대통령은 일본이 반드시 미국을 공격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책이 나온 지 넉 달 뒤 일본이 진주만을 폭격했다. 미국 정치인들은 한국인 이승만을 다시 보았다.
이 대통령은 1954년 이 책의 한국어판 서문을 이렇게 썼다. '일본인은 옛 버릇대로 밖으로는 웃고 내심으로는 악의를 품어서 교활한 외교로 세계를 속이는… 조금도 후회하거나 사죄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을뿐더러… 미국인들은 지금도 이를 알지 못하고 일인들의 아첨을 좋아하며 뇌물에 속아 일본 재무장과 재확장에 전력을 다하며… 심지어는 우리에게 일본과 친선을 권고하고 있으니….' 이 대통령은 서문을 '우리는 미국이 어찌 하든지 간에 우리 백성이 다 죽어 없어질지언정 노예는 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고 합심하여 국토를 지키면 하늘이 우리를 도울 것이다'고 맺었다. 평생 반일(反日)한 이 대통령을 친일(親日)이라고 하고, 평생 용미(用美)한 그를 친미(親美)라고 하는 것은 사실을 모르거나 알면서 매도하는 것이다.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는 "어지러운 구한말 모두 중·일·러만 볼 때 청년 이승만은 수평선 너머에서 미국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를 19세기 한국의 콜럼버스라고 부른다. 우리 수천년 역사에 오늘날 번영은 대한민국을 건국한 이 박사의 공로다. 그런데 지금 우리 국민은 이 위대한 지도자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했다. 거인이 이룬 공(功)은 외면하고 왜곡하며, 과(過)만 파헤치는 일들이 지금도 계속된다. 건국 대통령의 50주기를 쓸쓸히 보내며 감사할 줄 모르는 우리의 자해(自害)와 업(業)을 생각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물러난 후 겨울에 난방할 땔감도 없었다. 하와이에선 교포가 내 준 30평짜리 낡은 집에서 궁핍하게 살았다.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 친정에서 옷가지를 보내줄 때 포장한 종이 박스를 옷장으로 썼다. 교포들이 조금씩 보내준 돈으로 연명하며 고국행 여비를 모은다고 5달러 이발비를 아꼈다. 늙은 부부는 손바닥만 한 식탁에 마주 앉아 한국으로 돌아갈 날만 기다렸다. 그렇게 5년이 흘렀다.
이 대통령이 우리 음식을 그리워하자 부인이 서툰 우리말로 노래를 만들어 불러줬다고 한다. 이 대통령도 따라 불렀던 그 노래를 이동욱 작가가 전한다. '날마다 날마다 김치찌개 김칫국/날마다 날마다 콩나물국 콩나물/날마다 날마다 두부찌개 두부국/날마다 날마다 된장찌개 된장국.' 아무도 없이 적막한 그의 묘 앞에서 이 노래를 생각하니 목이 메었다.
기사입력 2016.01.18 오후 6:05
최종수정 2016.01.19 오전 5:19
자유시장경제 체제는 이승만 작품
54년 2차 개헌으로 자유권 확보
선거 책사들의 입방아 부적절하다
정규재 주필 jkj@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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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진 국민의당 창당준비위원장이 이승만 전 대통령을 ‘국부(國父)’로 평가했다는 뉴스는 모처럼 정치권에서 나온 정상적인 언어다. 물론 토를 달았다. “사회통합의 관점에서 이해해달라”는 사족까지 붙였다. 실망스럽게도 금세 꼬리를 내릴 태세다. 김종인의 평가도 비슷하다. “3선 개헌이 없었더라면 국부로 인정할 수도 있겠지만 …”이라는 마지못한 어투다. “…국부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는데, 본인 스스로 망가뜨렸다”고도 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아직도 그렇게 금기어적 어법의 지배를 받는다. 천사 아니면 악마라는 유아적 도식이 여전히 이항대립적 역사의식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하이 임시정부가 있기 때문에 1948년 8월15일을 대한민국 건국이라고 할 수 없고, 따라서 국부가 아니라는 주장은 무식하거나 사악한 자들의 지지를 받는다. 그들은 이승만이 상하이 등 여러 개 임정의 초대 대통령이었다는 사실을 외면한다. 사전들이 이승만을 3·15 부정선거로 당선됐다고 쓰고 있는 것도 오류다. 부정하게 당선된 것은 이기붕이다.
대한민국의 역사를 ‘정의가 패배한 역사’라고 생각하는 부류는 백년전쟁이라는 가짜 영상물까지 만들어 이승만을 왜곡하는 데 정성을 들인다. 여성들이 그를 가운데 놓고 질투하던 사건까지 끄집어내 무언가의 치정사건처럼 엮어 보려는 갖은 시도들이다. 그를 친일파로 매도하는 것은 특히 인기있는 수법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인의 반일 의식이야말로 실은 그가 심어놓은 검은 유산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는 민주주의도 반일의식도 열심히 가르쳤다. 초대 내각에 친일파를 기용한 것은 김일성이지 이승만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는 우물안 개구리였던 당시 정치인들에게 국제정세를 자세히 가르쳐야만 했다.
박정희를 흠모하는 사람들도 이승만을 폄훼한다. 이승만을 높일수록 박정희의 경제 기적이 깎여 나간다는 순진한 도식 때문일 것이다. 4·19세대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들은 아직도 죽은 사람과 투쟁하고 있다. 정치적 출생증명서라도 되는 것처럼 그들은 경쟁적으로 초대 대통령 동상 부수기 운동을 한다. 새누리당에도 그런 사람이 많다. 그런 범주에는 아쉽게도 박근혜 대통령이 포함된다. 박 대통령은 작년 8·15 기념사에서 ‘이승만’ ‘건국’ ‘국부’ 이런 말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박 대통령은 상하이 임정으로 곧바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런데 교과서 바로잡기라니 … 걱정된다!
이승만 국부론이 단순히 그가 정부를 만들었기 때문에 붙여지는 호칭은 아닐 것이다. 그는 사회주의로 기운 대한민국을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로 돌려놓았다. 1948년에 제정된 제헌헌법은 지하자원, 수산자원까지 모두 국유로 천명할 정도로 사회주의적이었다.(제85조) 운수 통신 금융 보험 등의 기업은 국영 또는 공영으로 하고, 대외무역은 국가의 통제하에 두었다.(제86조) 그리고 사영기업을 국유 또는 공유로 하거나 경영을 통제, 관리할 수 있도록 했다.(제87조) 제헌헌법의 이 같은 조항들은 1954년 제2차 개헌에서 비로소 시장경제로 바뀌었다. 경영 통제 조항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통제할 수 없다’고 개정됐고, 무역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해’ 통제한다로 바뀌었다. 대한민국은 비로소 자본주의 국가로 태어난 것이다. 놀랍게도 그리고 운명적이게도 이 2차 헌법 개정은 그 유명한 사사오입이라는 편법을 통해 이뤄졌다. 지금 생각해도 등줄기에 식은 땀이 흐른다. 그나마도 김일성과 6·25전쟁을 치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기업의 이익은 근로자가 균점한다는 사회주의 조항(헌법 제18조)의 폐기는 1962년 5차 헌법 개정, 다시말해 박정희의 등장을 기다려야 했다. 이승만이 길을 닦고 박정희가 달렸다. 영웅 아닌 자가 있겠으며 특히나 무에서 유를 만들어낸 이승만을 국부로 추앙하지 않는다면 누구를 그 자리에 놓을 것인가. 정치판 책사들의 입방아가 그나마의 일보 전진이라며 박수라도 쳐야 하는 것인지 ….
정규재 주필 jkj@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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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국부 이승만, 통일되면 가능하다
기사입력 2016.01.27 오전 12:48
최종수정 2016.01.27 오전 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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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진 논설위원
건국대통령 이승만(1875~1965)을 높게 평가하는 이들은 그를 국부(國父)로 추앙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대개 보수·우파다. 진보·좌파에선 이런 목소리가 거의 없다. 그런데 놀라운 반전이 일어났다. 한상진 ‘국민의당’ 창당준비위원장이 이승만을 국부로 평가한 것이다. 그는 대표적인 진보파 사회학자다. 정치적으로는 김대중(DJ)에게 정서적 유대를 갖고 있다. 그런 인물이 ‘국부 이승만’을 언급한 것이다.
세계사에서 국부라 불리는 이들은 근대 공화국 건설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물이다. 고대·중세에서 아무리 위대한 제국을 만들었다 해도 국부라 하지는 않는다. 이슬람 제국의 무함마드,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로마의 카이사르,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국부로 불리지는 않는다. 조선의 이성계도 마찬가지다.
대개 봉건왕조와 싸워 근대 공화정을 수립한 이들이 국부가 된다. 왕조의 창립이나 확장보다 자유·평등·민권의 근대국가를 세운 게 중요한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헌신과 애국심으로 온갖 시련을 이겨내는 건 당연한 것이다. 이 두 가지를 갖춘 국부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미국의 조지 워싱턴, 남미의 볼리바르, 중국의 쑨원, 인도의 간디, 터키의 케말 파샤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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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는 이승만이 있다. 일제강점기나 해방공간에서 그는 가장 핵심적인 지도자였다. 그는 상하이 임시정부의 대통령이자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다. 그는 공산주의를 물리치고 자유민주 공화정을 도입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시련과 헌신 또한 간디나 쑨원 못지않다. 그는 봉건왕조 고종에 대한 쿠데타 음모로 5년6개월이나 감옥에 갇혔다. 유품이 보여주듯 청렴하고 검소했다. 북한의 남침으로부터 국가를 지켜냈다. 전후에는 강력한 한·미 동맹으로 국가 발전의 길을 열었다.
문제는 그의 과오다. 그는 친일파 청산에 소극적이었다. 공산주의 세력과 싸우려면 숙련된 관리·경찰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국회가 친일파 단죄 특위를 만들자 그는 삼권분립을 들어 반대했다. 이승만의 경찰이 특위를 공격했으며 결국 특위는 와해됐다.
독재도 중요한 과오다. 박정희는 아예 개발독재 소신파였다. 국가 개발의 초창기에는 민주주의가 유보돼야 한다고 믿었다. 반면 이승만은 민주주의 신봉자였다. 그런데도 그는 장기집권을 위해 독재 방식을 택했다. 경찰력과 편법으로 국회를 누르고 헌법을 바꾸었다. 결국 1960년 3·15 부정선거가 터졌고 학생들이 피를 흘렸다. 이승만은 부정을 지시하지도, 발포를 명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4·19의 비극과 정권의 몰락은 장기집권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오가 있는 건국 지도자는 국부로 불릴 수 없는 걸까. 그렇지 않다. 터키의 무스타파 케말(1881~1938)은 독재자였다. 그럼에도 그는 국부로 불린다. 공적이 과오보다 훨씬 크기 때문이다. 케말은 술탄 봉건왕조를 무너뜨리고 근대국가 터키를 만들었다. 역사적인 갈리폴리 전투에서 영국을 물리쳤다. 기독교 국가 그리스와 아르메니아의 공격으로부터 이슬람 터키를 구했다. 그는 1차적으로 케말 파샤(Pasha·지도자)가 됐다.
그러나 초대 대통령이 되자 케말은 독재권력을 휘둘렀다. 정치는 1당 체제였으며 반항하는 신문이 폐간되기도 했다. 그는 소수민족 쿠르드의 반란을 진압하고 지도자들을 처형했다. 그가 퇴임하기도 전에 동상이 세워졌다. 그런 독재 논란에도 불구하고 터키 국민은 그를 국부라 부른다. 의회는 그가 죽기 전 아타튀르크(Atatürk·터키의 아버지)라는 호칭을 헌상했다.
한국의 케말 파샤 이승만은 언제 국부가 될 수 있을까. 남북 통일이 되면 그럴 기회가 생길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역사는 사실(史實)을 해석하는 것이다. 사실이란 재료가 더욱 늘어나면 해석도 달라질 수 있다. 통일이 되면 공산주의 북한의 끔찍한 비밀이 세상에 드러날 것이다. 그러면 이승만의 자유민주 건국이 다시 조명될 것이다.
이승만이 중국이 아니라 미국에 머문 건 대한민국에 축복이라 할 수 있다. 김구 세력이 활동했던 중국에선 쑨원의 자본주의 혁명이 마오쩌둥의 공산혁명에 밀려나고 있었다. 중국의 조선 독립운동가들은 사회주의에 많이 노출됐다. 소련과 김일성에 대해 김구가 경계심을 늦춘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을 것이다. 반면 이승만은 미국에서 자본주의의 풍요로운 성장을 목격했다.
통일이 되면 이승만의 선택이 얼마나 위대한 지 증명될 것이다. 해방공간에서 남북 합작 세력이 매달렸던 환상이 얼마나 위험한지, 이승만의 유상 토지개혁이 북한의 국가 소유 집단농장보다 얼마나 우월한지, 그리고 무엇보다 이승만의 한·미 동맹이 북한을 어떻게 막았는지 국민은 생생히 느낄 것이다.
자유민주 국가의 건국과 호국(護國) 속에 4·19의 함성이 묻힐 때 천상(天上)의 이승만은 국부라 불릴 수 있을 것이다.
김진 논설위원
김진 기자 jin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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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영식의 세상만사] 국부(國父)는 없다
기사입력 2016.01.21 오후 8:13
/주필 yshw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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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民主)와 어울리기 어려워
‘건국의 아버지들’을 기억하자
개개인의 공과 함께 평가해야
이승만 전 대통령을 ‘국부(國父)’로 평가하자는 한상진 국민의당 공동창당준비위원장의발언이 야권에 정체성 논란을 불렀다.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선거대책위원장의 즉각적 반발과 ‘건국절’에 대한 입장 표명 요구를, 한 위원장이 김 위원장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전력을 거론해 맞받아치면서 불붙은 논란이 빠르게 번져나갔다. 그러나 논란을 계기로 국민의당 지지율 상승세가 꺾이자 한 위원장은 해명과 사과, 김구 묘역 참배 등으로 논란 진화에 나섰다.
적잖은 전문가들은 한 위원장의 이번 발언이 나름대로 계산된 것이라고 보았다. 더민주와 결별하면서 밝힌 이념노선의 차이를 분명히 드러내는 데 현대사나 해방전후사에 대한 인식처럼 좋은 재료가 없다. 실용ㆍ온건 개혁파가 주축인 국민의당이 온건보수 세력에 친근감을 표해 외연을 확장하려면, 보수ㆍ진보 사관이 엇갈리는 현대사 쟁점에 다소 보수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었을 성싶다. 그러나 오래 전부터 보수의 핵심 징표처럼 여겨져 온 ‘이승만 국부’ 논의를, 그것도 4ㆍ19 민주묘역에서 꺼내 든 것은 ‘계산된 의도’보다는 발언의 즉흥성이 두드러진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등을 계기로 그 동안 여러 차례 거듭된 논란의 내용에 비추어 초대 대통령이니 국부라고 불러도 좋지 않겠느냐는 그의 생각이 너무 순진하거나 안이해서 더욱 그렇다.
반면 그의 발언을 두들기느라 여념이 없는 더민주나 진보학계의 ‘국부’ 인식은 요건이 지나치게 엄격하다. 베트남의 호치민(胡志明)이나 터키의 케말 파샤처럼 건국의 기초를 닦고, 초대 최고지도자로서 국가발전에 분명한 족적을 남기고, 국민적 존경을 잃은 적이 없는 인물이어야 한다. 그 동안 이승만 전 대통령의 대안으로 거론된 김구나 박정희ㆍ김대중 등 어느 누구도 이런 엄밀한 기준을 채우지 못한다. 이 전 대통령이 국부가 아니듯, 다른 정치지도자 가운데도 마땅한 후보는 없다.
이런 현실을 두고 ‘국부가 없는 이상한 나라’라고 지적하는 사람도 있지만 동의하지 않는다. 국부는 없을 수도 있고, 없어도 좋고, 실제로도 없다. 우선 국부라는 말 자체가 세계사적 보편성보다는 중앙집권적 왕조 통치의 전통이 강한, 동양적 특성과 가까이 있다. 국부의 사전적 의미는 ‘나라의 아버지’로, 대비되는 말인 국모(國母)가 왕비를 가리키듯 임금을 가리킨다. ‘임금과 스승과 아버지는 하나’(君師父一體)라는 통치이데올로기가 ‘사부(師父)’와 함께 낳은 말이다. 아울러 국부가 있는 나라는 대개 진정한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있거나, 여전히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국민통합의 중요한 수단으로 삼고 있다.
왕정의 역사를 털어낸 자리에 세워진 민주주의 국가에서 굳이 국부의 존재를 희구할 이유가 없다. 아니, 민주주의가 정착되고, 민족주의 이념의 퇴행성이 충분히 드러난 이제 와서
국부를 가지려는 발상이 오히려 비정상이다.
프랑스가 드골, 미국이 조지 워싱턴을 국부로 섬긴다는 반론이 나올 수 있지만, 억지로 갖다 붙였을 뿐 보편적 국민 인식은 아니라고 한다. 실제로 미국은 국부보다는 ‘건국 아버지들(FoundingFathers)’을 흔히 쓴다. 아브라함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 모두에 ‘87년 전 우리 아버지들(ourFathers)’이라고 언급한 사람들이다. 대영 독립전쟁 발발 1년 뒤인 1776년 ‘독립선언문’과 이듬해 제헌의회의 건국헌법 기초작업에 헌신한 주역들이다. 독립전쟁을 이끈 전쟁영웅이자 초대 대통령인 워싱턴은 물론이고 , 존 아담스, 벤자민 프랭클린, 토마스 제퍼슨, 제임스 매디슨, 알렉산더 해밀턴 등 많은 사람이 포함된다.
그러고 보니 논리적으로든 현실로서든 존재할 수 없는 국부가 아니라 미국처럼 ‘건국의 아버지들’을 꼽아보려는 노력은 필요할 성싶다. 밑도 끝도 없는 헛된 국부 논란으로 현대사 인물들의 얼룩만 들춰낼 게 아니다. 그 대신 김구 이승만 김규식 등 많은 우리 ‘건국 아버지들’을 집단으로, 개개인의 공과(功過)와 함께 기억할 수 있다면 우리 안의 역사 화해에도 좋지 않겠나.
[양상훈 칼럼] 한 위대한 한국인을 무릎 꿇고 추모하며
| 2015/07/16 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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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전 1965년 7월 19일 오전 0시 35분 하와이의 한 노인 요양원에서 나이 아흔의 한국인 병자가 숨을 거두었다. 한 달 전부터 피를 토했다. 7월 18일엔 너무 많은 피가 쏟아졌다. 옆에는 평생 수발하던 아내, 대(代)라도 잇겠다며 들인 양자와 교민 한 사람밖에 없었다. 큰 한숨을 한 번 쉬더니 숨이 끊어졌다. 어떤 어려움에도 우는 법이 없었던 아내가 오열했다. 전기 작가 이동욱씨는 영결식의 한 장면을 이렇게 전했다. 한 미국인 친구가 울부짖었다. "내가 너를 알아! 내가 너를 알아! 네가 얼마나 조국을 사랑하는지… 그것 때문에 네가 얼마나 고생을 해왔는지. 바로 그 애국심 때문에. 네가 그토록 비난받고 살아온 것을. 내가 알아…."
그 미국인은 장의사였다. 그는 1920년에 미국서 죽은 중국인 노동자들의 유해를 중국으로 보내주고 있었다. 그런데 이승만이라는 한국인이 찾아와 그 관(棺)에 숨어 상하이로 가겠다고 했다. 한국 독립운동을 하는데 일본이 자신을 현상수배 중이라고 했다. 그 한국인은 실제 관에 들어가 밀항에 성공했다. '너의 그 애국심 때문에 네가 얼마나 고생했고, 얼마나 비난받았는지 나는 안다'는 절규는 그냥 나온 것이 아니었다.
15일 아침 서울 국립현충원 이승만 대통령 묘소를 찾았다. 나흘 뒤면 그의 50주기다. 필자 역시 이 대통령에 대해 부정적 얘기만 듣고 자랐다. 그의 생애 전체를 보고 머리를 숙이게 된 것은 쉰이 넘어서였다. 이 대통령 묘 앞에서 '만약 우리 건국 대통령이 미국과 국제정치의 변동을 알고 이용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보았다. 고개를 흔들 수밖에 없었다. 그 없이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그 없이 우리가 자유민주 진영에 서고, 그 없이 전쟁에서 나라를 지키고, 그 없이 한·미 동맹의 대전략이 가능했겠느냐는 질문에 누가 "그렇다"고 답할 수 있을까. 추모비에 적힌 지주(地主) 철폐, 교육 진흥, 제도 신설 등 지금 우리가 디디고 서 있는 바탕이 그의 손에서 나왔다. 원자력발전조차 그에 의해 첫발을 내디뎠다.
그는 무지몽매한 나라에 태어났으나 그렇게 살기를 거부했다. 열아홉에 배재학당에 들어가 나라 밖 신세계를 처음으로 접했다. 썩은 조정을 언론으로 개혁해보려다 사형선고까지 받았다. 감옥에선 낮에는 고문당하고 밤에는 영어 사전을 만들었다. 이 대통령은 독립하는 길은 미국을 통하는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1905년 나이 서른에 조지워싱턴대학에 입학하고 하버드대 대학원을 거쳐 프린스턴대에서 국제정치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41년 미국에서 'JAPAN INSIDE OUT(일본의 가면을 벗긴다)'을 썼다. 그 책에서 이 대통령은 일본이 반드시 미국을 공격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책이 나온 지 넉 달 뒤 일본이 진주만을 폭격했다. 미국 정치인들은 한국인 이승만을 다시 보았다.
이 대통령은 1954년 이 책의 한국어판 서문을 이렇게 썼다. '일본인은 옛 버릇대로 밖으로는 웃고 내심으로는 악의를 품어서 교활한 외교로 세계를 속이는… 조금도 후회하거나 사죄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을뿐더러… 미국인들은 지금도 이를 알지 못하고 일인들의 아첨을 좋아하며 뇌물에 속아 일본 재무장과 재확장에 전력을 다하며… 심지어는 우리에게 일본과 친선을 권고하고 있으니….' 이 대통령은 서문을 '우리는 미국이 어찌 하든지 간에 우리 백성이 다 죽어 없어질지언정 노예는 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고 합심하여 국토를 지키면 하늘이 우리를 도울 것이다'고 맺었다. 평생 반일(反日)한 이 대통령을 친일(親日)이라고 하고, 평생 용미(用美)한 그를 친미(親美)라고 하는 것은 사실을 모르거나 알면서 매도하는 것이다.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는 "어지러운 구한말 모두 중·일·러만 볼 때 청년 이승만은 수평선 너머에서 미국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를 19세기 한국의 콜럼버스라고 부른다. 우리 수천년 역사에 오늘날 번영은 대한민국을 건국한 이 박사의 공로다. 그런데 지금 우리 국민은 이 위대한 지도자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했다. 거인이 이룬 공(功)은 외면하고 왜곡하며, 과(過)만 파헤치는 일들이 지금도 계속된다. 건국 대통령의 50주기를 쓸쓸히 보내며 감사할 줄 모르는 우리의 자해(自害)와 업(業)을 생각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물러난 후 겨울에 난방할 땔감도 없었다. 하와이에선 교포가 내 준 30평짜리 낡은 집에서 궁핍하게 살았다.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 친정에서 옷가지를 보내줄 때 포장한 종이 박스를 옷장으로 썼다. 교포들이 조금씩 보내준 돈으로 연명하며 고국행 여비를 모은다고 5달러 이발비를 아꼈다. 늙은 부부는 손바닥만 한 식탁에 마주 앉아 한국으로 돌아갈 날만 기다렸다. 그렇게 5년이 흘렀다.
이 대통령이 우리 음식을 그리워하자 부인이 서툰 우리말로 노래를 만들어 불러줬다고 한다. 이 대통령도 따라 불렀던 그 노래를 이동욱 작가가 전한다. '날마다 날마다 김치찌개 김칫국/날마다 날마다 콩나물국 콩나물/날마다 날마다 두부찌개 두부국/날마다 날마다 된장찌개 된장국.' 아무도 없이 적막한 그의 묘 앞에서 이 노래를 생각하니 목이 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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