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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by TheStrok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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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까지 가는 교통편. 친절한 숙소 주인이 벽에 붙여뒀다. 비행기 시간은 17시 40분이라 여유가 있다. 어제 못 탄 유람선 대신 보트라도 타야지.

정확한 값은 기억 안나지만 학생할인을 받아 매우 저렴한 비용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한바퀴 돌 수 있었다. 저 티켓에 써있는 돈을 지불하진 않았다.

동영상에서는 잘 안 들리지만 바람이 굉장했다. 가이드가 열심히 떠들지만 뭔 소린지 알아들을리가 있나.

물 위에서 올려다보는 도시는 또다른 느낌이다.

금을 좋아하는 러시안

내가 떠나서 아쉬운지 상트페테르부르크 표정도 어둡다.


시내를 세분하는 강줄기에서 도시를 양분하는 본강으로 흘러들어간다. 어제 갔던 에르미타주 미술관, 겨울궁전이 보인다.

한강 폭이 이정돈가 더 큰가?

그러고보니 저 건너편 섬에 못 넘어가봤네. 도스토예프스키 '상처 받은 사람들' 속 여자 꼬맹이가 저 동네에 살았다. 오겡끼데스까~

이게 숲이야 공원이야

바람이 굉장히 심하게 분다.

 러시아에서의 마지막 만찬이다. 에피타이저로 시킨 수프와 데킬라 한잔. 한대접을 갖다줘서 수프라기보단 국, 스튜 느낌이다. 소금과 라임, 리쿠르의 조합이 그럭저럭 괜찮다.

 담배 필 수 있는 노천에 자리 잡았다. 예전엔 우리나라에서도 식당에서 흡연이 가능했다. 2012년부터인가 기점으로 실내 절대금연이 시행되고 나서 위와 같은 장면은 상상할 수도 없다. 나에게 실내흡연은 로망과 낭만이다. 수많은 대문호들이 담배를 하나 꼬나물고 고뇌하는 표정으로 펜촉을 종이 위에서 놀려대는 모습은 경외심을 불러일으킨다. '저 담배와 손에서 세상을 뒤흔드는 작품이 나오고 있구나' '머릿 속에 쌓인 이야기를 담배와 펜을 이용해 뿜어내고 있구나' 비단 소설가 뿐 아니라 예술가, 판검사, 언론인 등 한 분야에 일생을 바친 이들의 책상머리 흡연은 신성하기 그지없다. 역시 80년대야말로 남자의 시대다.

이 나라에선 나도 그들 흉내를 낼 수 있다. 으깬 감자 위에 올라간 커틀릿과 맥주를 마신 후 담배를 꼬나물면 눈물이 다 날 지경이다. 별 개폼을 다 잡는다.

떠나기 싫어라~

하지만 떠나야 하느니라.. 아쉬운 마음을 억누르고 공항으로 향한다. 왔을 때의 반대로만 가면 된다.

 상트페테르부르크 풀코보 공항에서 모스크바를 경유해 인천으로 가는 루트다.

 공항에 두 시간 일찍 도착했다. 왜케 빨리 간건지 지금도 이해가 안된다. 해외 뻔질나게 돌아다니는 친구가 공항에는 항상 두 시간 전에 도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근데 아무리 봐도 두 시간은 너무 길다. 한 시간 정도면 충분한듯.

 역시나 문제가 발생했다. 공항 내부에 흡연실이 없다. 모든 공항에 흡연실이 있다고 착각해서 밖에서 담배를 안 피고 들어왔다. 이미 캐리어도 부치고 탑승게이트 까지 들어온 바람에 꼼짝없이 몇 시간 동안 강제금연이다. 나가려면 모든 절차를 처음부터 다시 밟아야 한다. 또 한번 해결법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걱정마라, 난 답을 찾을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 제일 좋아하는 명언 중 하나가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다. 모스크바에서 숙소를 잃었을 때도, 야밤에 휴대폰 배터리가 방전됐을 때도, 난 항상 문제를 해결했다. 이번에도 그럴 수 있다. 공항 직원에게 흡연실이 있는지 묻자 그딴 거 없다고 한다. 대신! 공항 내 아이코스 대리점에서 전자담배를 무료로 시연할 수 있단다. 거기엔 이미 나 같은 니코틴 중독자 몇 놈이 의자에 늘어져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신분증을 보여주고 그들 옆에 앉아 같이 하나 폈다. 하나 더 피기엔 약간 눈치가 보여서 한갑을 샀다. 남은 건 친구 주지 뭐.


한 시간 반을 날아 경유지인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여기는 도모데도보 공항이 아닌 셰레메티예보 공항이다. 인터넷 검색해보니 모스크바에는 공항이 총 일곱 군데나 된다고 한다. 도시 크기는 그렇게 안 커보이는데 유럽의 관문이라 공항이 많은가보다.

 담배 피러 나오자마자 현대차 마크를 보고 반가워서 찍었다. 스쳐가는 사람들 전화기가 삼성, 엘지 것인 걸 볼 때마다 왜 그렇게 반갑던지. 허허. 근데 반가움에 정신팔다가 비행기 놓칠 뻔 했다. 흡연구역 찾다가 입구를 잊은 것이다. 공항 한바퀴 돌다가 승무원, 공항 직원 입구로 들어가기도 했다. 그래도 저 간판 맞은 편에 입구가 있다는 걸 기억해서 겨우 돌아왔다. 고마워요 현대자동차!
 정신 없이 뛰어서 간신히 탑승게이트에 섰다. 진짜 미친듯이 달려서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정신을 간신히 부여잡고 면세점으로 향했다. 그렇게 주어진 5분을 양주 사는 데 바쳤다.
 휴, 이제 진짜 비행기 타고 집으로 날기만 하면 된다. 근데 정신차려보니 여기저기서 한국말이 들린다. 어? 어?!! 내가 잘못 들었나. 집 갈 때 됐다고 환청이 들리나? 혼란스러웠으나... '진짜' 한국사람이다. 한국인. 나와 같은 피를 나눈 그 종족들이 도처에 널렸다. 와 순간 눈물 날 뻔했다. 왜 이렇게 반갑지. 나조차도 놀랐다. 러시아 떠나는 아쉬움에 가슴이 먹먹하기만 했는데 한국말을 듣는 순간 집에 너무 가고 싶어졌다. 까맣게 잊고 있던 우리집, 우리나라가 우리말을 통해 되살아났다. 내가 사용하는 언어를 쓰는 사람을 마주치는 게 이렇게 감동적인 일이었나. 일주일 내내 입에서 발화하지 못한 한국말이다. 나도 내뱉고 싶었다. 옆 사람한테 시답잖은 개드립을 날리고 싶고 그 개드립을 이해할 수 있는 그 사람과 마음껏 떠들고 싶다. 아...! 이러니 저러니 해도 조국이 최고인가.

그 순간부터 세상 모든게 아름다워 보인다. 여지껏 탄 비행기 중 최고다. 러시아 국영항공사라더니 역시 서비스도, 시설도 좋다. 기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겠다. 나 집에 간다! 승무원에게 한껏 치아 자랑을 하면서 '아임 고잉 홈' 했더니 '콩그레츄레이션, 서울?' 묻는다. '예스! 서울!'

 외국 여행자들은 대개 두 부류다. 여행지에서 떠나기 싫은 사람과 빨리 귀국하고 싶은 사람. 난 둘 다다. 러시아와 러시아 사람들, 음식, 도시가 사랑스러운 동시에 고국이 그리웠다. 모스크바 공항에서 한국인을 만난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았으니. 게다가 비행기 옆좌석도 한국인이었다. 그와 잡담을 나눴을 때의 기쁨이란. 별 중요한 대화도 아녔는데 마냥 좋았다.

비행기에서 받은 아에로플로트 항공사 안대. 드디어 집에 간다는 마음에 긴장이 풀려서인지 정말 정신 없이 잤다. 눈에 두르자 마자 몇 시간이 뇌에서 지워졌다. 눈 감았다 뜨니 한국이다.

 비행기 도착 시간도 아주 완벽하다. 인천 땅에 내리자 웃음이 주체가 안 된다. 나사 하나 빠진 백치처럼 실실거리며 입국장으로 들어섰다. 위대한 대한민국 국민의 입국심사는 기계가 한다. 출입국심사관 같은 게 자국민을 귀찮게 하지 않는다. 옆에선 외국인들이 길게 줄을 선 채 입국심사를 받지만 난 그럴 필요 없다. 부러움 섞인 눈길을 받으며 당당하게 자국민 심사대로 걷는다. 걸으면서 심사 카메라 한번 쳐다봐주고 게이트에 여권 갖다대면 끝이다! 너무 기뻐서 카메라에 대고 경례를 올려붙였다. 마음 같아서는 대한민국 만세라도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아, 나의 조국 대한민국이여.

사실 러시아에서 비행기 탈 때마다 테이블 위에 내 여권을 슬쩍 올려놨다. '나 이런 선진국에서 온 선진국민이야' '이게 바로 너네 나라 여권과는 비교도 안되는 파워를 지닌 대한민국 여권이란다' '이 여권만 있으면 무려 188개국을 비자 없이 여행할 수 있단다' 하는 자랑질이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물론 그들은 한국이 선진국인지도, 한국 여권이 파워가 센지도, 몇 개국 무비자인지도 별 관심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알고 나의 조국이 알면 그걸로 충분하다. 인간의 자존감과 자신감은 내면에서 나오니까. 해외 갔다오면 누구나 애국자가 된다더니 그말이 사실이네.

 정신 없이 출국장을 빠져나오자마자 한 일은.... 휴대폰 살리는 것도,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 것도, 담배를 피는 것도 아니었다. 바로 내 인생의 진리, 나의 에너지, 나의 마약. 레쓰비를 마시는 것이다. 공항 내 편의점으로 달려가 레쓰비를 집을 수 있는대로 집었다. 한모금 흘려넣으니 드디어 귀국이 완성됐다. 레쓰비여 영원하라.

 공항버스를 타고 서울로 들어선 길에서는 늘어선 고층빌딩이 또한번 나를 감동 시켰다. 그래, 도시는 이래야지! 숨막힐듯 치솟은 건물과 사람으로 미어터지는 길거리, 자동차로 가득한 도로! 모름지기 인간이 사는 곳이라면 이래야 한다. 이게 나라다! 레쓰비를 홀짝거리며 대한민국의 수도에 감탄하다보니 어느새 약수역에 도착해있다.

 오, 홈. 마이 홈. 쥐알통만한 내 자취방이여! 그대 이름은 평안이라. 이것으로 도스토예프스키를 찾아 떠난 나의 짧은 러시아 여행에는 종지부가 찍혔다.

 이번 여행으로 느낀 점? 흠. 사실 새로운 전환점이 찍혔다거나 거창한 지침이 새겨지진 않았다. '무모함의 미학'이라는 인생의 모토를 재확인했을 뿐이다. 삶을 반추해보니 아무리 말도 안되는 일을 맞닥뜨려도 일단 부딪히면 항상 답이 있었다. 군대에서 얻은 가장 유용한 마인드 중 하나는 바로 '하면 된다'다. 우리 부대에는 '모르겠습니다' '없습니다'라는 말이 없었다. 자대배치 받은 순간 저 두 표현은 머릿속에서 지워야 했다. 그 자리는 '알아보겠습니다' '찾아보겠습니다'가 대신했다. 진짜 어이 없지만 찾아보겠다고 나서면 진짜로 찾아지고 알아보겠다고 나서면 진짜 알아진다. 비누도 모자라는 부대였지만, 고참이 샴푸가 필요하다고 하면 그 새벽에 부대 전체를 뒤져서 기어이 찾아 갖다바쳤다. 답이 없으면 만드는 곳이 군대다. 혹자는 무식한 군바리들의 무대뽀 정신이라고 비하할 수 있으나 난 그런 정신이 좋다. 정주영 회장이 직원들에게 항상 묻고 다녔다지 않았던가. "이봐, 해봤어?"라고. 출발 전의 '국제미아되면 어쩌지' '비행기 예매 제대로 했겠지? 수하물 추가 된건가?' '스킨헤드 만나면 도망가야하나?' '소매치기 당하면 큰일인데' 등등의 걱정은 '할 수 없어'와 동의어였다. 안된다고 생각하면 수많은 이유와 그럴듯한 핑계가 생긴다. 하지만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덤비고 보면 생각보다 길은 활짝 열려있다. 일단 가는 거다. 설마 죽기야 하겠냐 무조건 가자. 그렇게 만난 친절한 사람, 맛있는 음식, 아름다운 풍광은 걱정을 조금씩 지워갔다. 그 망각의 끝에는 감동과 행복이 있었다.

 어쩌면 내가 무계획으로 돌아다녀서 더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쌓은 것일지도 모른다. 한국인에게 유명한 맛집이나 관광지 따위는 애초에 머릿속에 없었다. 여행 루트는 달나라 얘기다. 여행책은... 봤겠냐? 발길 닿는대로 걷고 감상하다가 배고프면 길가에 보이는 식당에 들어갔다. 덕분에 개고생 깨나 했지만 남들과 다른 여정을 즐겼다는 만족감과 스스로 개척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말그대로 현지인에 파묻혀 지냈다. 그게 여행의 이유다. 불가능해보이는 일을 오롯이 나만의 힘으로 해결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에 대한 믿음을 굳건히 해가는 것. 험난하다면 험난하고 고달프다면 고달플 이 일생을 꾸역꾸역 살아가는 이유와 정확히 같다. 그러니-이 글을 읽는 당신, 혹 러시아 여행을 망설이고 있다면 일단 비행기 표부터 예매하라. 계획 같은 거 짜지 말고, 일어나지도 않은 일 미리 걱정하지 말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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